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세종대왕 본문
世宗(1397~1450)은 太宗(이방원)의 3째아들(충령대군)으로서
재위기간(1418~1450) 동안 유교정치의 기틀을 확립하고, 공법(貢法)을 시행하는 등
각종 제도를 정비해 조선왕조의 기반을 굳건히 하였으며
한글의 창제를 비롯하여 조선시대 문화의 융성에 이바지하고 과학기술을 크게 발전시키는 한편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조선의 영토도 넓혔읍니다
공법(貢法)의 개선과 시행
조선시대에는 토지에 세금을 부여하는것이 국가의 가장 큰 재원 이었다
건국초기에는 손실답험법(損失踏驗法)이라 하여, 풍흉을 직접 조사하여 세금을 매기는 방식을 취했으나
토지를 조사하는 위관(委官)들의 성향에 따라 세금이 좌우 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
이에 세종은 공법(貢法) 이라는 새로운 세법을 마련 하였다
貢法이란 국가가 수취하는 토지세의 한 제도로서, 수년간의 수확고를 통산하여
평년의 수익을 정해진 비율로 삼아 세금을 매기는 제도였다
1427년(세종9년) 세종은 貢法시행에 앞서 재능있는 선비들의 좋은 의견을 듣기 시작한다
[출처] 세종시대 공법 제정과 국민투표|작성자 솔로
세종은 정책을 세움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 여긴것이 여론 이었읍니다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으면 이를 시행할수없다며
공법의 편의여부외 납사의 폐해를 구제하는 일들을 백관으로 하여금 숙의하고
공법을 보완 하는데 6년이 걸렸고
첫구상부터 보완하고 마침내 시행하는 데 까지 17년이 걸렸읍니다
이처럼15세기초에 국책에 관련된 각계층의 의견을 물었다는것은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었던일로서 유교정치 사상속에서도 세종과 같은 리더쉽이 나올수있었다는것은 우리역사의 큰 자랑이 아닐수 없으며
실제로 공법 시행으로 백성들의 조세부담은 현저히 현저히 가벼워졌고 국고도 쌓이게(최고 500만석) 됩니다
중종때 200만석 선조때 50만석과 비교하면 실로 엄청난 업적으로서
향후 100여년의 조선은 한반도에서 유례가 없었던 태평성대를 누리게 됩니다
과학영농으로 농업의 생산성을 높이고 합리적인 조세제도로 개혁을 단행한 임금
이로서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 >라는 그의 철학은 완성시킨 세종은
박연(朴堧)이라는 뛰어난 음악가를 중용하여
여러 악기를 조율할 수 있는 율관(律管)을 제작하고 음의 장단을 표시할 수 있는 정간악보(井間樂譜)를 만드는가 하면
조회아악(朝會雅樂)·제례아악(祭禮雅樂) 등 아악을 정비하고
훈민정음을 만들어 백성들이 종래 말과 글이 일치하지 않는 기형적인 문자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훈민정음(訓民正音)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유산 가운데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그 우수성에 대하여 세계가 놀란 우리의 글자 훈민정음
사람의 발성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든 훈민정음의 원리,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음양 오행 사상등은
과학적인 원리와 조상들의 슬기가 돋보이며 IT 시대인 지금에 이르러서는 더욱더 큰 힘을 발휘하고 있읍니다
북으로는 여진족을 내쫓고 남으로는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를 제압하여 자주국방의 틀을 마련하고 이루었던
세종대왕의 동상이 서있는 바로옆에 미국대사관 건물이 있고
지금 대한민국의 젊은 의경들은 엄동설한의 추위속에서 미국대사관의 정문과 울타리를 에워싸고 지켜주고 있읍니다
세종은 정치적·경제적인 안정과 국력의 축적을 바탕으로 대명외교에서는 처녀진헌(處女進獻)과 금은조공(金銀朝貢)을 폐지하는 등
불합리하고 무리한 명의 요구를 거절 합니다. 한편 고려말 이래 골칫거리였던 여진과 왜에 대해서는 정벌을 단행 하는데.
여진에 대해서는 김종서·최윤덕(崔潤德)으로 하여금 두만강·압록강 유역의 여진을 몰아내게 하고
이곳에 6진(六鎭)4군(四郡)을 설치하고, 이곳에 남쪽의 백성들을 이주시킵니다
진헌(進獻 : 조선시대 중국의 여러 왕조에 공물을 바치는 일 또는 바치는 공물을 일컫는 말)
중국에 사신이 갈때 진헌도 병행 되었으며
원나라에서는처녀·화자(火者:내시), 명나라에서의 말·매·표범·금은의 진헌을 요구 하였읍니다
고려시대에는 처녀추고도감(處女推考都監)·화자추고도감 같은 특별관서가 있기까지 했으며
조선시대에도 왕이 직접 선발된 처녀들을 심사한 적도 있었다.
