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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常

임삐용의 천국

매루 2012. 7. 25. 12:08

 

 

70년대에 빠삐용 이라는 영화는 화제작  또는 명화라며 한동안 세간에 화제가 되었었읍니다

그러한 세간의 호평과 달리 저는 그다지 그영화에 감동을 느끼지 못했었고

그보다 오래전에 졸업 이라는 영화에서 더스틴 호프만의  연기가  인상적 이었기에

빠삐용 영화속에서 배신한 아내에 대한 복수심으로 탈출을 꾀하는 또다른 주인공인

그(더스틴 호프만)를 보기위해 빠삐용 영화를 보았을 뿐 이었읍니다 

 

지금도 버스나 지하철에 오를때에는 신문이나 책 등의 읽을거리를 꼭 지참 해야만 하듯이

책 읽기를  좋아했기에 서점에 자주 들락거리던 90년대 초반에 저는 책방의 진열대에서 <임삐용의 천국>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 합니다

젊은 방송작가인 저자가 실존인물의 구술을 정리한  이야기인데 큰 기대는 안하고 구매를 하였었지만

그날 귀가후 저녁식사를 마친후 부터 읽기 시작한 그책을,  저는 그다음날 정오께까지  제손에서 놓질 못하였읍니다

 

며칠후 독서광인 제친구 혁제에게 그책을 전해주었고 혁제는 그다음날 제게 그책을 아주 잘 보았노라며 전화를 했읍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세월이 흐르면서 저와 혁제는 누구에게 가있는지 모를<임삐용의 천국>책 과 내용을 이따금씩  이야기를 하곤 했었읍니다

 

몇일전 대부도 앞바다의 노을에 대한 인터넷검색중에 지금은 대부도와 연결되어있는 선감도와

선감도에 있었던 부랑아보호시설(지금은 경기창작센터)의 이야기를 보게 되었읍니다

<임삐용의 천국>의 배경이 되었던 부랑아보호시설과 그곳에서 생활을 하며 수차례 탈출을 반복하던 주인공의 모습이 떠오르고

그책을 다시한번 읽고 싶어졌기에 인터넷판매망에 <임삐용의 천국>을 검색했더니 다행히 헌책 한권이 남아 있었읍니다

 

어제 인터넷으로 주문한 그책이 제게 도착을 했읍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때 제 아버지 께서는 인천 용현동의 낙섬에있던 부랑아보호시설의 관리인으로 부임을 하신후

3년여동안 그곳의 관사에서 저희가족들도 함께 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임삐용의 천국>에 나오는 줄거리와 주인공의 심리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기억을 하고 있읍니다

 

" 이 땅에 두번 다시 이런 운명이 잉태되지 말기를.... " 이라는 이책머리의 작가서문 처럼

조국근대화와 경제개발의  그늘에서  비참하게 짓밟며 희생당한  죄없는 약자들,,,,,

 

세월이 한참많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은  OECD, G20, 747 장밋빛 공약, 4대강,등의 구호만 만발한 가운데

민생,국가경제,대북문제 어느것하나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다시 도탄에 빠져들고 있읍니다

형제나 친한친구들에게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읍니다

"남 못되게 했으면 자기라도 잘되야 될거 아니냐?" 라고요

 

이번 여름휴가기간동안에는 <임삐용의천국>을 읽으며 저와 제가족듣과 이웃들이 살고있는 내나라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볼까 합니다

 

 


선감학원에 수용 중이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머리를 깎은 채 앉아 있다. 1968년 한국일보


 

 

 

 

 

 

 

 

 

 

 

 

 아! 선감도… 슬픈 소년들 넋이 떠돈다

日帝가 세운 부랑청소년 감화시설 있던 곳
"아이들 억울하게 숨졌다" 소설로 알린 일본인
10년전 위령비 계획 끝내 무산… 다시 추진

 

1998년 경기 안산시에서는 선감도에 위령비를 세우려는 계획이 추진됐다.

