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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半島

『인천의 혼,조봉암에게 길을 묻다』

매루 2024. 1. 22. 13:02

 

『인천의 혼,조봉암에게 길을 묻다』

 

 ▣범야권 통합 추진▣3대대선 후보단일화▣신익희 사망-이승만과 맞대결

▣투표에선 이기고,개표에선 지고▣진보당사건▣죽산-반세기만의 무죄 판결

 

 

죽산, 대한민국 정치 중심에 서다 -

① 2대 대통령선거 출마 - 관권개입·흑색선전 속 초대 부통령 제치고 2위

 

5월26일40여명의 국회의원의 통근버스가 검문에 응하지않았다는 이유로 헌병대로 연행되고있다

대통령직선제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헌법개정을 둘러싸고 국회와 정부간 대립이 계속되던 중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5월25일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사진제공=국회 사무처

1950년 5월30일 실시된 5·30선거 결과는

남북협상파, 단정반대 및 중도세력을 포함해 무소속들이 대거진출, 총 210석 중 126석(62.9%)을 차지하면서

친여당적 세력인 대한국민당과 야당계인 민주국민당이 각각 24석(11.4%)에 불과했다.

재선의원은 29명에 불과해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국가의 주요 정치세력의 교체가 불가피했다.

그러나 6·25전쟁의 발발로 국회 내 중도세력들의 세력화가 원천 봉쇄되고

전국민의 사고가 냉정의식에 의해 지배받으면서 혁신과 진보를 공산주의와 동일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 야당이 제안한 내각책임제 개헌안과 정부가 제출한 대통령직선제·양원제 개헌안의 주요내용을 발췌한

일명 발췌개헌안이 1952년 7월4일 경남도청 무던전에서 열린 피난 국회 본회의장에서 야간에 기립표결로 통과되고 있다. /사진제공=국회 사무처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국회세력(입법부)과 이승만세력(행정부)의 경쟁은

행정부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게 된다.

국회일각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실정에 반대해 내각책임제 개헌을 실현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었다.

반면 이 대통령은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면 차기 대통령에는 당선될 수 없다고 판단,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은 1952년 1월18일 찬성 19명, 반대 143명으로 압도적으로 부결됐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 부결 이후 야당은 연합전선을 형성해 내각제 개헌안을 제안했다.

이때 죽산도 야당연합의 대열에 서서 내각제 개헌안안에 서명,

1952년 4월17일 민국당을 주동으로 한 반이승만계열로부터

재적 3분의 2를 1명 초과하는 124명의 연서를 받은 내각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내각제 개헌세력의 목표는 정권교체였다.

원내 자유당의 오위영·엄상섭 등과 무소속의 곽상훈 등은

그 때 막 국무총리를 사임한 장면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기 위해 결속했고

민국당은 숙원이던 내각책임제 개헌을 실현키 위해 서로가 결속한 반이승만 합동작전이었다.

 

 

▲ 1952년 7월10일 새로 선출된 제2대 후반기 국회의장단.

왼쪽부터 윤치영 부의장, 신익희 의장, 조봉암 부의장. /사진제공=죽산조봉암전집

국회에 제출된 내각책임제 안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이승만정권은 4월25일 시·읍·면의원 선거와 5월10일 도의원 선거 등 지방자치 선거를 치르는 한편

파괴공작으로 의회를 무력화에 나섰다.

또 정부는 장택상이 이끄는 신라회가 주축이 돼

5월14일 정부측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과 야당측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절충한

발췌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한 뒤

5월25일 공비잔당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경남과 전북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다음날 헌병대 기증기로 국회의원 40여명을 태운 버스를 강제로 끌고 간 뒤

국회의원 11명을 국제공산당 관련 혐의로 체포하게 되는 부산정치파동을 발생시켰다.

소동끝에 발췌개헌안은 7월4일 밤 기립투표로 출석의원 166명 중 찬성 163명, 기권 3명으로 가결됐다.

이 발췌개헌안의 통과는

최초의 헌법개정이 집권자의 정권 장악을 위한 수단으로 명문없이 개정되는 선례를 남기게 된다.

특히 역사상 최초로 국민주권에 의해 통치자를 선택하는 대통령직선제

이런 과정을 거치며 진정한 선거로 보지 않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당시 국회부의장이었던 죽산 조봉암은 발췌개헌안에 대해

정국의 안정을 기하도록 의원들에게 찬성하도록 설득했

죽산은 비록 내각제 개헌안에 서명을 했지만 전시에 정국의 혼란보다 안정을 우선 고려하고

미국을 주축으로 한 국제정치적 구도를 인식해 발췌개헌안의 통과에 묵시적인 동의를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이승만의 장기집권의 길을 열어주는데 일조했다는 결과를 남겼다.

 

 

▲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 투표 상황/자료=중앙선거관리위원회'대한민국 선거사'

이 같은 결과로 죽산은 이승만정권과의 협조관계를 청산하고

독자적으로 이승만을 반대하는 대항세력으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발췌개헌안의 통과로 개정된 헌법에 따라 정부는 1952년 8월5일을 대통령선거일로 결정, 공포했다.

개헌안 통과 뒤 10일만인 7월15일 정·부통령선거법 통과, 18일 공포,

8월5일 선거라는 공고일로부터 18일밖에 남지 않은 빠듯한 일정이었다.

당시 대통령을 이승만 이외의 다른 인물로 대체할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실제 빠듯한 선거일정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감히 이승만에게 도전하겠다고 나설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최초의 대통령 직접선거에

54세의 나이로 무소속의 조봉암이 출마를 선언하고 나섰다.

죽산과 2대 국회의원이자 헌법기초위원회 전문위원이었던 윤길중은

그래도 경쟁자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윤길중은 신익희 국회의장에

죽산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에게 각각 대통령선거 입후보를 권했다.

유력한 야당 후보가 모두 고사하자 죽산은 자기라도 나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게 된다.

"나는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이대통령과 싸울 사람조차 없다면 국민이 너무 불쌍하다.

독립투사로서의 이승만은 존경하나 행정수반으로서는 적격이 아님이 드러났다.

나는 이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실망을 대변하기 위해 선거전에 나섰다."

<조봉암, 내가 걸어온 길>

정치파동에 빚어진 공포분위기가 가라앉지 않았고

무엇보다 전쟁중이었기에 선거전은 별로 가열되지 못했다.

더구나 선거운동 기간이 짧았기에 이승만을 제외하고는 다른 후보들은 잘 알려지지 못했다.

무소속이었던 죽산은 윤길중 의원이 선거사무장을 맡은 것을 빼면 선거전에서 철저히 소외된다.

그런 와중에 민국당으로부터

이시영으로의 단일후보를 위해 입후보를 사퇴하거나 단일전선 형성에 참여해 달라는 제안에

죽산이 응하지 않자 민국당의 공격은 엄청났다.

민국당 부통령 후보 조병옥은

"…공산주의자로서 전향했을 뿐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증명할 만한 아무런 태도표명도 하지 않고 있는 조봉암씨가

집권을 꿈꾸고 대통령에 입후보했다.

…만역 조씨가 입후보를 철회치 않고 또 그를 국민다수가 지지하는 경향이 보인다면,

일시 헌법을 유린한 과오는 있을지라도 이승만박사에게 표가 집중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조봉암씨에게 대통령의 자리를 맡길 것이라면 차라리 김일성과 타협할 것이다"

라고 극단적인 적대적인 표현으로 공격했다.

죽산은 관권선거와 야당의 흑색선전에도 과감하게 혁신의 구호를 내걸었다.

"앞으로 4년간은 이대로 살 수 없다",

"이것 저것 다 보았다, 혁신으로 바로잡자",

"우리는 또 어떻게 이대로 사는가"

라는 슬로건을 내건 죽산은 조직적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전체 유효투표의 11.4%인 79만7천504표를 획득했다.

전체 유효투표의 70%가 넘는 523만8천769표를 쓸어 간 이승만의 득표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지만

민국당 이시영 후보(76만4천715표) 보다는 3만여표가 더 많은 대중적 지지를 얻은

무시할 수 없는 뜻있는 출발이었다.

특히 민국당의 이시영, 무소속 신흥우에 비해 지명도가 낮았던 죽산이

전시중 촉박한 선거일정 속에서도 임시수도가 있던 경남지역과 서울에서

두 후보의 표를 합친 수보다 많은 득표했고 대구 등 몇몇 도시지역에서도 선전을 했다.

특히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는 45%를 얻은 이승만에 이어 35%를 획득하는 성과를 나타냈다.

죽산이 비록 국회부의장을 지내기는 했지만

평생을 독립운동에 매진하고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명성을 누르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 언론의 선거예상이었다.

더구나 선거운동도 못하도록 경찰로부터 탄압을 받았고

투표와 개표의 참관인을 참석시킬 수도 없었던 상황에서 2위를 차지한 것은

죽산이 대한민국 정치의 중심에 서는 괄목한 만한 첫 출발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조봉암의 정치행도에 하나의 가능성이 됐고 이승만과 보수우파에게도 현실적인 위협이 됐다.