명나라의 궁녀확보를 위하여 조선에 처녀진헌을 요구 하였고
조선에서는 처녀진헌의 공녀(貢女)를 뽑는 기간동안에는 혼인금지령이 내려지기도하여
처녀진헌의 부담 때문에 조혼(早婚)의 유행등 민간이 동요되는등 사회적 정치적 문제가 심각 하였읍니다
조혼(早婚)
고려귀족의 결혼은 남자 20세, 여성 16세 전후에 혼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후기에는 대략 2살 정도가 내려갔다고 합니다. (庶人의 경우는 평균 남자 20세, 여자 18세 )
그런데 원나라에서 상층 신분의 貢女를 요구하여, 貢女에 뽑히지 않게하기 위하여 딸들을 일찍 혼인을 시켰고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때의 조혼이 관행이그대로 내려와서
남자든 여자든 10살이 넘어가면 결혼(12~15세)하는 경우가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혼(早婚)의 평균연령은 1925년에 16.7세, 1930년 17세, 1940년 17.5세 정도였다고 합니다.
6진(六鎭)4군(四郡) 지역으로 남쪽지방 백성들의 이주
고려 말에 이성계는 이미 두만강 지역의 여진족을 진무(鎭撫)하고 있었기에 조선초기에 두만강 하류 지역은 우리 강역에 포함되었고
세종은 김종서(金宗瑞) 등으로 하여금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정벌케 하여 이곳에 6진(鎭)을 설치 합니다
압록강 지역에는 최윤덕(崔潤德), 이천(李) 등을 시켜 여진족을 토벌후에 4군(郡)을 설치 합니다
지금의 대한민국과 중국과의 경계는 이때 만들어진것 입니다
세종은 북방 영토의 회복과 고수의 목적으로 이지역의 유이민들을 정착 시켰고
세조 이후 하삼도(한강 이남지역)의 토지 부족을 완화하고 북방을 개척하여
농업 생산, 인구 증가를 도모하고자 하삼도 민간인들의 이주를 지원 또는 강제방식으로 수행 하였읍니다
조선의 과학기술의 역사와 수준을 보여주는 혼천의는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천문 관측 기구 입니다
세종은 정초(鄭招)와 정인지(鄭麟趾) 등에게 고전을 연구하고, 이천(李)과 장영실(蔣英實)이 공역(工役)을 감독케 하여
1438년(세종 20)에 혼상·혼의 등을 비롯한 여러 천문의기를 만들게 되는데 이때 혼천의는 원(元)나라의 학자 오징(吳澄)이 쓴
찬언(纂言)에 기재된 바에 따라 칠목(漆木)으로 만들고, 다시 구리를 부어 만들었다고 합니다.
과학영농으로 농업의 생산성을 높이고 합리적인 조세제도로 개혁을 단행한 임금
이로서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 >라는 그의 철학은 완성시킨 세종
해시계·물시계·측우기의 발명
해시계는 정초·장영실(蔣英實) 등이 발명한 앙부일구(仰釜日晷)·현주일구(懸珠日晷)·천평일구(天平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 등이 있고
흐린 날이나 밤에도 쓸 수 있다는 점에서 공적인 표준시계로 쓰였던 경루(更漏)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물시계를
세종대에 장영실이 자동적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 등 더욱 발전한 물시계를 만듭니다.
1441년 측우기의 발명은 빗물이 땅속에 스며드는 깊이로 강우량을 측정하던 종래의 불완전한 방법을 개선해
과학적이고 수량적인 강우량 측정을 할수있게 되었읍니다
孝子 세종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는 4남 4녀의 자식을 생산 합니다 (태종이 왕이 되기전에 사망한 사내자식 3명은 제외)
세종은 이들 부부의 세번째 아들(충령)이고 장자가 한때는 나라의 세자였던 양녕대군이고 효령이 둘째 입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후 학질(장티푸스)을 앓게되는 원경왕후를 직접 간병을 하는 와중에
신하들의 반대를 피해 몰래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한밤중에 절(寺)로 어머니를 피병 시키기도 했습니다
피병(避病 : 당시엔 병에 걸리면 여기저기를 돌아다녀야 병에서 낳을 수 있다고 믿어,이리저리 거처를 옮겼던것을 말함.