 선감도는 일제시대 조선총독부가 세운 부랑청소년 감화시설 선감학원이 있던 곳.

 서울과 인천 수원에서 선감학원으로 끌려온 소년들은 영양실조로 죽거나 도망치다 붙잡혀 혹독한 매질과 고문을 당했다.

일부는 바다를 건너 화성 마산포로 탈출을 시도하다 조류에 휩쓸려 생을 마감했다.

숨진 소년들은 선감학원 근처 야산에 매장됐다. 이런 소년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위령비였다.

당시 안산시는 소년들의 유골을 발굴해 큰 봉분을 만들고,

2000년 8월 15일 위령비를 건립하기 위해 1억원 이상의 예산을 확보했다.

서울의 한 대학교와 비석 설계까지 마쳤지만 이 계획은 이듬해 5월 명확한 이유 없이 흐지부지됐다.

이후 1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23일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면적 3.7㎢에 해안선 길이가 8㎞인 조그만 섬 선감도는

88년 5월 대선·불도·탄도방조제, 94년 1월 시화호 주방조제가 잇따라 완공되며 육지가 됐다.

과거 선감학원이 있던 자리에는 지난해 10월말 개관한 국내 최대 규모 아트레지던시인 경기창작센터가 자리잡고 있었다.
창작센터의 전신은 경기도립직업전문학교이고, 같은 자리에 80년대 초까지 부랑아들을 수용하는 시설이 있었다.

부랑아 수용시설은 일제시대 선감학원과 맥이 닿는다.
창작센터 앞에서 경기도청소년수련원 방향으로 야트막한 야산이 있다.

이 곳 사람들이 공동묘지라고 부르는, 위령비를 세우기로 했던 바로 그 자리다.

1995년 10대 소년 2명의 유골이 발굴됐고, 몇 년 전 한 케이블채널의 미스터리 프로그램은 원혼이 서렸다고 방송했다.

아직도 많은 유골이 묻혀있지만 야산은 유골이 나온 15년 전과 마찬가지로 방치된 상태다.

어지럽게 자란 수풀 사이에는 근처 업소가 내건 현수막 한 조각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인근 마을에는 선감학원을 기억하는 홍석민(75)씨가 살고 있다.  

 그는 선감학원 통역교사로 채용된 아버지를 따라 선감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홍씨는 위령비 건립 무산에 대해 "이 일대 개발 시 장애가 됐다고 하는 설도 있고,

관련 기관들이 서로 미루다 유야무야 됐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선감도의 슬픈 역사는 일본인이 쓴 <아!선감도>란 자전적 소설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89년 일본에서 출간된 이 소설은 95년 한국어판이 나왔고, 우리나라 한 일간지에도 연재됐다.

<아!선감도>의 작가 이하라 히로미츠(75·井原宏光)씨는

8살 되던 해 선감학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선감도로 와 2년간 살았다.

홍씨와는 초등학교 동창 사이다. 45년 일제 패망 뒤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선감학원의 선명한 기억은 지우지 못했다.
이하라씨는 한국의 지인들에게 "나는 즐거웠던 선감도가 한국 아이들에게는 슬픈 곳이었다.

선감도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남기기로 결심했다"고 소설을 쓴 이유를 전했다.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러져간 소년들을 위해 위령비를 세우자고 처음 제안한 것도 이하라씨였다.

자신은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모금을 주선하겠다는 의견도 냈다.

안산시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1923년 조선감화령을 발표하며 그 해 원산에 최초의 감화원 영흥학교를 세웠고, 3
8년에는 전남 무안군 고하도에 목포학원을 만들었다.

감화원은 8~18세 미만 부랑소년들이나 불량행위 우려가 있는 고아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이다.
선감학원은 일제가 42년 5월 19일 설립한 마지막 직영 감화원(感化院)이다.

처음 목표는 산업전사를 키우기 위한 것이었지만 일제 말기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며 설립 취지가 흐려졌다.
독립의지를 말살시키고 전쟁의 소모품으로 사용하기 위한 시설로 성격이 변모했다.

