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蘭室에서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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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常

악성흑색종양(희귀 피부암)

매루 2016. 1. 19. 19:44

 

 

 

저는 2003년에 왼쪽 사타구인에 생긴  악성흑색종양으로  희귀 피부암 말기 판정을 받았었읍니다

지난해 4월초까지 만 12년동안 6번의 큰 외과수술(재발된 종양제거수술)과

12차례의 항암치료(병원에 입원하여 1주일동안 항암주사를 맞고  2주일동안 집에서 건강을 회복 시킨후 다시 입원하는 과정) 를 

12차례 하였읍니다 

 

 신영복교수님과  우리국민들을 영원히 갈라놓은 질병이 악성흑생종양 이기에

같은 질병을 가지고 그분과 달리 운좋게 생명을 연장하고있는 저로서 남다른 감회가 생깁니다

 

임종을 준비하시는 와중 에서도 그분께서 행하신 거룩함에 고개가 숙여지며

저의 생이 다하는날까지 그분의 뜻과 행함에  늘 가까운 모습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고저 합니다 

 

 

 

 

 

 

 

 

 

 

멜라닌(melanin)에 의해 피부세포에 생기는 검은색의 종양

 

멜라닌은 사람의 피부와 털에 색을 띠게 하는 화학색소이다.

흑색종은 때로는 신체의 다른 조직에서 생기기도 하며, 그 색깔이 검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흑색종은 악성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모반이나 사마귀가 자극을 받아 흑색종이 될 수도 있다.

흑색종은 아프리카 흑인들처럼 검은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극히 드물다

 

 

“선생님은 어떻게 연애를 하셨나요?” 1992년 겨울 성공회대에서 만난 신영복 교수님에게 내가 던진 질문이다.

 몇몇 선배들과 함께 만났는데, 선배들은 제일 후배였던 나에게 질문을 하게 했다.

여러 선배들은 감옥 생활을 비롯해 신 교수님의 철학 등 거창한 질문을 할 것으로 기대했는지, 다소 황당하다는 표정들이었다.

당시 대학생의 필독서였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은 뒤라,

신 교수님이 오랜 감옥 생활 뒤 50살에 가까운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된 사연이 궁금했다.

 신 교수님의 답이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꽤 긴 시간에 걸쳐 연애와 사랑에 대해 설명했던 기억이 난다.

이어 의과대학에 다닌다고 소개하니 감옥에서 만난 이구영 선생 얘기를 길게 하셨다.

어떤 책의 290페이지에 바늘을 하나 꽂아 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아픈 이들에게 침을 놓았다는 회고담이었다.

그분도 장기수였는데, 감옥에서 침술을 연마하신 모양이다.

이 선생의 침술 실력이 대단해 고문을 받아 여러 질환을 앓고 있는 장기수들의 많은 질병을 고쳤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어려운 형편에 있는 환자들에게 좋은 의사가 되라는 말씀도 해주셨다.

 

이후에 잊고 지내다가 신 교수님을 다시 만난 것은 10여년이 흐른 2003년이었다.

 성공회대 교수들이 주축이 된 축구팀과 경기를 했는데, 당시 신 교수님은 60살을 넘긴 나이에도 열심히 뛰셨고 축구 실력도 뛰어나셨다.

상대편으로 맞서면서 축구에 열중하다 보니 10여년 전에 뵈었다는 얘기도 못 나눴지만,

감옥에서 20년 동안 지내면서 갖은 고문까지 당했던 신 교수님의 건강이 괜찮아 보여서 다소 안심이 됐던 기억이 난다.

 

많은 이들의 정신적인 스승으로 남아 계실 줄만 알았던 신 교수님이 지난 주말 별세했다는 얘기를 듣고 적지 않게 놀랐다.

 또 마음 한편이 무너지는 듯 허탈함마저 생겼다.

신 교수님의 영결식 기사를 보니, 이런 감정을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신 교수님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빌 뿐이다.