투표 결과에 나타난 자신의 힘과 저력을 확인한 조봉암은

차기 집권구상을 가다듬으며 국회부의장으로 복귀, 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한편 부통령선거에서는 이승만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함태영이

조직력이나 대중적 인기도에서 월등했던 이범석을 누르고 당선돼

관권선거의 힘이 얼마나 컸나는 입증하게 됐다.[김칭우기자]

 

 
 

죽산의 동반자 / 2 정치적 동지 김조이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선구자 6·25전쟁 당시 남동생과 납북

▲ 1947년 인천에서 열린 김조이의 막내동생 결혼식.
붉은 원 안이 조봉암(왼쪽)과 김조이(오른쪽)./사진제공=죽산조봉암선생명예회복범국민추진위원회
김조이(金祚伊·1904~?년)는 죽산 조봉암이 혁명전선에서 만난 동지이자 죽산의 첫째부인이었으며 마지막 부인이기도 하다.김조이는 경상남도 창원군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서울로 유학, 동덕여고를 졸업했다.
그는 서울에서 3·1운동을 경험하면서 항일운동에 뜻을 세웠고 죽산을 만나 조선공산당의 열렬한 운동원이자 죽산의 동반자가 됐다. 죽산의 주선으로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2년 유학을 한 뒤 1925년 경성여자청년동맹이라는 여성단체를 조직했다.
이 시기 김조이는 박헌영의 부인인 주세죽, 변호사 허헌의 딸이자 임원근의 부인인 허정숙과 함께 경성지역의 좌파 여성운동을 이끄는 중심 인물이었다. 16~26세의 여성들로 구성된 경성녀자청년동맹은 '여성해방운동'을 지향했던 독립운동단체였고 창립 당시 회원수는 82명에 이르렀다.
1925년 4월 '적기시위사건'에 연루돼 잠시 검거된 김조이는 12월 제1차 조선공산당사건이 터지며 만주, 연해주 등으로 활동무대를 옮기며 죽산과 오랜 시간을 헤어지게 된다.그리고 1932년 김조이는 함경도로 파견돼 함흥을 중심으로 조선노동좌익재결성을 주도하다 1934년 8월 제2태평양 노사사건의 주동인물로 지목돼 검거됐다.
당시 언론은 이 사건을 함남공천사건이라고 불렀다. 김조이는 이 사건으로 2년간 구금됐다가 기소돼 1934년 12월 함흥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다.
앞서 신의주 감옥에 갇혔던 죽산은 출소 후 인천에 정착했다.
당시 죽산은 상하이에서 김이옥과의 사이에서 딸 호정씨를 낳았지만 혼인 신고는 하지 못했다.
해외에서 항일운동을 하고 있었고, 7년간 감옥에 갇혀 있었던 탓으로 보인다.
김조이는 1942년쯤 홀로 된 죽산을 찾아 인천에 내려온 뒤 죽산과 가정을 꾸린다.
1944년 정식으로 혼인신고도 했다. 광복 후엔 죽산이 제헌의회 의원과 초대 농림부장관, 국회 부의장 등을 지낼 수 있도록 내조에 열성을 보였다. 김조이가 해방정국과 단독정부 수립 이후 선거운동, 국회활동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당시 흔치 않았던 고등교육을 받은 인텔리 여성이자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선구자격이었던 김조이의 역할이 컸을 것이라는 추정은 해볼 수 있다.그러나 1950년 6·25전쟁으로 죽산과 김조이의 결혼생활도 끝이 난다.
죽산이 국회 중요문서 등을 운반하느라 가족들을 돌보지 못한 사이 7월 중순쯤 친척집에 숨어 있던 김조이는 첫째 남동생 김송학과 함께 납북 당했다. 두 사람의 생사 여부는 물론 행적 또한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했고 남편 조봉암이 제1공화국에서 간첩 혐의로 사형 당한 이후 오랫동안 일제 강점기의 항일 공적을 인정 받지 못하다 2008년에야 국가보훈처가 건국포장을 수여하기로 결정하면서 독립유공자가 됐다.
당시 정부는 결정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정부는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여 민족자존의 기치를 높이 세우신 김조이 선생의 독립운동 위업을 기리어 건국포장에 포상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신 선생의 희생정신과 애국심을 대한민국 건국에 밑거름이 되었으며 선생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과 위훈은 후세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김칭우기자]

 

[출처] : 김칭우 인천일보 기자 : <『인천의 혼』, 조봉암에게 길을 묻다 Ⅱ>- 30 죽산, 대한민국 정치 중심에 서다 - ① 2대 대통령선거 출마 - 관권개입·흑색선전 속 초대 부통령 제치고 2위/ 인천일보, 2011. 8.17.

 

 

죽산의 동반자 / 2 정치적 동지 김조이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선구자 6·25전쟁 당시 남동생과 납북

 

▲ 1947년 인천에서 열린 김조이의 막내동생 결혼식.

붉은 원 안이 조봉암(왼쪽)과 김조이(오른쪽)./사진제공=죽산조봉암선생명예회복범국민추진위원회

 
 

김조이(金祚伊·1904~?년)는 죽산 조봉암이 혁명전선에서 만난 동지이자

죽산의 첫째부인이었으며 마지막 부인이기도 하다.

김조이는 경상남도 창원군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서울로 유학, 동덕여고를 졸업했다.

그는 서울에서 3·1운동을 경험하면서 항일운동에 뜻을 세웠고

죽산을 만나 조선공산당의 열렬한 운동원이자 죽산의 동반자가 됐다.

죽산의 주선으로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2년 유학을 한 뒤

1925년 경성여자청년동맹이라는 여성단체를 조직했다.

이 시기 김조이는 박헌영의 부인인 주세죽, 변호사 허헌의 딸이자 임원근의 부인인 허정숙과 함께

경성지역의 좌파 여성운동을 이끄는 중심 인물이었다.

16~26세의 여성들로 구성된 경성녀자청년동맹은 

'여성해방운동'을 지향했던 독립운동단체였고 창립 당시 회원수는 82명에 이르렀다.

1925년 4월 '적기시위사건'에 연루돼 잠시 검거된 김조이는

12월 제1차 조선공산당사건이 터지며 만주, 연해주 등으로 활동무대를 옮기며

죽산과 오랜 시간을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1932년 김조이는 함경도로 파견돼 함흥을 중심으로 조선노동좌익재결성을 주도하다

1934년 8월 제2태평양 노사사건의 주동인물로 지목돼 검거됐다.

당시 언론은 이 사건을 함남공천사건이라고 불렀다.

김조이는 이 사건으로 2년간 구금됐다가 기소돼

1934년 12월 함흥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다.

앞서 신의주 감옥에 갇혔던 죽산은 출소 후 인천에 정착했다.

당시 죽산은 상하이에서 김이옥과의 사이에서 딸 호정씨를 낳았지만 혼인 신고는 하지 못했다.
해외에서 항일운동을 하고 있었고, 7년간 감옥에 갇혀 있었던 탓으로 보인다.
김조이는 1942년쯤 홀로 된 죽산을 찾아 인천에 내려온 뒤 죽산과 가정을 꾸린다.
1944년 정식으로 혼인신고도 했다. 광복 후엔 죽산이 제헌의회 의원과 초대 농림부장관, 국회 부의장 등을 지낼 수 있도록 내조에 열성을 보였다. 김조이가 해방정국과 단독정부 수립 이후 선거운동, 국회활동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당시 흔치 않았던 고등교육을 받은 인텔리 여성이자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선구자격이었던 김조이의 역할이 컸을 것이라는 추정은 해볼 수 있다.그러나 1950년 6·25전쟁으로 죽산과 김조이의 결혼생활도 끝이 난다.
죽산이 국회 중요문서 등을 운반하느라 가족들을 돌보지 못한 사이 7월 중순쯤 친척집에 숨어 있던 김조이는 첫째 남동생 김송학과 함께 납북 당했다. 두 사람의 생사 여부는 물론 행적 또한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했고 남편 조봉암이 제1공화국에서 간첩 혐의로 사형 당한 이후 오랫동안 일제 강점기의 항일 공적을 인정 받지 못하다 2008년에야 국가보훈처가 건국포장을 수여하기로 결정하면서 독립유공자가 됐다.
당시 정부는 결정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정부는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여 민족자존의 기치를 높이 세우신 김조이 선생의 독립운동 위업을 기리어 건국포장에 포상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신 선생의 희생정신과 애국심을 대한민국 건국에 밑거름이 되었으며 선생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과 위훈은 후세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김칭우기자]

 

[출처] : 김칭우 인천일보 기자 : <『인천의 혼』, 조봉암에게 길을 묻다 Ⅱ>- 30 죽산, 대한민국 정치 중심에 서다 - ① 2대 대통령선거 출마 - 관권개입·흑색선전 속 초대 부통령 제치고 2위/ 인천일보, 2011. 8.17.

 

 

 

 

범야권 통합 추진 - 이승만 정권 독재 맞서 혁신정당 창당 잰걸음

▲ 제3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사실상 패배한 뒤 폭압적 방법으로 무소속 의원을 입당시킨 자유당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을 허용하는 종신제 개헌에 나섰다.