500여명이 생활했던 선감학원도 수용시설은 열악했고, 외부와의 접촉은 불가능했다.

이들은 소년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옷을 모두 벗긴 뒤 재웠다고 전해진다.

학원 운영은 철저하게 강제 노역을 통한 자급자족이었다.

정진각 안산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은 "섬에 가뒀다는 그 자체로 소년들을 중범자 취급한 것이고,

소년들이 어떻게 선감도까지 잡혀왔는지도 전혀 밝혀진 바가 없다"고 말했다.

위령비 건립은 잊혀졌지만 이하라씨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 동안 수 차례 선감도를 찾았고, 3월초 다시 입국해 선감도를 방문한다.

선감학원에 관심 있는 시민사회단체 회원 및 주민들과 간담회도 예정돼 있다.

홍씨는 "위령비가 무산돼 속상한 사람들이 꽤 많다"며 위령비 건립 문제가 다시 한번 불거질 것을 암시했다

 

2010, 2, 25 한국일보 사회면 

 

 

 

 

C,C,R의  Who`ll stop the rain 노래의 2절가사

 

Caught up in the fable,I watched the tower grow.
우화에 사로잡혀서는,탑이 자라나는 걸 보았어요

Five year plans and new deals,Wrapped in golden chains.
5개년 계획과 뉴딜 정책은 금줄 사슬로 포장되어 있네요

And I wonder,Still I wonder Who'll stop the rain.
궁금해요,누가 이 비를 멈출 수 있을까요

 

 

 

 경기창작센터

 

 

2009년 6월 어느날 오후 불도 방조제에서(시화방조제ㅡ대부도ㅡ선감도ㅡ불도ㅡ탄도ㅡ전곡) 

경기창작센터는 제가 서있는 왼쪽 선감도에 있읍니다

 

 

 2011, 8, 3 탄도항에서(사진 멀리 보이는곳이 제부도)



용현동에  낙섬에 있었던 부랑아시설의 부랑아들(1967년)

사진 왼쪽의 흰점퍼차림에 안경을 끼신이가 당시 이시설의 관리인(요즈음의 행정실장)이셨던 제 아버지 입니다

저는 이따금씩 제 아버지에게  대부도(선감도가 대부도옆의 섬 인줄은 모르고)와 부랑아 이야기를 들었었읍니다

 






맞아 죽고 굶어 죽고 빠져 죽고, 지옥의 수용소

[선감도의 비극①] 소년 감화원으로 존재한 강제 수용소 '선감학원'

17.03.05 18:40l최종 업데이트 17.03.05 18:40l


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기사를 통해서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힐 계획이다. [편집자말]
 경기창작센터에 전시된 사진, 일제 강점기때 소년들이 배를 타고 선감학원으로 드러오는 모습.
 경기창작센터에 전시된 사진, 일제 강점기때 소년들이 배를 타고 선감학원으로 들어오는 모습.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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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仙甘學院)만큼 우리의 아픈 근현대사를 오롯이 간직한 곳이 또 있을까?

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으로 존재한 강제 수용소다. 일제가 불량행위를 하거나 할 우려가 있는 8세에서 18세 소년을 '감화(感化)' 시킨다는 목적으로 세웠다고 하니, 이 사실만으로도 강제 수용소였다는 증거는 충분하다. 8살짜리 꼬마가 자기 의지로 감화원에 갈 리는 없기 때문이다.

선감학원은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2년에 세워져 해방이 된 뒤에도 존재했고, 군사독재 시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1982년에야 사라졌다. 우리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위치만 봐도 섬뜩하다. 선감학원은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 선감도(안산시 단원구 선감동)에 있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장소다. 선감도는, 지금은 다리로 대부도, 탄도와 연결돼 육지처럼 보이지만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배를 타지 않고는 발을 디딜 수 없는 외로운 섬이었다.