 

신 교수님의 별세 소식을 기사로 읽다 보니, 악성 흑색종이라는 피부암을 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서양인들이 잘 걸리는 피부암의 한 종류인데,

 다른 조직으로 전이가 잘 되는 암이라서 진행된 상태에서 발견되면 예후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 교수님은 암의 가장 심각한 증상인 통증이 너무 강해 무척 시달렸고,

가장 효과가 크다는 마약성 진통제를 썼는데도 통증을 가라앉히지 못할 정도가 됐다고 한다.

이후 스스로 곡기를 끊고 운명을 달리하신 것이다.

자신의 존엄을 지켜가며, 삶을 마감하는 방식마저 선택하신 것 같다.

신 교수님답다고 느꼈다.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던 김 할머니에 대해 인공호흡기 장착 등과 같은 연명치료를 중단해도 된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2009년 나온 뒤

 연명치료의 범위를 두고 논란이 벌어진 적이 있다.

현대의학으로는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에게 하는 인공호흡기 장착이나 심폐소생술은 연명치료 범주에 들어 중단할 수 있지만

물이나 영양분 공급은 계속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암 분야 몇몇 전문의들은 영양분을 공급하면 암세포가 이를 흡수해 더 빨리 자라나 환자를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며

이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최근 관련 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이런 논의는 또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에 대해 우리 사회에 큰 깨달음을 주신

신 교수님이 선택한 죽음의 방식을 고민해보도록 조심스럽게 권하고 싶다.

 

 

김양중 의료전문기자 himtrain@hani

 

 

 

 

 

 

 

고등학생들이 세운 ‘평화의 소녀상’ 동상 아래 새겨진 고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글씨. 사진 성환철 교사 제공

 

고등학생들이 세운 ‘평화의 소녀상’ 동상 아래 새겨진 고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글씨.

사진 성환철 교사 제공

 

 

고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투병 중임에도,

 고등학생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고 알리기 위해 ‘평화의 소녀상’을 세운다는 소식을 듣고

손수 글씨를 써 보낸 사연이 알려지면서 잔잔한 감동을 전하고 있다.

지난해 11월3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앞에는 고등학생들이 만든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이날은 정부가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국정화 확정 고시를 발표한 날이기도 했다.

 

이화여고 학생들과 서울지역 고등학생 1만6000명이 2014년부터 소녀상 건립을 추진하면서 1년 만에 세워진 결과물이다.

 소녀상에는 ‘고등학생이 함께 세우는 평화비’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이 글귀를 쓴 이가 바로 고 신영복 교수다.

 

신 교수는 2014년 희귀 피부암 진단을 받은 뒤 투병 생활을 하다 암이 전이되면서 지난 15일 별세했다.

성환철 이화여고 교사는 18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지난해 5월쯤 소녀상 제작을 준비하면서 뜻있는 분이 평화비 문구를 새겨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성공회대학교 홈페이지를 찾아가서 신영복 교수님의 이메일 주소로 취지를 설명하는 메일을 드리게 됐다”며

 

“바로 다음날 ‘학생들이 뜻있는 걸 하는데, 써줘야 되지 않겠냐’는 교수님의 답메일을 받게 됐다”고 전했다.

 

 

 

고등학생들이 세운 ‘평화의 소녀상’ 동상 아래 새겨진 고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글씨. 사진 성환철 교사 제공

 

고등학생들이 세운 ‘평화의 소녀상’ 동상 아래 새겨진

 고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글씨. 사진 성환철 교사 제공

 

당시 투병 중이던 신 교수는 동료 교수를 통해 글씨를 전달했다.

 신 교수는 “평화비에 어떤 형태로 글씨를 쓰면 좋을지 정확히 알 수 없어서 판본 8개를 적어 보낸다”며

“판본을 보고 가장 좋은 것으로 사용하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성 교사는 “취지는 동의하지만 개인 사정 등으로 거절하는 분들도 있었다”며

 “신영복 교수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글씨를 써서 보내주셨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건강이 나쁘지 않으면, 소녀상 제막식에도 참석하고 싶다는 얘기도 들었다”며

 

 “마지막까지 학생들의 활동에 관심을 가지신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신영복 교수의 별세 소식이 알려진 15일 밤 학생들이 먼저 연락을 해와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고 밝혔다.