개헌안이 부결됐지만 이른바 4사5입론을 내세워 자유당 최순주(뒷줄 왼쪽) 부의장이 개헌안을 가결 선포하자

곽상훈(뒷줄 왼쪽 두번째·민주당) 부의장이 이 개헌안이 무효임을 주장하고 있다./사진제공=국회 사무처

제1대, 2대 국회에서 무소속 소장파 의원들의 지지를 받았던 죽산 조봉암은

처음으로 국민의 손으로 치러진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국민적 지지를 확인했다.

선거를 통해 국민들의 요구 및 지지, 자신의 정치적 저력을 확인한 죽산은

차기 집권구상을 가다듬으며 국회 부의장으로 복귀, 활동을 계속 했다.

하지만 이 같은 국민적 지지는 이승만정권을 비롯한 보수정당세력으로부터 경계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로 인해 그는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도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자의적(恣意的)인 '국민의 뜻'으로 대선에서 승리한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민의원 선거를 앞두고 서둘러 공천작업에 들어간다.

공천조건은 '종신제 개헌'이었다.

1954년 5월20일 제3대 국회(민의원)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됐다.

제3대 국회는 1952년에 개정된 헌법에 따라

소선거구제에 의한 민의원중선거구제에 의한 참의원의 양원으로 구성해야 하나

참의원 구성에 필요한 입법조치가 이뤄지지 않아 민의원 선거만 치러졌다.

▲ 1952년의 개헌으로 대통령은 국회의 간접선거 대신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됐다.

이때 도입된 직선제는 유신개헌으로 간선제로 바뀔 때까지 지속됐다.

이승만 제2대 대통령이 취임하고 있다. /사진제공=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210개 선거구 중 휴전선 이북지역으로 편입된 지역을 제외하고 203개의 선거구에서 선거가 진행됐다.

이 선거에서는 선거인 추천제와 함께 정당공천제가 도입됐고

후보자 수는 1천207명으로 평균 5.9대1의 경쟁률을 보였다.

종신제 개헌을 앞둔 선거였던 만큼 선거에서도 개헌문제가 주요 이슈로 등장했다.

<대한민국 국회 60년사>에 따르면

자유당은 개헌선 확보에 목표를 두고 당 공천후보들로부터 개헌에 찬성한다는 각서까지 받고 낙하산식 공천을 단행했다.

그러다 보니 공천심사 과정에서부터 각종 이변과 폭력사태가 적지 않게 발생했고

전 선거구에 걸쳐 개헌에 방해가 될 인물에 대한 관료와 경찰의 노골적인 탄압이 가해졌다.

<대한민국 국회 60년사>에 실린 대목이다.

"자유당의 2인자인 이기붕이 출마한 서대문 을구에 도전한 무소속 조봉암 의원은

유권자들의 추천장을 받지 못해 후보등록을 하지 못했다.

추천을 받는 선거운동원들이 곳곳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았으며,

추천장을 받아 등록을 하러 가면 추천을 취소한다는 신고가 들어와 등록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등록 마감일에 겨우 추천서를 접수시켰으나

이번에는 선거관리위원회가 추천인을 한명씩 심사하다 마감시간을 넘겨 결국 등록을 못하게 만들었다."

"국회의장이었던 민주국민당 신익희와 국무총리 출신의 무소속 장택상도

경찰의 탄압과 폭력배의 난무로 고전을 치러야 했으며 조병옥 등 민주국민당 중진들에 대해서도 탄압이 가해졌다."

죽산은 당초 인천에서 출마할 예정이었지만 갖은 방해로 후보 등록을 못하자 다시 부산으로 향했다.

그렇지만 역시 등록에 실패하자 이승만정권의 실세였던 이기붕과 맞대결이라는 초강수를 뒀다.

이기붕과 맞대결을 펼치면 국민적 관심때문에 등록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지만 이마저도 용납이 안됐다.

폭압적인 분위기에서 치러진 3대 국회의원 선거는 집권당인 자유당이 과반수 이상을 점하는 '승리'를 거뒀지만

개헌제한선인 3분의2 당선에는 턱없이 부족한 사실상의 '패배'였다.

자유당은 공천자 99명, 비공천자 15명 등 재적과반수를 넘는 114명의 당선자를 배출했던 것이다.

의석수로는 56.2%였지만 전국 득표율은 36.8%에 그쳤다.

정당공천제가 도입됐지만 무소속이 68명으로 많은 당선자를 냈고

반 이승만 세력의 중심이었던 민주국민당은 15석으로 원내 교섭단체조차 구성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대한국민당과 국민회가 각각 3명의 당선자를 배출했다.

▲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기관과 경찰의 방해로 선거등록조차 못한 조봉암이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다.

1956년으로 추정되며 월간 신동아에 게재된 사진이다. /사진제공=죽산조봉암선생명예회복범민족추진위원회

선거는 끝났지만 개헌선인 3분의2를 넘기기 위한 자유당의 공작은 집요했다.

<대한민국 국회 60년사>에는 자유당이 개헌선 확보를 위해 무소속 당선자를 영입하기 위한 활동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예컨대 종로 을구에서 당선된 김두환은 자유당 입당을 거부하다

살인미수혐의로 구속된 뒤 결국 개원 전날인 6월8일 입당원서에 도장을 찍고서야 풀려 나왔다.

이런 방식으로 자유당은 6월9일 제3대 국회 개원식 당일까지 127명의 의원들을 확보했다.

40석에서 15석으로 몰락한 민주국민당은 수적인 면에서는 열세였지만

당선자 면면이 중량급이어서 야당의 구심점이 됐고 일부 무소속 의원과 국민당 의원 31명이 무소속 동지회를 조직했다.

갖은 방법으로 무소속을 영입해 136석의 개헌선을 확보한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의 3선 출마를 가능케 할 헌법개정 작업에 돌입했다.

자유당은 개헌안 기초작업을 서둘러 7월9일 헌법개정초안위원회를 발족시킨 뒤

초대 대통령에 한해 3선 제한 조항을 철폐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확대하는 개헌안을 만들어 국회에 상정했다.

이 개헌안은 기존 헌법에 내포돼 있던 각종 의원내각제 내용을 전면 제한하고

대통령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국회 표결 결과 재석 203석중 135석의 찬성에 그침에 따라 개헌선인 136표에 단 한 표가 모자라 부결이 선포됐다.

이 개헌안 표결에는 국회사상 유례없는 각 도별 암호투표 지령을 내려 산표 방지에 힘썼으나

가·부 양쪽에 붓뚜껑 표시를 한 무효표가 한 표 있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며칠 후에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사회자는 앞서의 부결선포를 번복하고

203의 3분의 2인 135.3… 에서 사사오입하면 '135'임으로 개헌안은 통과된 것이라고 선포했다.

이른바 '사사오입개헌'이었다.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이승만독재가 법적 제도적으로 강고하게 구축돼 가고 있을 때

이면에서는 이에 대한 도전과 저항의 요소들이 서서히 자라나고 있었다.

바로 1955년 민주당의 출범과 진보당의 태동이었다.

먼저 민국당을 비롯한 보수야당계열은 헌정유린과 폭압통치에 맞서 반독재전선인 '범야연합전선'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954년에서 1955년에 이르는 시기에 민국당, 무소속동지회 소속 의원 등 60여명이 참여한 호헌동지회를 구성하고 원내교섭단체로 등록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이승만과 자유당에 반대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이념적 공통기반을 갖지 못해

의견충돌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민국당계열의 보수파 일명 자유민주파는 죽산은 물론 그의 지지자들의 참여를 반대했고

혁신파 일명 민주대동파에서는 문호개방을 적극 주장했다.

이 같은 대립이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보수파는 1955년 7월17일 자파만의 신당발기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9월 민주당을 창당하며 반공이데올로기와 자유자본주의 신념을 천명했다.

민주당에 참여할 수 없게 된 죽산을 중심으로 한 혁신계는

1955년 9월 광릉에서 집회를 열고 혁신세력의 대동단결과 새로운 혁신정당의 창당을 결의했다.

그리고 죽산과 서상일, 이동화를 주축으로 12월22일

'궁핍으로부터의 해방, 공포로부터의 해방',

'나가자 진보당, 뭉치자 피해대중'

이라는 슬로건 아래 당명을 진보당이라 정하고 '진보당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하게 된다.

당시 진보당의 발기취지문에는

"… 우리는 민족수호와 조국통일의 양대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혁신적 신당을 조직하고자 분연히 일어났다.

우리는 진정한 혁신은 오로지 피해받고 있는 대중 자신의 자각과 단결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등 당시 시대적 분위기로는 파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김칭우기자]

 

죽산, 대한민국 정치의 중심에 서다 -

3대 대선 후보단일화- 책임정치·수탈없는 경제체제·평화통일 성취 제안

 

 

▲ 1956년 야당연합전선으로 대통령 후보를 내세우라는 국민의 여망을 받아들여 열린 신익희·조봉암 영수회담.

회담 이후 조봉암(왼쪽 사진 가운데)과 신익희(사진 오른쪽)가 회담장을 빠져 나가고 있다./출처=죽산조봉암전집

1955년 9월19일 범야 보수세력의 결집만을 주장하는 민주국민당파와 장면계가 합쳐 민주당을 창당하자

여기에서 이탈한 '비자유당계', '비민주당계' 인사 등의 진보세력과 함께 죽산 조봉암은

1956년 1월26일 진보당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게 된다.