일제는 선감학원을 무척 폐쇄적으로 운영했다. 해방되기 전까지 3년 4개월간 선감도에는 선감학원 운영을 보조할 15가구 70명 정도의 주민만 거주했다. 일제가 땅을 매입한 뒤, 그 외 주민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에 이 학원에서 벌어진 일은 그곳에 있던 사람밖에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일제 강점기에 선감도에서 일어난 일은 일본인 이하라 히로미쓰가 지난 1989년 속죄하는 마음으로 낸 <아! 선감도>(1989년)라는 소설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선감학원 부원감인 아버지를 따라와 선감도에서 3년여를 보냈다. 성인이 되어 자신이 목격한 선감학원 소년들의 참상을 고발하는 소설을 썼다.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인 원생들이 도망치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2년 동안 10명이나 된다. 배가 고파 아무 풀이나 먹은 탓에 위염, 위궤양으로 고생하는 아이가 많았다. 폐결핵 환자도 10명이나 됐다. 도망치다 잡혀 온 아이는 손을 뒤로 묶은 뒤 죽도(竹刀)로 미친 듯이 두들겨 팼다. 등과 허벅지 엉덩이에서 쏟아진 피가 순식간에 마당에 있는 돌을 적셨다. 마침내(매를 참지 못해) 스스로 혀를 깨물고 죽은 아이도 있었다." - 책 <아! 선감도> 속에서-

"일제, 소년들 전쟁터로 몰려고 하다가..."

 정진각 역사학자, 안산 지역사회 연구소 소장
 정진각 역사학자, 안산 지역사회 연구소 소장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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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령탑 뒤로 보이는 산(배꼽산)에 선감학원에서 생을 마감한 소년들 유해가 묻혀 있다. 약 300미터 정도 거리.
 위령탑 뒤로 보이는 산(배꼽산)에 선감학원에서 생을 마감한 소년들 유해가 묻혀 있다. 약 300미터 정도 거리.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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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이하라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1980년대에 여러 차례 선감도를 다녀갔다. 책이 나오고 난 뒤인 지난 1996년경에는 경기도 안산시를 방문해 굶어 죽고 맞아 죽고 탈출하다 바다에 빠져 죽은 소년들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한 위령탑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한국인은 정진각이라는 역사학자다. 그는 당시 한양대에서 역사 강의를 하고 있었다. 지금은 안산지역사회연구소 소장이다. 그는 이하라를 만나고 난 뒤, 그의 열정에 자극을 받아 20여 년간 선감학원에 관한 조사와 연구에 매달렸다.

"이하라 입장에서는 자기 나라를 욕하는 일이잖아요? 그런데도, 우익한테 위협을 당하면서까지 과감하게 진실을 말하는데, 우리나라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정 소장이(65세) 선감학원 진실규명에 뛰어든 이유다. 그를 지난 2월 22일 안산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났다.

정 소장은 "거지꼴로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보호 대상이 아닌 청소 대상으로 본 것"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부랑아 등을 사회와 격리시키기 위해 일제가 선감학원을 설립했고, 경기도 또한 이런 이유로 선감학원을 계속 운영했다는 것이다. 정씨는, 일제가 아이들을 태평양 전쟁에 내몰기 위해 선감학원을 세웠으리란 의혹도 제기했다.

"선감학원 시설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어요. 외부와의 접촉도 불가능한 지역이라 엄청난 인권유린 사태도 일어났고요. 소년들은 중노동에 시달렸어요. 20만 평에 달하는 농지를 소년들이 감당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조선총독부 기록을 보면 감화원의 목적을 '사회 반역아 등을 보호·육성하여 대동아전쟁의 전사로 일사순국(一死殉國)할 인원을 늘리자'라고 분명하게 천명했어요. 전쟁터로 몰 계획이었는데, 전쟁이 빨리 끝나서 그러지 못한 거죠."

정 소장은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다. 일본인 교사로 보이는 군복 입은 사람이 야외 수업을 하는 사진이었다. 칠판에 '지원병'이란 제목의 글이 쓰여 있다.

