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蘭室에서1515

이모님 92회 생신 본문

나, 가족 이야기

이모님 92회 생신

매루 2015. 6. 5. 21:32

 

 

 

 

 

 

 

 

 

 

 

 

어제 (2015년 6월 4일)는 제의 이모님의 92회 생신일 이었읍니다

1924년생 이시니까 올해로 92세 이십니다

황해도 장연의 유복한 가정의 3째딸( 지금은 안게신 제어머니께서는 막내이자 네쪠딸 이셨읍니다) 이셨던 이모님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셨고

인천에 있던 이천전기의 공장장과 결혼을 하신후 슬하에 두남매를 두셨었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나기전에 어린남매를 데리고 황해도 장연으로 친정 나들이를 가셨다가

저희 외할머니이신 친정어머니께서 유독 귀여워 하셨던 맏아들을 친정에 두고온후 얼마 안되어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남편(저의 이모부)마저 육군장교로 참전을 하셨다가 전사를 하시어

이모님은 딸(저의 이종사촌 누나)과 함께 원호가족으로 지내 오셨읍니다

지금은 저의 목사동생이 목회를 하고있는 서구 마전동의 교회주변의 아파트에 살고 게시며

목사동생의 가족들과 교회성도님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시며 지내고 게십니다

 

 

 

 

 

 

 

 

  이모님의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는 인애누나(저의 이종사촌)가 생일선물로 만들어 주셨답니다

 서울의 중앙대학교에 다니고 게시던 저의 어머니 께서는

인천에 살고 게시던 언니(저의 이모님)의 집에 게시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하고  영국군 부대에 근무를 하시다가  당시 37세의 황해도  피난민 이셨던 제아버지와 결혼을 하셨읍니다 

 

 

 

전쟁 미망인 이셨던 이모님 께서는 인애누나에게 온갖 정성을 기울이며 키우셨고

인애누나는 이모님의 정성과 기대에 보답을 하듯 이화여대 기악과(피아노)에 입학을 하였

이화여대 재학시절에는 경인선 통학열차안에서 남자대학생들에게 인기를  한몸에 받았었던

예쁘고 친절하여 저희형제들도 무척 따르고 좋아했전 누나 였읍니

 

 

목사동생 부부는 다음달에 미국유학을 가기로 되어있는 알기(아들)의 유학준비 때문에

서울에서 다른 선약이 있어서 함께 자리를 하질 못했읍니다

 

 

 

저희가족들이 함께 식사를 하였던 갈비집 건물의 길건너편 사거리 공터에는  목사동생의 시비(詩碑)가 있읍니다

시비 왼쪽 아파트단지안에 목사동생과 가족들 그리고 이모님께서 다니는 교회가 보입니다

 

 

 

 

 

 

 

데스크승인 2012.01.11   지면보기

김민재 | kmj@kyeongin.com  

 

 

 

 

 

 

 

 

 

 

 

 

 

 

 

 

 

 

 

 

 

 

 

 

 

 

 

 

 

 

 

 

 

 

 

 

 

 完井

 

'우물井은 동서남북사거리모양

 

누구에게든 물이가고

 

누구든 물길러간다는 뜻

 

 完井사거리의 그대

 

누구에게든 가고

 

누구든 찾아오니

 

그대는 사랑'.

 

 

 

 


 


인천 서구 완정사거리에는 '완정(完井)사거리'라는 시비(詩碑)가 있다.  이 시는 검단4동에 위치한 마전교회 김광후(55) 목사의 작품으로 시비는 지난해 7월 세워졌다. 종교를 초월한 김 목사의 유별난 지역사랑에서 빚어진 작품이다.

10일 오후 마전교회에서 만난 김광후 목사는 "동네마다 좋은 이름이 있고, 전설에 따른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는데 아파트가 들어서고 도시화되면서 이런 이야기가 흙더미에 같이 파묻히는게 너무 아쉬웠다"며 "이 시는 내가 사는 동네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계양구에서 목회를 하다 1991년 검단으로 왔다는 김 목사. 그는 자연부락이 많았던 서구 검단지역이 점점 도시화 되면서 향토성과 옛이야기들이 사라지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고 한다. 그러던 중 김 목사는 검단4동 주민센터에 지역의 향토성을 간직하고 문화의 품격을 높일 수 있는 사업을 해야한다고 제안했고, 환경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완정사거리에 시비를 세울 수 있었다.

김 목사는 "완정은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완전한 우물이라는 뜻이다. 유래를 살펴보니 이 일대에 샘이 하나 있었는데 물이 많아서 주민 모두가 다 마실 수 있는 우물이었다고 하더라"라며 "내가 사는 동네에 완정이라는 아름다운 이미지가 있다는 것을 이 길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는 이어 "시비에 특별히 교회 이름이나 목사 직함을 쓰지 않은 것은 목사가 아닌 주민 '김광후'로 평생 살고 싶다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김 목사가 지역사회에 애착을 갖게 된 것은 지난 2007년 여름 아프가니스탄 한국인선교단 피랍사건 때부터다. 당시는 국내에서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의 수위가 높을 때였다.

그는 "한국교회가 국내외에서 정말 많은 봉사와 헌신을 하는데 왜 국민들은 이를 몰라줄까 생각해보니 지역사회와의 밀착이 없었다"며 "이때부터 모든 목회 방향을 지역주민과 함께하자고 정하다보니 진짜 지역을 사랑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이때부터 '주민함께 검단사랑 바자회'라는 바자회를 매년 개최, 수익금을 지역에 기부하고 있다. 최근엔 바자회 수익금 1천500만원을 검단의 각 지역 청소년 장학금으로 사용해 달라며 검단4동 통장들에게 전달했다.

김 목사는 "우리 지역의 이름과 분위기, 조상의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은 엄청난 손실"이라며 "이것을 지키는 것이 바로 지역 학생들에게는 말 없는 교육이 될 것이고, 지역의 자산가치는 올라가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12.01.11    경인일보/김민재기자

 

가족들과 함께

 

 

 

 

 

 

 

 

 

1827년 슈베르트가곡집 겨울나그네 작품번호 89번가운데 제 5곡으로

빌헬름 뮐러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보리수는

저의 이모님께서 지금도 남들 앞에서 반주에 맞추어 즐겨 부르시는 노래 입니다

 

 

 

 

“(1절) 성문 앞 우물곁에 보리수가 서 있네.

나는 그 그늘 아래서 많은 꿈을 꾸었지.

그토록 많은 사랑의 말을 가지에 새겼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그 나무 밑을 찾았네.


(2절) 오늘도 나는 어두운 밤에 그곳을 지나가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나는 눈을 감지.

나뭇가지가 흔들리면서

 ‘이리 오게 친구여, 여기서 안식을 찾게나’라고 속삭이네.


(3절) 차가운 바람이 얼굴 위로 매섭게 불고

모자가 어딘가로 날라 갔네.

그래도 나는 뒤돌아보지 않는다네.


(4절) 그곳을 떠나고 많은 시간이 흘렀지.

그래도 나는 여전히 ‘여기서 안식을 찾으라’는

속삭임을 듣고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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