진보당 추진위원회에는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계열, 여운형의 근로인민당, 장건상·정화암 등의 원로들과

조향록 등 진보적 종교인과 지식인들로 구성된 비단정 진보세력들이 중심이 됐다.

죽산을 중심으로 한 12명의 발기인 명의로 발표된 진보당 발기취지문의 주요 내용이다.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쟁취의 역사적 성업인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금 환기 계승하며,

우리가 당면한 민주수호와 조국통일의 양대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혁신적 신당을 조직하고자 이에 분연히 일어섰다.

우리의 진정한 혁신은 오로지 피해 받고 있는 대중 자신의 자각과 단결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관료적 특권정치, 자본가적 특권경제를 쇄신하고

진정한 민주책임정치와 대중본위의 균형 있는 경제체제를 확립할 것을 기약하고

국민대중의 토대 위에 선 신당을 발기하고자 한다."

강령은

▲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배격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해 책임 있는 혁신정치의 실현

▲생산·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 육성

▲민주우방과 제휴하여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조국통일 실현

▲교육체제를 혁신하여 국가보장제 수립 등 4가지를 내세웠다.

▲ 제3대 대통령선거에 나선 민주당 신익희 대통령후보와 장면 부통령후보.

이승만정권과 자유당에 실정에 맞서'못 살겠다 갈아보자'를 선거구호로 내세웠다. /사진제공=국가기록원

진보당사건으로 죽산과 함께 구속됐던 언론인 출신 정태영의 <조봉암과 진보당> 통해 후보단일화 과정을 살펴본다.

진보당 추진위는 3월31일 전국 진보당 창당 추진 대표자회의를 열고

5월15일 제3대 대통령 선거에 대비하기 위해 대통령 후보에 조봉암, 부통령 후보에 서상일을 각각 지명한다.

서상일의 고사로 부통령 후보는 박기출로 바뀐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이 세번째로 대통령에 출마했던 1956년 당시 그는 이미 81세의 고령이었다.

이른바 인의 장막에 둘러싸여 국내정치의 실정에 대한 파악능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대통령중심제를 고수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그의 반민주적 정치행태는

점차 국내·외로부터 독재자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웠다.

자유당 또한 기득권의 고수를 위해 국가권력의 남용을 일상화했다.

자유당 말기에 이르러서는 각료들의 임명조차 자유당의 추천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자유당 정권 후반기의 한국관료사회는

자유당 소수 간부들의 과두정치적 행태와 스스로의 폐쇄성으로 인해 침체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여당인 자유당에서조차 탈당하는 의원들이 속출했으며 국민일반의 도덕적 분노는 점차 축적돼 갔다.

전쟁을 거치면서 비대해진 군부는 종전 후에도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과 이승만정권의 북진통일이라는 명분 아래

근대화를 위한 전면적인 조직개편과 구성원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훈련을 통해

관료기구의 침체와는 상대적으로 더욱 성장했다.

군은 지나친 비대화와 조직화로 인해 사회의 다른 부분을 압도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유했고

이 때부터 한국정치사에서 군이 가장 중요한 지배분파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이런 정치구조에서 1950년대는 원조경제를 통한 정경유착의 강화현상이 두드러졌다.

당시 재벌기업들은 자유당을 통해

조세상의 지원, 금융의 특혜적 편중, 외화자금의 특혜적 배정 등을 비롯한 각종 정책적인 지원을 받았다.

이에 대한 대가로 정치자금이 공급됐다.

정치권력의 정책적 비호 아래 대기업의 기형적인 성장은 자생적 민족경제의 성장을 가로막았고

국민들은 경제적 궁핍에 시달려야 했다.

▲ 제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은

1956년 3월6일 이승만의 81회 생일을 앞두고 열린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에 이승만, 부통령후보에 중앙위원회 의장인 이기붕을 지명했다.

자유당은'갈아봤자 더 못산다'는 구호로 민주당에 맞섰다. /사진제공=국가기록원

특히 원조경제에 따른 저곡가 정책 등으로 대다수 국민을 차지하는 농민들은 농촌을 등졌다.

이농 인구의 증가와 전쟁 직후 월남자들의 도시유입으로 도시 인구가 급증하면서 도시 빈민과 실업자가 늘어나

정치와 경제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심화됐다.

국민적 불만과 요구가 폭발한 것이 바로 1956년 5월15일 제3대 대통령 선거였다.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은 1956년 3월6일 이승만의 81회 생일을 앞두고 열린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중앙위원회 의장인 이기붕을 지명했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불출마 의사를 표명하며 순수히 대통령에 입후보하지 않았다. 불출마 의사 표명은 민의(民意)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다시 출마할 수밖에 없었다는 조작된 민의를 동원해내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였다. 즉 불출마 선언 국민들의 번의요청에 마지못해 번의하는 희극을 창출했고 사실상의 사전선거운동이었다.

이러자 자유당과 관을 동원한 광범위한 번의운동이 전국을 휩쓸었다.

심지어는 우마차조합까지 서울 거리에 소와 말을 끌고 나왔다고 해서

우의마의(牛意馬意)라고 하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였다.

3월23일 이승만은 번의운동으로 불가피하게 입후보를 결심했다고 후보 수락을 발표했다.

선거는 자유당의 이승만, 민주당의 신익희, 진보당의 조봉암의 대결로 압축됐다.

민주당은 선거 구호를 '못 살겠다 갈아보자'로 내걸고 자유당의 독재성과 부정부패에 역점을 두고 공격했다.

자유당은 이에 '갈아봤자 별수 없다'고 맞섰다. 그러나

진보당의 선거 구호는 다른 정당에 비해 '피해대중 구제, 폭넓은 민주화, 평화통일'을 주장하고 나섰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권교체를 바라던 국민의 여론은 민주당과 진보당의 후보 단일화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부응해 국회 내에서 헌정동지회라는 원내단체를 이루고 있던 무소속세력을 중심으로 후보 단일화 운동이 추진된다. 먼저 선수를 치고 나선 것은 조봉암이었다.

그는 4월3일 필요하다면 정·부통령 후보 지명의 백지화, 나아가서는 자신의 출마를 취소할 수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통령 후보 등록을 마친 4월9일 죽산은 야당연합전선과 관련

책임정치의 수립, 수탈 없는 경제체제의 실현, 평화적 통일의 성취

진보당이 제시한 세가지 원칙에 합치된다면 야당연합전선을 결성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민주당, 진보당 그리고 헌정동지회에서 각각 5명씩 절충위원을 내세워

다각적인 접촉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난항을 거듭했다.

민주당은 진보당 후보의 일방적인 사퇴만을 요구했다.

민주당은 4월12일 선거유세에 돌입했고 진보당도 4월13일부터 유세에 들어가면서

야당끼리 상호 비방하는 사태가 예견되면서 정권교체는 물건너 가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이제 야당연합전선 문제는 조봉암·신익희의 영수회담에 초점이 모아졌다.

죽산과 신익희는 상하이 독립운동 시절부터 서로를 잘 아는 사이였고 국회에서도 의장·부의장으로 함께 일하기도 했다.

특히 신익희는 지주 중심의 한민당 직계가 아니었다.

드디어 4월25일 헌정동지회의 주선으로 신익희와 조봉암의 영수회담이 열렸다.양측은 야당연합전선, 즉 정·부통령 후보 단일화에 근접한 결론을 냈고 27일에는 양당의 정·부통령 후보인 신익희·장면, 조봉암·박기출의 4자회담이 열릴 예정이었으나 장면의 불참으로 3자회담으로 진행됐다.

이 자리에서 죽산은 대통령 후보는 신익희에게 양보하고

당선되면 민주당 단독 내각으로 책임정치를 펼 것과

야당 연합의 목적인 정권교체인 만큼 부통령은 진보당에게 양보할 것을 요구했다.

신익희는"내가 포기하는 일은 있을 수 있을지 몰라도 장면씨가 사퇴할 형편에 있지 않다.

죽산의 요구는 지당하나 5월15일까지 정세변화에 따라 재론하자"고 밝혔다.

후보단일화를 통한 정권교체의 열망은 뜨거웠지만

문제는 당을 대표하고 있으나 실권을 잡지 못하고 있던 신익희의 결단력 부족과

민주당 창당 때부터 조봉암을 배척한 민주당 극우파들의 입장이었다.

그들은 후보 단일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정세 속에서 수세적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이들의 입장을 측면에서 엄호해준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공산당과 합작해서 통일을 이룩하겠다는 등의 언동은

50년 전의 매국매족하던 비참한 연극을 재현하려는 망동"이라며

진보당이 내건 평화통일 구호를 반박하면서 민주당을 엄호했다.

야당연합전선에서 누구보다도 단일후보 협상에 반대한 사람은 장면이었다.

장면의 입장에서는 신익희로의 단일화를 위해

이름도 없는 진보당의 박기출에게 부통령을 사양해야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장면은 끝내 단일화 과정에서 빠지게 된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후보 단일화 과정을 소상히 소개한 반면 동아일보는 야당연합 결렬이라고 단정지었다.

