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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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맹아산

매루 2015. 10. 7. 12:41

 

 

 

 

지난 10월 3일은 제가 졸업한 용현초등학교의 총동문체육대회가 있었던 날 입니다

제가 그학교의 학생 이었던 1960년대의 용현초등학교는 한국전쟁후 황해도 지역의 가난한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독각리염전(낙섬염전)이 있던 인천의 끄트머리 바닷가  동네 였읍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그학교의 학생 이었던 제가 지금은 환갑나이가 된것처럼

용현초등학교 또한 인천에서 인정해주는 명문학교(역사,규모, 학교주변의 주거환경 변화로 인한 학부모들의 여유있는 경제능력등)로

변 하였고 학교주변 또한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딱 들어맞을만큼 이지역은

인천의 교통중심지로 변하여  학교주변이 고층APT의 밀집지역이 되어있읍니다

 

학익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던 저는 2학년 1학기떼에 용현초등학교로 전학을 왔고

3학년 2학기때 다시 학익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가  5학년 2학기때에 용현초등학교로 다시 전학을 왔었읍니다

전학을 자주 하게된 까닭은 아버지의 직장내에서의 승진과 이직 때문 이었읍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때에 저희 아버지 께서는 용현초등학교 맞은편의 맹아산 꼭데기에 있었던

부랑아 보호시설과 농아(벙어리)학교에 지금의 행정실장격인 관리인으로 부임을 하시게 되고

저희 가족들도 맹아산에 마련된 관사로 이사를 하면서 저의 마지막 초등학교시절이 용현초등학교로 마무리 되었읍니다

 

맹아산의 부랑아(한국전쟁통에 부모를 비롯한 가족들의 소식을 모르는 아이들로, 부모가 없는 고아와 조금 성격이 다름) 보호시설에는

삼사십여명의 부랑아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지냈던 3년여동안 많은 추억들도 있었고

그들의 비참한 애환들을 곁에서 보고자란 저이기에

제가 성장하여 불우한 이들을 대하는  제나름대로의 가치관(세종대왕의 통치이념중 하나인 "밥은 민심이다"등)이 형성되어

훗날 제가 어른이되어 북한의  굶주림과 헐벗음에 대하여 다른사람들과 사회구조나 사는 이아기들을 나누다가

이따금 다른사람들에게 제가 빨갱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곤 합니다 

 

불랑아들이 매 끼니를 쌀한톨 섞이지않은 새까만 보리밥에

김치는 커녕 어떠한 반찬 하나없이 간장도 아닌 소금으로 간을 한 멀건 국물에 시래기를 삶은 국같지 않은 국으로  연명하는것을 보신

제아버지 께서는 당시 월미도에 주둔하고있던 미군부대의 협조를  요청 하셨고

미군들이 불도져를 가지고와 맹아산 꼭데기 이곳저곳에 밭을 만들어 주었고

비좁던 벙어리학교 운동장도 곱절은  넓혀 주었읍니다 

미군들이 만들어준 밭에 콩,고구마,배추,무우등을 심었고

여름이면 바닷물때에 맞추어 불랑아 전원이 낙섬부근의  갯벌에 나가서 조개나 물고기를 잡아오게 하셨고

그것들을 손질하여 잘 말려서 겨울에 부식으로 이용을 하게 하셨읍니다

 

부랑아시설의 원생들 중에는 몸이 몹시 야위어 드러나있는 갈비뼈 때문에 기타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

열차의 칸을 옮겨 다니며 노래를 부르던(요즈음의 앵벌이) 한 아이는

이별의 부산정거장등을 부를때면 듣는이들이 호주머니에 손이 안갈수 없을 전도로 노래솜씨가 무척 뛰어 났지만

노래 할때에 마저도 코를 흘리기에 칠칠이라는 별명을 가졌읍니다

 

제가 용현초등학교에 전학을 온것처럼 같은날 같은반에는 신흥초등학교에서 전학을 온 성대라는 이름의

새까맣고 커다란 눈동자의 귀여운 아이가 있었는데

성대네 집이 맹아산 꼭데기의 저희집 옆 이엇고 훗날 동인천중학교에 함께 진학을 하며

지금까지 저의 가장 오래된 벗이 되어잇읍니다

 