세종의 어머니피병은 나흘이 되도록 아무도 몰랐을 정도로 은밀하게 진행되었고
이처럼 왕이 직접 피병시킨 경우는 없었다고 합니다)
원경왕후가 돌아가시자 세종은 태종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머니의 무덤가에 절을 세우게 하는데
한번도 아버지 태종의 뜻을 거역해본적이 없었거니와 조선초기 국시(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를 거슬리며까지
어머니 원경왕후를 받들었다고 합니다
6명의 부인 에게서 22명의 자식을 둔 세종
소헌(昭憲)왕후
세종의 나이 16, 소헌와후의 나이18세가 되던 해에 첫아이 정소공주가 태어나고
세종이 왕이 되기전에 이들부부는 이미 다섯아이(정소공주,문종,정의공주,세조,안평대군)의 부모가 됩니다
(정소와 문종만 두살차이일뿐 , 나머지는 모두 연년생인걸 보면 세종과 소헌왕후의 금술이 무척 좋았나 봅니다)
안평이 태어나고 얼마 있지 않아 소헌왕후의 아버지인 심온이 역도로 몰려 사사(자결)되는 사건이 발생한후
소헌왕후는 국모에서 역도의 딸로 몰리게되고 폐비주청 여론에 시달리던 와중에
시아버지인 태종은 세종에게 후궁을 맞이하게 됩니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태종은 장자가 아닌 셋째아들로서 왕이된 세종의 입지를 탄탄히 해주기 위하여
세종을 왕으로 만드는데 배후에서 큰 역활을 했던 사람들을 경계하게 되며
그들 경계대상인물들 중에는 세종의 장인이자 소헌왕후의 친정아버지인 영의정 심온이 있엇읍니다)
하지만 부부간에 워낙 금술이 좋았던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는 총 8남2녀, 10명의 자식들이 태어납니다
(문종,세조,안평,임영,광평,금성,평원,영응,정소공주,정의공주)
소헌왕후는 왕비로서 뿐만 아니라 조선왕실 여자중에서도 가장 자식을 많이 낳은 여인으로 기록 됩니다
(또하나의 별난 기록 : 첫째 정소공주와 막내 영응대군과의 나이차이는 무려 22살 )
소헌왕후가 말년에 중병에 시달릴때 세종은 노심초사 갖은 방법을 찾으려 애썼고 함께 온천엘 다녀오기도 합니다.
소헌왕후가 죽고나서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궁 안에 내불당을 건립하고 불교서적을 편찬하기도 하며
직접 월인천강지곡을 지어 그녀의 명복을 빌기도 했습니다
임금으로서 국시였던 숭유억불정책을 거스를 만큼 세종의 소헌왕후에 대한 사랑은 각별 하였고
세종은 소헌왕후 승하후 직접 합장릉으로 만들 것을 명했고 세종은 사후 경기도 여주의 영릉에 소헌왕후와 합장을 하는데
영릉은 조선 최초의 합장 으로 기록 됩니다. 정말 각별 합니다
신데렐라 신빈김씨
원경왕후가 여종으로 뽑아서 소헌왕후에게 보낸 13살의 어린 궁녀였던 신빈김씨는
천성이 부드럽고 아름다우워 세종과의 사이에서 6명의 아들을 생산 합니다
소헌왕후도 그녀를 무척 좋아하여 소헌왕후는 갓 태어난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양육을신빈 김씨에게 맡기기도 합니다
신빈김씨는 세종의 승하후, 비구니가 되어 절에 들어가고 그녀의 아들들은 계유정난 당시 세조의 편을 들게 됩니다
혜빈양씨
혜빈양씨는 소헌왕후의 승하후 내명부를 다스리며 단종대에는 정치활동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단종(문종의 아들이자 세종의 손자)의 어머니는 단종을 낳자마자 세상을 뜨게되고
그무렵 세종의 아이를 출산한 혜빈양씨가 단종의 양육을 맡게 됩니다
혜빈양씨는 단종의 할머니이자 유모요 양모인 셈 입니다
단종은 혜빈양씨를 지극정성으로 따랐고,단종이 임금이 되자 혜빈양씨의 입지도 꽤 높아지게 됩니다
세조에 의해 저질러진 계유정난(癸酉靖難)후 단종은 작은 아버지인 세조에 의해 영월 청룡포로 쫓겨가고
혜빈양씨 또한 아들격인 세조에 의해 그녀의 아들들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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