끝으로 성 교사는 고인에 대해 “전해 듣기만 했을 뿐인데도 학생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셨고,

 바른 길이라면 흔쾌히 자신을 포개어 주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며

“학생들에게 신 교수님이 남긴 말씀 하나하나가 어떤 것보다 뿌리가 될텐데,

소녀상에 남겨진 글씨로 신 선생님의 삶을 나눌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박수진 기자 jjinpd@hani.co.kr

 

 

 

고등학생들이 세운 ‘평화의 소녀상’ 동상 아래 새겨진 고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글씨. 사진 성환철 교사 제공

고등학생들이 세운 ‘평화의 소녀상’ 동상 아래 새겨진 고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글씨. 사진 성환철 교사 제공

 

 

고등학생들이 세운 ‘평화의 소녀상’ 동상 아래 새겨진 고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글씨. 사진 성환철 교사 제공

고등학생들이 세운 ‘평화의 소녀상’ 동상 아래 새겨진 고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글씨.

사진 성환철 교사 제공

 

 

 

 

 

 

<경향신문> 사설

‘시대의 스승’ 신영복 선생의 타계와 ‘연대의 가치’

 

스물일곱 청년이 감옥에 갇혔다. 20년 20일 만에 세상으로 나왔다. 쉰을 바라보는 중년이었다. 분노와 회한으로 가득 찰 법했지만 아니었다. 낮은 어조로 인간의 가치를, 공감과 공존을 이야기했다. 모진 고통을 희망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인간성의 고귀함을 증명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혁명적 언어가 아니었으나, 많은 이들의 내면에 조용한 혁명을 일으켰다. 누군가는 위로를, 누군가는 깨달음을, 또 다른 누군가는 삶의 나침반을 얻었다. ‘무기수 신영복’은 시대의 스승이 되었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타계했다. 고인은 탁월한 통찰을 보여준 지성이자, 앎과 삶이 일치한 지식인이자, 절제와 품격을 갖춘 ‘어른’이었다. 빈소가 차려진 성공회대에 수많은 시민의 발길이 이어지는 까닭이다. 고인이 온 생애를 매달린 화두는 사람 사이의 관계·연대를 통한 변화였다. 지난해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선생은 말했다. “한꺼번에 사회가 생각을 바꾸는 역사적 계기는 없습니다. 곳곳에 작은 숲을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작은 숲들끼리 소통의 연대를 만들어간다면 변화의 역량을 축적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고인이 ‘희망의 언어’라고 일컬어온 ‘석과불식(碩果不食·종자가 되는 과실은 먹지 않는다)’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씨 과일은 새봄의 새싹으로 돋아나고, 다시 자라서 나무가 되고, 이윽고 숲이 되는 장구한 세월을 보여준다”며 더불어, 꾸준히 일궈가는 변화의 힘을 강조했다.

연대와 공존의 가치를 이어받는 일은 산 자들의 몫으로 남았다. 의미 있는 변화란 몇몇의 명망가에 의해 이뤄지지 않는다. 소수 지식인의 현학적 담론으로 이끌어낼 수도 없다. 많은 사람이 손을 잡고, 다양한 층위에서 작은 실천이라도 쉼 없이 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간에 대한 믿음,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때 변화는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이런 대목이 있다. “교도소의 우리들은 (여름 징역보다)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여름 징역은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만든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도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한국이라는 공동체는 지금 ‘여름 징역’을 살고 있는 것 아닌가.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 ‘더불어 숲’의 가치가 절실하다. 신영복 선생의 안식을 기원한다.

 

 

 

 

 

노래 시인의 마을은  신영복 교수님께서 생전에 좋아하셨던 노래 입니다

신영복 교수님의 영결식에서의 추도곡을 정태춘씨가 부르기도 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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