체육대회 진행중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지금은 존재조차 희미한 맹아산을 올라 보았읍니다

 

 

 

현재의 용현초등학교 정문

제가 다닐적에는 지금의 경인고속로쪽에 있었고 지금의 정문 주변 운동장에는 시이소,철봉,미끄럼틀이 있었읍니다

 

 

 정면으로 보이는 교실건물과 뒷편의 유원 아파트 사이에는 경인고속도로가 있읍니다

사진 정면 왼쪽에 옛 교문이 있었읍니다

옛 교문을 나서서 학교 울타리를 우측으로 끼고 걷다보면 용현초등학교 울타리와  POL (Petroleum, Oil, Lubricants) 철조망사이로

맹아산에 오르는길이 있는데 그길 중간부근이 지금의 정문 입니다

사진 왼쪽에 야트막한 고개가 보이는데 그왼쪽일대가 맹아산 입니다

 

 

 

왼쪽의 시멘트 블록담이 옛날에는 가시철조망 이었고  안쪽의 철조망을 따라 나있던 길로

총을 든 군복차림의 경비 아저씨들이 순찰을 돌곤 하였읍니다

사진에 있는 장소에  마을공동우물이 있었던걸로 기억이 됩니다

제친구 성대형제(성대와 두살터울의 형)는 방과후면 이곳에서 물지게를 지고 맹아산 꼭데기까지 나르곤 하였고

맹아산 왼쪽 채석장 위에는 움집이 하나 있었는데 그움집에는 당시 제물포고등학교에 다니던 형이 있었읍니다

저는 그형에게 몇달간 과외공부를 받기도 했었는데

당시 맹아산에는 전기보급이 안되었던 시절 이어서 밤이면 POL철조망을 따라 켜있는 방범등불 밑에서

책을 읽고있던 그형의 모스을 볼수 있었는데  그형과 달리 전깃불이 들어와있던 집에서 살던 저의 형편없는 학교성적 떄문에

아버지에게 비교를 당하며 꾸지람을 듣곤 하였읍니다

 

맹아산 오르는 길중에 가장 가파른 언덕 이었는데 제 기억으로는

오른쪽 빨간벽돌건물터로 그길이 이어져 있었던것 같은데

왼쪽에 맹아산에 오르는 계단이 생겨 있읍니다

 

 

 

저희들 어린시절에는 POL안에 원통을 잘라놓은듯한 모양의 커다란 기름탱크들이 서있었고

그 주변에는 도라무깡 이라고 불리우던  기름드럼통들을 이리저리  옮기 피라밋 모양으로 쌓던

노무자들의 모습이 마치 여름날 뙤약볕 아래에서  무리지어 일하는 개미떼의 모습 같았읍니다

 

 

 

POL은 훗날 SK그룹인 S오일의 전신인 유공(대한석유공사)이 되었다가

그터는 투자가치가 높다는 이유로 알자배기 주거단지로 변모하고 있읍니다

사진 오른쪽 높은 지역에 성대네 집이 있었읍니다

 

 

POL철조망길을 따라 나있던  맹아산을  오르는 길가  가장 높은곳에  오른쪽으로 농아학교와 부랑아시설로 가는 오르막길이 있었고

그오르막에 당시 벙어리학교 교감선생님댁이 있엇고 그위에 17회  정형렬이 살던집이

그리고 그위에 저희 가족이 살았던 관사가 있었읍니다 

 

사진은  성대네집이 있던 방향으로 나있던 평평한길인것 같은데 지금은 산책로가 되어 있읍니다

당시 벙어리학교 교감선생님댁이 있엇고 그위에 17회  정형렬이 살던집이

그리고 그위에 저희 가족이 살았던 관사가 있었읍니다

 

이날 반갑게 제가 속해있는  14회 졸업생들의 천막으로 정형렬,재은(손을 잡고 있는 남녀) 남매가 반갑게 찾아 왔읍니다

 

 

 

저의 어린시절 추억들이 무척 많은 맹아산 꼭데기의 벙어리학교 운동장터 인것 같습니다

 

 

맹아산 꼭데기에서 바라다 보이는 옛동양화학과 노적봉

고층아파트들이 없던 옛날에는 문학산은 물론이려니와 안양의 수리산 바다건너 영흥도가 한눈에 들어오던곳 입니다

 