정태영은 당시 3자회담에 참여했던 박기출의 증언을 들어

"신익희와 조봉암은 두 차례에 걸친 단독회담을 통해 서로를 충분히 이해했고 그들 사이에 일종의 묵계가 이뤄졌다.

조봉암은 자신이 물러섬으로써 정권교체를 갈망하는 국민의 여망에 따르려 했다"고 평가했다.

진보당은 야당연합전선 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선거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결당도 못 한 채 창당준비위원회로 선거에 참여하게 된 진보당으로서는 전국을 통한 조직전에 나설 수는 없었다. 지구당을 통한 조직선거는 고사하고 극심한 탄압으로 조직활동이 거의 봉쇄된 상황이었다.

국한된 지역의 유세와 선전전에 국민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조봉암을 중심으로 선거운동을 벌였다.

선거운동을 하면서 신익희와 조봉암은 막후 교섭을 통해 후보 단일화를 향한 합의를 이끌어 내고 있었다.

대세로 보아 단일화에 성공한다면 신익희의 당선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5월3일 한강 백사장에서 있었던 신익희의 선거유세가 이를 증명한다.

당시 신문은 서울시내 상가가 거의 문을 닫았으며 200만 서울 시민 중 20만명이 유세장에 모였다고 보도했다.

민주당의 선거구호인 "못살겠다 갈아보자"가 도시민들에게 큰 호소력을 발휘한 것이다.

유세장 분위기로 미뤄 후보 단일화에 성공한다면 민주당이 집권할 가능성이 엿보였던 것이다.

선거 종반전에 접어들면서 민주당과 진보당에 대한 지지도는 도시뿐 아니라 농촌에까지 파급되고 있었다. [김칭우기자]

 

 

"나는 이렇게 하련다"(조봉암, 제3대 대통령 출마의 변)

-"대통령 되면 부패된 내정 개혁 … 민주역량 신장할 것"
입후보 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 겨레의 삶을 찾기 위해서'라고 명언하고 싶다.
우리는 군정 3년을 체험했고 이 박사 영도하의 수난 6년도 겪어봤다.
이 나라의 기형적인 현실은 대통령이 되어야만
행정의 책임을 지고 고칠 것은 고치고 바로 잡을 것은 바로 잡을 수 있게 되어 있기에
나는 재차 대통령에 입후보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첫째로 만성적으로 부패된 내정을 개혁하여 민주 역량의 신장을 도모할 것이요,
둘째로 민족의 비원인 남북통일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거국적 총력을 여기에 동원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정치적 빈곤을 일소해야 한다.
집권 6년의 현 정부는 일정한 계획도 궤도도 전혀 없을뿐더러 행정에 대한 책임조차 지지 않기 때문에
독선과 부패의 극은 법질서와 인권을 함부로 유린하고 있으며
관기는 날로 퇴락하고 산업은 마비되어 국정이 불안한 가운데 민생은 갈수록 도탄에 빠지고 있다.
관기를 숙정하기 위하여는 행정기구의 간소화와 공무원의 대폭적인 감량을 단행하는 동시에
공무원의 최저생활을 보장해야 한다.
산업의 진흥과 자주경제를 건설하기 위하여도 합리적인 계획경제체제를 수립해야 한다.
항구적 경제시책이 실천돼야 한다.
8·15 이후 이미 10년이 지났건만 막대한 미국의 원조로도 하나의 기간사업이 제대로 건설되지 못했다.
땜질적 무정책의 연속인데다 소수의 특권계급이 경제질서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현재 일부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은 북진통일정책은 결국 무력을 통해서 국토를 통일하자는 것인데,
전쟁의 재발은 전 세계의 인류가 원치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수백만에 달하는 귀중한 희생을 치른 우리 민족이 더 이상 더 동족상잔의 피를 흘린다고 하면
민족의 자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피 흘리지 않고 민주진영의 주동에 의한 평화적인 방법으로써 남북통일을 이룩해야 한다.
우리는 폭넓은 고도의 국가외교를 전개해야 한다.
동쪽 반도에서 고립돼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이니만큼 좌충우돌식의 신경질적인 외교의 폐단을 지양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외교진을 강화해야 한다.
국방정책은 징병주의에 입각함을 원칙으로 하여 집단안전보장체제의 확립하고
국방예산은 총예산의 30%를 초과해서는 안된다.
적당한 훈련기간의 국민개병주의로써 국방태세를 확립하되 신속한 제대가 실시됨으로써 국방예산을 감축시켜야 한다.
제대군인이나 상이군경을 보장하기 위한 정책이 마련돼야 하고 직업군인에 대하여는 최저생활을 보장해야 한다.
미국의 군원이 증강되어야 할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동아일보 1956년 4월13일자

죽산, 대한민국 정치의 중심에 서다 -

대통령선거 야당 단일후보 그러나

…3대 대선 열흘 전 신익희 사망…이승만과 맞대결

 

진보당은 결당도 하지 못한 채 창당준비위원회 체제로 대통령선거를 치르고 있었다.

관권의 지원을 받은 자유당과 전국적 조직을 갖춘 민주당에 비해 진보당의 조직은 허술했고

유세와 선전전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당 정권이 정치자금을 차단하면서 일상적인 선거운동 자금 마련도 쉽지 않아

죽산 조봉암을 비롯한 간부들의 성금으로 간신히 유지해 나갈 정도로 자금난에 시달렸다.

전세룡은 <죽산 조봉암 선생과 나 그리고 진보당>에서

"재정은 제로였다. 죽산 선생은 약수동의 작은 셋집에 살면서

수년간 준비한 돈이 약 700만원과 그때그때 당 간부들이 얼마씩 냈다.

벽보도 제 때에 못 붙이고 운동원들은 점심을 막걸리로 때웠다"고 회고했다.

한국일보는 1956년 4월23일자 신문에서

"현재의 벽보전은 자유당을 비행기로 친다면 민주당은 버스이며 진보당은 지게일지 모른다"고 비유했다.

선거 중반 자유당은 벽보 11종 24만매, 선전문 및 전단 20종 420만매를 발행했다.

민주당은 자유당에 못 미치지만 포스터 10만매, 전단 10만매, 각종 성명서 10만매, 당면정책 20만매를 발행했다.

반면 진보당은 포스터 5만매, 정견발표회 선전물 4만매, 기타 5만매 제작에 그쳤다.

이마저도 관권, 경찰력의 압력으로 제대로 부착하지도 뿌리지도 못했다.

▲ 민주당의 신익희·장면 후보는'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사상 두번째로 치러진 대통령 직선제에서 투표율은 94.4%에 달할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

제3대 대통령선거 및 제4대 부통령선거전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대통령 후보에는 이승만, 신익희, 조봉암 등 3명이 나섰다.

부통령 후보는 자유당의 이기붕, 민주당의 장면, 진보당의 박기출 외에도

이윤영, 이범석, 이종태, 윤치영 등이 무소속으로 출마해 각축전을 벌였다.

죽산은 자유당과 민주당의 협공을 받고 있었다.

민주당에서는 신익희 측이 후보 단일화를 추진하고 나섰지만 장면 측에서는 공세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자유당에서도 이승만은 "친공주의자와 친일파들이 권력을 추구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친공은 조봉암, 친일파는 한민당의 후신인 민주당 신익희와 장면을 지칭한 것이었다.

유례없는 탄압 속에서도 죽산은 희망을 갖고 있었다.

권위적인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의 희망을 심겠다는 일념으로 선거운동에 열정을 쏟았다.

이미 5월6일 전주에서 신익희와 만나 후보 단일화를 극적으로 공표하기로 약속이 돼 있던 상황인 만큼

정권교체를 꿈꿨을 지 모른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단일화 상대였던 신익희가 5월3일 수십만 인파가 운집한 한강 백사장 유세에서 정권교체를 강력히 촉구한 뒤

5월5일 새벽 호남유세차 호남행 열차에 올랐다 유언조차 남기지 못한 채 63세로 숨을 거둔 것이다.

뇌일혈에 의한 심장마비였다.

대통령선거를 불과 10일 앞두고서다.

해공과의 후보 단일화를 위해 호남 유세를 하고 있던 죽산도 큰 충격을 받았다.

1957년 <신태양> 5월호에 실린 '나의 정치백서'에서 죽산은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우리 당의 주장을 대중 앞에 밝히었고 우리 당 후보의 승리와 우리 당의 발전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만 정략적으로 강행하고 마지막 투표일 며칠 앞두고는

우리 당 후보의 입후보를 취소하고 야당 연합적인 투표를 하게 해서

다수 국민의 소원에 응하는 것이 정치적인 의의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해공 선생과는 그러한 조치에 대한 합의를 보아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 해공 선생의 작고로 말미암아 그나마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피차에 대단한 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투표를 열흘 앞두고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가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대통령선거는 자연스럽게 조봉암과 이승만의 맞대결로 압축되고 부통령선거는 이기붕과 장면의 대결로 진행됐다.

▲ 남대문에 걸린 자유당의 이승만·이기붕 후보의 대형 인물포스터. /사진제공=국가기록원

자연스레 야권 단일후보가 된 조봉암에 대해 관권의 탄압과 노골적인 선거운동의 방해가 이어졌다.