"천황폐하의 감사한 호의로 우리도 군인이 될 수 있게 되었다. 명예로운 일본의 군인이 된다는 일은 더없는 행복이다. 나는 몸을 단련하고 마음을 닦아서 훌륭한 청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지원병이 되어 천황폐하의 고마운 은혜에 보답할 것이다." - 칠판 글 -

얼마나 죽었는지, 누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어

 경기창작센터(옛 선감학원)에 전시된 사진, 칠판에 지원병이 되어 전선에 나가자란 글이 쓰여 있다. 삽을 총처럼 들고 있다.
 경기창작센터(옛 선감학원)에 전시된 사진, 칠판에 지원병이 되어 전선에 나가자란 글이 쓰여 있다. 삽을 총처럼 들고 있다.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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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창작센터에 전시된 지도
 경기창작센터에 전시된 지도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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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경기도가 이 시설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경기도 또한 일제와 별반 다르지 않게 이 시설을 폭력적으로 운영했다. 소년들은 선감학원에서 생지옥을 경험했다. 강제노동과 폭력, 굶주림에 시달렸고 죄수들처럼 머리를 박박 밀렸다.

도망치다 잡히면 원장 사택 마루 밑 땅굴에 갇혀 주먹밥으로 연명하며 끊임없이 반성문을 써야 했다. 도망치다 바다에 빠져 죽은 아이나 병이 들어 죽은 아이는 가마니에 둘둘 말아 선감학원 인근 야산에 매장했다. 안타까운 것은 얼마나 죽었는지 죽은 아이가 누구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간혹 빠져 죽지 않고 바다를 헤엄쳐 건넌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인근(선감도 인근 섬이나 육지)에 사는 주민들도 한통속이었던 것 같아요. 도망친 아이를 발견하면 차비를 빌려 주거나 해서 집으로 돌려보낸 게 아니라, 붙잡아서 자기 집 머슴으로 부려먹기도 했다. '돌아가서 맞아 죽을래, 우리 집에서 일할래?' 이런 식이었죠. 그 분들(주민들)은 그게 당연하다 생각한 거 같아요. 만나 보면 '그 때는 다 어려워서 그랬어요'라고."

정말 충격적인 것은 이 지옥의 수용소에 경찰이나 시청 공무원에게 납치되다시피 끌려온 아이도 있다는 사실이다.

"경찰이나 시청 등에서 일하는 공무원이 실적을 채우기 위해 그랬다고 생각됩니다. 부모도 있고 학교도 다니고 있었는데 거리에 나왔다가 부랑아 취급을 받아서 끌려 온 분이 있어요. 할머니 손을 잡고 시장에 왔다가 손을 놓쳐 미아보호소에 있다가 끌려온 분도 있고요. 지금도 생존해 계신데, 그 분들은 자신들이 공무원한테 납치됐다 생각하고 있어요."

지옥 같은 선감학원의 기억은 소년들 삶을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정 소장을 통해 알게 된 피해자들의 삶은 처절했다. 끔찍했던 어린 시절 기억이 생생해, 노인이 된 지금도 '다시 잡혀가는' 악몽에 시달리는 피해자가 많다.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해 날품팔이로 근근이 생활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정 소장은, 이런 이유 때문에 진실 규명이 더욱 절실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가에서 저지른 폭력이니 지금이라도 책임 있는 지도자가 피해자들에게 정중히 사과해야 하고, 재발 방지까지 약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직도 악몽에 시달리는 피해자들에게 트라우마 치료 등을 비롯한 실질적인 지원도 필요하고,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교훈으로 삼기 위한 '박물관 건립' 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부나 경기도는 선감학원의 비극이 국가에 의한 폭력이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한 일이 없다.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 또한 거의 없었다. 정 소장을 비롯한 뜻 있는 사람들이 선감학원의 비극을 역사적 교훈으로 남기기 위한 노력을 하고는 있지만, 선감학원의 비극 대부분은 아직도 피해자들 기억 속에만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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