 

 

동양화학앞 갯벌이 매립된후 그곳에는  자동차정비단지등의 각종산업시설과 아파트들이 들어서있지만

이쪽방향으로는 팔미도와 인천항을 드나드는 대형선박들의 모습을 볼수 있었던곳 입니다

 

 

 

옛추억을 더듬으며 이고저곳을 둘러 보던중  한 팻말이 눈에 띕니다

 

 

 

제가 이곳에 살적에도 맹아산에는 이따금씩 뱀이 발견되곤 하였읍니다

부랑아시설의 원생들중에 조현준 이라는 이름의 조금 나이가 들었던 뱀을 잘 다루는 원생이 있었는데 

"현준아, 현준아..."하며 크게 외치시는 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면 뱀이 나타나걸로 알면 되었었읍니다

 

 

 

맹아산의 벙어리학교와 부랑아시설이 지금의 부평(지하철 동수역 입구)으로 옮긴후

맹아산에 가장 먼저 들어선 우성 APT

 

용현초등학교 교정에서 바라본 맹아산

왼쪽의 신축중인 APT가 있는곳은  옛 POL터 이고

사진 오른쪽의 APT들이 서있는곳이  옛 맹아산 입니다

사진 왼쪽에 맹아산 꼭데기에 있는 우성APT의 벽에 우성 이라는 글자가 보입니다

 

 

 

 

제 어린시절 맹아산에 밤이오면 아베크족들을 비롯하여 일반인들의 인천시내의 야경을 구경하기 위하여 많이 올라오곤 하였읍니다

당시에는 마군들이 주둔해 있던  월미도와  인천항 그리고 지금의 중구지역에만 집중적으로 불빛이 있었고

지금의 남구나 남동구지역에는 그저 가로등불빛으로 위치를 알수있을 정도 였읍니다

사진속 멀리 월미도가 보입니다 

 

 

정확한 위치인지는 자신이 없지만

여름방학이면 우리들의 벌거숭이 어린시절은 낙섬염전 저수지에서 보냈읍니다

사진들이 옛 채석장 자리 이거나 부근인것 같습니다

수영을 하고난후 젖은 옷과 몸을 말리기 위하여 양지바른 채석장에 앉아있기도 햇고

귀에 물이 들어간 아이들은 햇볕에 따뜻해진 돌맹이를 귀에 대어 보기도 했읍니다

 

 

 

 



지난 한가위를 즈음하여 제가  온라인에 올렸던 사진 입니다

맹아산 주변의 바다와 갯벌을 막아서 염전과 공장지대가 들어섰고

사진 오른쪽에 맹아산 꼭데기에 있엇던 벙어리학교 건물과 운동장이 보이고

맹아산 왼쪽 능선에 계단식밭이 보이고 그아래에 용현초등학교운동장과 옛교사가 보입니다

당시 용현초등학교의 정문은 대성목제방향(지금의 경인고속도쪽)에 있었고

사진 왼쪽에는 황해중학교의 교사는 보이질 않지만 운동장이 흰색으로 보입니다 

사진 오른쪽에 낙섬염전에 물을 공급하던 저수지가 보입니다

제 얼리적 여름이면 이곳에서 벌거숭이 하루를 보냈고

저수지와 맹아산 사이(사진 맨 오른쪽) 에 채석을 하여 산귀퉁이가 패여 하얗게 보이는곳이 채석장 입니다


 


1966년에 촬영된 사진 입니다 

당시 용현초등학교 교문을 나선후 인하공대쪽이나  히다찌 쪽에 살던 친구들이 사용하던 통학로가 있었는데

당시 이길은 용현초등학교 주변으로 차를 이용하여 들어올수있는 유일한길 이었읍니다

용현초등학교 정문과 칠교회방향 철로 중간쯤에 POL에 근무하던 노무자들이 사용하던 출입문이 있엇읍니다

사진은 그당시  그 문앞에서 노무자들의 파업 모습인데

사진 왼쪽위에 맹아산에 있었던 벙어리학교 2층건물이 보입니다


 

 

 

 

 

 

 

 

 

 

 

 

 

 

 

 

 

 

 

 

 

 

 

 

 

 

 

 

 

 

André Rieu Live at the Point, Dublin, Irel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