서중석은 <조봉암과 1950년대(상)>에서

"신익희가 5월5일 서거하였음으로 진보당은 그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여야 했으나

5월6일경부터 거의 선거운동을 할 수 없었다.

중앙 간부진이 각도 유세반을 편성하여 마지막 유세를 하고 선전유인물을 배포하게 하였지만

선거방해가 너무 심했다.

충남반의 박준길, 강원반의 이명하 등은 현지에 내려간 직후 테러를 당하고 유인물을 빼앗겼으며

경남반의 전세룡은 의령에서 경찰서장실로 연행되어 경고를 받고 쫓겨 왔다.

진보당 경북도당 선전부장 이병희는 5월6일 3명의 괴한에게 납치되어

'선거자금 출처가 어디냐'며 고문·폭행을 당하여 실신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자유당은 죽산과의 일대일 대결에서 압도적인 표차는 물론 승리조차도 자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2대 대통령 선거에서 선거구마다 선거 종사자들이 놀랄 만큼 죽산에게 많은 표가 쏟아졌고

4년이 지난 제3대 대선은 폭력과 폭압이 없으면 유지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민주당의 구호는 국민의 공감대를 사고 있었다.

게다가 "피해대중은 뭉치라"라는 진보당의 구호 또한 죽산의 지지세력뿐 아니라

신익희에 대한 광범위한 동정표를 조봉암으로 끌어 모으고 있었다.

죽산의 사퇴만을 촉구하던 민주당으로써는 선택의 폭이 제한됐다.

조봉암을 단일후보로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지지를 거부할 것인가였다.

진보당은 재차 민주당과의 연합전선 구축을 모색했으나

민주당측은 조봉암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신익희의 추모표를 유도하거나 차라리 이승만을 지지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민주당은 신익희 사망 이튿날 성명을 통해

"다시 대통령후보를 지명하여 싸우고 싶으나 법적 불비로 그 길이 두절되었고

본당 이외의 후보자는 그 정치적 행장이나 노선으로 보아 그 어느 편도 지지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 정권교체로서 우리 당의 정강정책을 구현하려던 초지의 관철은 후일로 미룬다"라는

오히려 조봉암을 비난하는 듯이 보이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의 개인독재를 비난하고 곧잘 구국투쟁을 선언한 민주당이었지만,

그들 역시 이승만 정권과 본질적으로 다름없는 보수적 반공세력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말았던 것이다.

더구나 장면의 입장에서는 이승만과 신익희의 대결에서 갑자기 이기붕과 장면의 대결로 맞상대가 바뀐 만큼

그 대결에 정면승부를 걸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특히 이승만이 81세로 고령이었던 점을 감안해

이 대통령의 유고 이후 자연스레 권력을 승계할 것이라는 희망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신익희 사망 직후부터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는 것을 감지한 진보당 간부진에서는

유세차 지방을 순회중이던 죽산을 급히 상경시켜 몸을 피하도록 했다.

그 대신 중앙의 간부진이 각 도에 유세반을 편성해 마지막 유세와 선전 유인물을 배포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선거방해로 활동을 하지 못했다.

이때부터 신문 등 언론사에서는 대통령선거전에 관한 보도를 거의 하지 않게 된다.

선거를 하루 앞둔 5월14일 진보당 선거대책위원장 서상일은

"본당 각 지방 당부로부터의 보고에 의하면 폭력배들이 본당 선거 사무소에 집단 침입하여

파괴하고 각처에서 선거운동원이 구타·치상당하고 있다. …(중략)

이러고도 자유선거 운운의 구실을 또 다시 앞세울 것인가"라는 내용을 발표했다.

이러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5월15일 3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됐다.

진보당은 1952년의 2대 대통령선거 때와 마찬가지로 투·개표 참관인을 거의 낼 수 없었다.[김칭우기자 ]

 

 

 

해공 신익희는 누구인가

                                                                 독립운동 헌신·의회제도 기초 확립 공헌
 

 

우리 헌정사에서 '그때 그랬더라면…'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었을 법한 아쉬운 대목이 한둘은 아니지만
안타까운 사건 중 하나를 꼽으라면 아마 신익희 대통령 후보의 서거일 것이다.
1956년 5월5일 신익희 후보가 호남지역 유세를 위한 호남선 열차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향년 63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60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제헌헌법의 기초와 의회제도 확립에 커다란 공헌을 했던 정치지도자 해공 신익희는
갑오경장이 일어났던 해인 1894년 6월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22세이던 1916년 일본의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 후
귀국해 이듬해 보성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중국으로 망명해 해방 때까지 26년 동안 임정을 지키며
법무총장, 문교부장, 외교부장, 내무부장을 거쳤고 때로는 중국군 육군중장을 겸하기도 했다.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결성하기도 했으며,
한국독립당에 참여해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과 가깝게 지냈다.
신익희는 해방을 맞아 조소앙 등과 함께 1945년 12월 2진으로 환국했다.
1946년 대한반공연맹을 결성한 뒤 국민대학 초대 학장, 자유신문사 사장, 대한체육회 회장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해공이 해방정국에서 정치적으로 뚜렷한 위치를 차지한 때는
1948년 3월 김규식에 이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2대 의장으로 선출되면서부터다.
이 기구는 미군정의 자문기관으로 남한을 대표하는 입법기관이어서 영향력이 컸다.
1946년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단정(單政) 불가피론'이 제기되자
신익희는 단정불가피론을 받아 들여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수립'을 지지하게 된다.
1948년 5월10일 총선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경기도 광주에서 출마했는데 그의 명성이 높아 무투표 당선됐다. 5월31일에 개원한 제헌국회는 이승만을 의장에, 그리고 신익희 의원과 김동원 의원을 각각 부의장에 선출했다.
이승만 의장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공석이 된 국회의장에 해공이 선출됐다.
이 무렵 해공은 자신이 귀국 직후 발족시켰던 행정연구회를 통해 최초로 완성된 형태의 헌법초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 헌법초안이 제헌헌법의 뼈대가 됐음은 물론이다.
제2대 국회의장으로 재선된 그는 전시 중의 국회를 무난히 이끌어 갔다.
제3대 국회 때 이 대통령의 비민주적 4사5입 개헌을 계기로
범야세력은 민주당으로 결집해 해공을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1956년 5월15일에 실시되는 제3대 대통령선거에 해공은 민주당 후보로 나섰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는 선풍적인 호응을 얻었다.
특히 5월3일 40여만 명이 운집한 한강 백사장 정견발표는 그의 폭발적인 인기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그는 선거일을 열흘 앞둔 5월5일 새벽 전북 이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해
국민들로서는 정권교체를 눈앞에서 놓친 것처럼 안타까움을 더 했다.
5월5일 오후 유해가 서울역에 도착하자 수많은 추모 인파가 모여 들었고
일부 군중은 경무대로 향하다 무장경관과 충돌, 발포하면서 사상자가 나는 등 유혈참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통령 선거결과 무효표가 180여만 표가 넘었는데 이는 해공에 대한 추모표로 불린다.
해공은 평소 
"사람은 저 잘난 맛에 사는 것이니 남의 잘난 것도 인정하여야 하며,
나도 잘 살려니와 남도 잘 살아야겠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본이념이다"라고 갈파했다.
요즈음 정치권의 화두인 소통을 해공 선생은 벌써부터 주창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회보 2011년 5월호·글 김종해 미디어담당관실 자료조사관]

 

 

대한민국 정치의 중심에 서다 -

투표에선 이기고 개표에선 지고

 

자유당,죽산 득표 고의적 누락 3대 대선결과 날조

▲ 1956년 5월15일 제3대 대통령선거 및 제4대 부통령선거를 앞두고

길거리에 선거 유인물이 게시돼 길을 지나던 시민이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 /사진제공=국가기록원

1956년 5월15일 제3대 대통령선거 및 제4대 부통령선거가 끝났다.

선거결과 이승만 504만6천437표, 조봉암은 216만3천808표를 획득했다.

죽산 조봉암은 예상을 뒤엎고 투표자수의 23.9%, 유효투표수의 30.0%를 득표했다.

유효투표자수에 대한 지역별 득표율을 보면

서울 36.7%, 경기 22.9%, 강원 9.2%, 충북 13.9%, 충남 22.9%, 전북 39.8%, 전남 27.9%,

경북 44.7%, 경남 37.7%, 제주 12.1%로 나타났다.

조봉암은 전북 전주시와 정읍군, 전남 목포시와 완도군, 경북 대구시, 김천시, 경주군,

달성군, 월성군, 영천군, 칠곡군, 울릉군, 경남 진주시, 충무시, 진해시, 진양군,

창녕군, 양산군, 울산군, 통영군, 고성군 등에서

이승만 보다 많은 득표를 했다.

 

▲ 진보당은 선거자금이 없어 포스터도 제대로 붙이지 못했다.

조봉암 포스터 옆에 '갈지 못하면 살 수 없다'는 진보당의 구호가 애처롭기까지 하다. /사진=국가기록원

29개 선거구에서도 40% 이상의 지지를 받았다.

서울(26.7%), 전북(39.8%), 경북(44.7%), 경남(37.7%)에서 놀랄 만한 득표를 했고

경상남북도의 7개 선거구에서는 이승만 보다 두배 이상의 득표력을 과시했다.

여기에 선거 10일을 앞두고 숨을 거둔 민주당 신익희 후보의 추모표라 할 수 있는 무효표가 185만6천818표나 됐다.

이처럼 역사에 남겨진 선거결과는 놀라웠다.

그러나 이 숫자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죽산의 표가 고의적으로 누락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3대 대선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회고를 들어보자.

 

▲ 진보당은 관권을 비롯한 각종 선거방해에 시달려야 했다.

훼손된 진보당의 선거포스터를 이를 보여주고 있다./사진제공=국가기록원

선거 중 부통령 후보를 사퇴한 진보당 출신 박기출은 1975년 펴낸 <한국정치사>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식 발표일 뿐 실제 투표결과는 이와 크게 달랐다.

투표권을 독점하고 있던 자유당, 정부기관은

진보당 관계자의 입회를 허락하지 않고 죽산의 표를 크게 줄이는 한편 이승만 표를 불려 놓았다.

그들은 부정개표, 부정발표라는 상투적인 수단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당선을 날조했던 것이다.

투·개표가 선거민의 감시 아래 실시된 도시 등에서는 죽산이 이승만을 압도하고 있다.

그래서 진보당은 선거 결과에 관한 논평에서 '득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라고 선언했다."

"예컨대 각지의 관헌은 투표소의 진보당 참관인을 폭력으로 몰아내고

자유당 간부와 민주당 관계자 그리고 동 참관인 사이에 '부통령 표는 그대로 처리하되

대통령 표는 선거관리인에 일임한다'라는 것이 모의되었다.

이렇게 해서 대통령 관계의 개표는 당국의 지시를 받은 선거관리인의 손에 맡겨졌고

각종 부정 불법 수단을 동원한 개표가 실시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실정은 부산 시내의 전투 개표소와 진해의 개표소에서 필자가 직접 목격했고,

그 밖의 각 선거구에 관해서도 후일 필자가 신민당에 관계되었을 때 동 당의 관계자로부터 전해들은 바 있다.

부산시 영도구의 자유당위원장 이영언씨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개표 상황을 본 순간 너무가 큰 차가 나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표 저 표 할 것 없이 모두 죽산 표뿐이었다.

공무원들도 이승만에게 투표하지 않은 것 같다.

조봉암 표를 가운데 넣고 위·아래에 이 박사 표를 한 장씩 붙여 100표 한 묶음의 샌드위치표를 만들었는데,

이 박사 표는 그 위·아래에 붙이기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이같은 실정으로 미루어 볼 때 죽산은 유효 투표의 70~80%는 틀림없이 획득했던 것으로 생각되며

조씨의 총득표는 아마 600만을 넘고 이승만의 득표는 100만 전후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민주당 최고위원 조병옥도 1956년 6월5일 제26차 국회 본회의에서

"3대 대통령 선거에 있어서, 내 판단에는 만일 자유분위기의 선거가 행해졌더라면

이 대통령이 받은 표는 200만 표 내외에서 지나지 못하리라고 나는 판단합니다"라고 발언했다.

조병옥은 2대 대통령선거에서 죽산에게 투표하겠다면 김일성과 담판하겠다고 각을 세웠던 인물이었다.

조선민족청년단출신으로 16대 국회의원을 지낸 서영훈은 자신의 일기에서

"그 동안 5일간이나 개표 과정에서 많은 소동과 의혹을 자아내는 사태가 있었는데,

대구에서는 개표 중 수차례 단전이 되어 '올빼미' 개표소동이 벌어졌고

전국적으로 180여만표가 무효표로 처리되는 등  이해하기 어려운 개표 결과가 나타났다.

항간의 여론으로는 수백만 표에 가까운 무효표가 대부분 조봉암씨를 찍은 표일 것이라는 추측 공론이 무성하다. … "

라고 당시를 기록했다.

민주화운동에 나섰던 강원룡 목사도 신동아와의 대담에서

"1969년 삼선개헌을 전후한 시기에 당에 항명했다는 이유로 제명당한 공화당 국회의원을 지낸 박종태씨가

956년 선거 얘기를 들려줬다. 박씨는 당시 여당 선거감시위원이었던 사람으로 개표장에서 표를 100장 단위로 묶는데,

조봉암 표가 워낙 많이 나오니까 조봉암 표 98장에다 앞뒤로 이승만 표를 한 장씩 붙이고는

이승만 표 100장으로 계산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나중에는 양쪽에 붙일 이승만 표가 부족했다고 한다"고 밝혔다.

▲ 제3대 대통령선거 투표 상황 (단위:표)/자료=중앙선거관리위원회

 

 

▲ 조봉암 후보가 이승만 후보를 압도한 곳 (단위:표) /자료=중앙선거관리위원회·

'조봉암과 진보당' 죽산은 <나의 정치백서>에서

"선거의 결과는 항용 말하는 것처럼 투표에는 이기고 개표에는 졌습니다"라고 결과를 담담히 밝히고 있다.

사실상 죽산의 승리로 끝난 제3대 대통령선거 결과에 대해

문중섭 경성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는

<1950년대 한국 정치이념 지형의 일면-제3대 대통령선거 결과 분석을 중심으로> 논문을 통해

죽산의 득표요인과 감표요인을 분석했다.

일단 "한국의 사회민주주의는 1950년대 중반에도 일정한 자신의 지분을 갖고 있었다"고 단언했다.

문 교수에 따르면 한국의 사회민주주의는 1920년대 후반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통해 발을 딛기 시작해

1928년 3월 최초 한국독립당의 당의로 채택돼 임시정부의 기본이념으로 자리잡았다.

한국의 사민주의는 1931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외 선언을 통해 임시정부의 국가이념으로 천명된 뒤

1941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명의의 건국강령으로 구체화된다.

해방직후 미군이 진주하기까지 남한의 정치세력 판도는 좌파 우위였고

미군정 이후 와해되긴 했지만 1946년 당시 이데올로기 지형은 사회주의가 지배적이었다.

사회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라기 보다는 극우도 아닌 극좌도 아닌 사회민주주의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에서 1948년 건국 헌법에서도 한국의 사민주의 전통은 이어졌다.

사민주의 전통이 조봉암의 득표요인으로 작동했을 것으로 문 교수는 보고 있다.

또 죽산의 득표상황을 보면 죽산은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북도에서 다른 지역 보다 많은 득표를 했다.

이들 지역은 진보주의에 대한 역사적 전통이 강했던 곳들이다.

일제시기에 농민운동이 강했던 지역이고 광복 후에도 다른 지역에 비해 인민위원회 활동이 강했으며

전쟁시기 빨치산 활동도 많았던 지역이다.

이와 같은 진보주의적 전통에 대해 손호철 서강대학교 교수는

해방 직후의 도별 좌익지수

문 교수가 산출한 도별 일제시기 사회운동 주도자 수 일제시기 사회운동단체 수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처럼 진보주의적 전통이 강한 영·호남의 조봉암 득표율이 높다는 사실은

조봉암의 득표 요인이 그의 정치이념 및 선거공약과 상관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당시 도시화의 정도와 죽산의 득표율이 보이는 상관성도

죽산의 득표와 그의 정치이념간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도시와 도시가 속해 있거나 도시에 인접한 지역의 조봉암 득표율이 높았다.

이런 결과는 도시화의 정도가 높을수록 사회유동성이 높아

정치일반에 대한 관심과 인지 및 죽산의 정치이념에 대한 인지 정도가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죽산의 득표에는 신익희 표의 유입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1956년 5월18일

"조봉암씨는 당시(1952년 대통령선거)의 득표보다 2.5배를 상회하고 있는 바

이는 민주당 대통령후보 신익희씨가 투표 10일 전에 급서한데 기인하였고

신씨를 지지하던 유권자의 일부가 조씨에게 투표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죽산의 득표율과 민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 득표율과의 상관성을 보더라도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북도의 전 지역에서 매우 높은 상관관계를 보이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국민들의 반자유당적 성향과 신익희 후보의 급서가 조봉암의 득표 요인으로 작동했음을 말해준다.

문 교수는 죽산의 감표요인 분석했다.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죽산의 득표를 저해한 요인으로는

당시의 억압적인 선거환경과 저지당한 선거운동, 투표와 개표의 부정, 그리고 낮은 인지도 등을 제시하고 있다.

1950년대 중반 한국정치체제는 반공독재체제였던 만큼

좌익에 연루되면 그 가족·친지, 마을전체가 검거·처형당했던 사실에 비춰

'반공'만이 유일한 생존의 길임을 방어적·수동적으로 받아 들일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이

죽산에게로 적극적인 투표를 막았다는 분석이다.

또 당시 공정하지 못한 선거과정 즉 죽산의 선거운동 부족과 선거운동 탄압, 죽산 지지에 대한 협박, 무수한 선거부정 등은 죽산의 득표를 더욱 감소시켰다.

좌익계열이 강했고 3대 대선까지 각종 선거에서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선전하였으며

박기출 등 진보당추진위원회 간부들이 다수 있었던 부산에서도 조봉암 표가 적게 나온 이유는

대규모 부정선거 말고는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조봉암의 득표율과 지역구 국회의원 소속 정당의 상관관계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무소속이거나 민국당(민주당의 전신) 소속인 국회의원 지역구는 대체로 조봉암의 득표율이 높다.

이 지역에서는 불법·부정·관권선거가 상대적으로 덜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3대 대선에서 조봉암의 득표는 당시의 선거환경과 선거과정에 비추어 볼 때 놀라운 현상으로 평가될 수 있다.

특히 개표부정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1960년 제4대 대통령 및 제5대 부통령선거 주무장관이었던 최인규는

4·19혁명 원인이 됐던 3·15부정선거 획책 동기를 1956년 5·15대통령선거에서 찾았다.

그는 전국 경찰이 조봉암의 당선을 방지하려고 가지각색의 선거방해를 하고 개표와 발표에서도 엄청난 조작을 했음에도 216만 여의 조봉암 지지표가 나온 것은 반공국가의 체면을 추락시킨 것이기 때문에

그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부정선거를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이를 통해 보면 공정한 개표가 이뤄졌다면 조봉암의 득표는 공식 발표를 훨씬 상회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문 교수는

"제3대 대통령선거가 자유로운 정치적 환경이 보전되고 참여적 정치문화가 형성된 선거환경에서 실시되고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과정이었다면 조봉암의 득표는 216만여 표를 훨씬 상회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는 당시의 선거환경과 선거과정이

정치이념과 선거공약에 준거한 조봉암의 득표를 크게 감소시키는 요인으로 작동한 것을 말한다"고 밝혔다.

문 교수는 보다 정확한 조봉암의 득표요인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당시 유권자들에 대한 설문조사와 지역별·요인별 지역연구 또는 사례연구가 요구된다고 지적했다.

 

 

2·3대 대통령선거'고향 인천'출신지 이점 미미 - 유효득표율, 전국 수준과 엇비슷

제2·3대 대통령선거에서 조봉암은 고향인 강화에서, 인천에서 얼마 만큼의 득표력을 발휘했을까?
민주화를 거치면서 최소한 투·개표 부정은 사라진 현재에도
정치인 출신 지역에서는 몰표에 가까운, 그래도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많은 득표를 하는 한 형태로 자리잡았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인천지역 유권자는 10만6천444명에 불과했고
투표자는 7만9천172명으로 투표율은 74.4%에 그쳤다.
이는 전체 투표율 88.0%는 고사하고 서울 91.6%, 경기 85.0%에 크게 못 미친 숫자다.
죽산은 인천지역에서 9천427표를 획득 유효득표율 12.4%를 기록했다.
이는 전체 유효득표율 11.4%과 엇비슷한 수치다. 고향인 강화에서는 3천403표를 획득해 8.6%에 그쳤다.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를 보자.
부평지역에는 부개·부평동·산곡·계동국민학교 등과 부평2동사무소, 부평3동 공회당 등에 투표소가 설치됐다.
부평지역의 선거 유권자 수는 2만6천206명이었으며 남자가 1만3천420명, 여자가 1만2천786명이었다.
인천의 유권자수는 14만1천497명으로 당시 전체 인구 31만7천여명 중 절반가량에 해당했다.
인천지역 전체에서 조봉암은 3만877표를 얻어 이승만의 5만8천867표에 뒤졌다.
유효득표율로 보면 34.4%로 전국 득표율(30.0%) 보다는 높으나 도시임을 감안하면 높다고는 할 수 없는 수치다.
고향인 강화에서는 9천40표를 얻어 2만9천992표를 얻은 이승만에게 크게 뒤졌다.
[김칭우기자 /자료=중앙선거관리위원회]

 

 

 

 

진보당 창당, 그리고 진보당 사건

- 대선 지지 힘입어 진보 결집 … 무자비한 탄압에 좌절

1956년 5·15 정·부통령선거에서 확인된 국민의 열망에 힘입어 죽산 조봉암은 신당 창당에 전력,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반년 만인 11월10일 어렵사리 진보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자유당·민주당이라는 보수 양당에 맞설 수 있는 제3세력의 등장은

국민 다수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용인하기 힘든 시대적 상황이었고

죽산에 대한 국민적 신망이 높아질수록 탄압의 강도는 더해졌다.

결국 정권은 북한의 사주를 받았다는 진보당사건을 일으켜 죽산을 사형시키고 진보당을 해체하는 수순을 밟는다.

죽산의 사법살인 이후 사회민주주의진영은

4·19혁명 직후 마지막 불꽃을 사른 뒤 5·16군사쿠데타 이후 명맥이 끊기게 된다.

▲ 조봉암의 1·2대 국회의원 선거사무실이 위치했던 배다리 초입에 자리했던 진보당 인천시당.

진보당은 결당 직후 서울·경기도당 등 지방당 결성대회 당시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인천시당은 얼마 운영되지 못하고 진보당 사건으로 사무실 문을 닫았다고 한다. /김칭우기자

진보당 창당준비위원회는 대선기간에 획득한 대중적 지지를 기반으로

1956년 6월쯤부터 범진보 세력 대동단결을 모색하는 운동을 벌였다.

민주혁신당 결성 추진을 통해 죽산과 공화당 이탈파인 장택상 사이의 합작회담이 개최되고

김창숙, 박용희, 이명룡, 서상일, 장건상 등 5명은 진보·혁신세력의 대동단결을 호소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마침내 11월10일 오전 10시 서울시립극장에서 전국 대의원 900명 중 853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보당 창당대회를 개최했다.

▲ 1956년 5월15일 제3대 대통령선거·제4대 부통령선거가 치러졌다.

조봉암은 투·개표 부정에도 216만여 표라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와'투표에선 이기고 개표에선 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선거 개표결과를 시민들이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 /사진제공=국가기록원

역사상 첫 사회민주주의 노선의 제3 정당이 창당된 것이다.

·창당대회에서는 책임 있는 혁신정치, 수탈 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화통일의 3대 정강을 채택한 후

죽산을 위원장에, 윤길중을 간사장에 선출했다.

·이에 앞서 죽산의 진보당 계열과 북한에 대한 인식에 차이를 두고 갈라선 서상일 등 진보당 이탈파는

11월8일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이듬해 10월15일에 민주혁신당을 창당했다.

·여기에 장건상을 중심으로 한 구 근민당 계열로 혁신세력은 크게 셋으로 분열됐다.

▲ 진보당의 기관지 역할을 했던 월간지'중앙정치'. 조봉암이 표지로 등장했다.

사진=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진보당은 창당 이후 신속하게 지방당 조직을 결성하는 한편 1957년 들어 혁신세력의 통합을 다시 추진했다.

8월 조봉암과 장건상은 혁신세력 대동통일운동을 추진할 것을 공식화 했으며

9월28일에는 진보당, 장건상 중심의 근민당 계열, 노농당 일부, 전 한독당계 등이 연합해

우선 혁신세력 통일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그렇지만 결당 직후 서울·경기도당 결성대회, 전남도당 결성대회, 전북도당 결성대회 등에서

심한 테러와 탄압에 직면하게 된 진보당은 진보진영 대통합이 본격화된 1957년 말부터 최대 위기를 맞는다.

진보당이 자유당으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기 시작한 큰 이유는

제2·3대 대통령선거에서 죽산이 이승만 대통령과 대결을 벌여 예상 외로 국민으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3대 대선인 5·15선거에서 온갖 탄압에도 216만 표를 얻어

4년 전보다 무려 3배 이상의 득표로 유력한 정치인으로 죽산이 떠올랐다.

자유당·민주당이라는 보수 양당에 맞설 수 있는 제3세력의 등장은

국민 다수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용인하기 힘든 시대적 상황이었고

죽산에 대한 국민적 신망이 높아질수록 탄압의 강도는 더해졌다.

죽산에 대한 견제는 죽산을 고립시키는 것으로 진행됐다.

6·25전쟁 직후 레드콤플렉스를 이용, 중간 지도층을 형성할 만한 지도급 정치인이 죽산에게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고

일반 대중과의 연결 고리를 단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죽산의 전력을 이용해 각종 간첩사건과 연계시키려던 공작이 성공하지 못하자

죽산과 진보당이 4대 민의원에 대거 진출하는 것을 저지하려 했다.

저지의 구실로 삼은 것은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었다.

이승만의 '무력통일론'은 극우 편향적인 실현 불가능한 통일 정책이었지만

긴장 조성과 무력 증강 효과는 한국 권력층뿐 아니라 당시 미국의 세계 정책 방향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냉전 체제에서 미국의 세계 정책에 정면 도전하는 '평화통일'을 직접 공격하게 되면

자유당정권은 미국의 지지 내지는 암묵적 동의를 받을 것으로 판단한다.

또한 죽산이라는 걸출한 정치스타를 중심으로 한 진보당은

핵심인 죽산만을 제거하면 쉽사리 해체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진보당 결당 이후 죽산과 진보당에 대한 권력 최핵심부 차원의 탄압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가

여러 경로를 통해 죽산에게 들려 왔다.우려는 현실이 됐다.

4대 민의원 선거 예정일을 5개월 앞둔 1958년 1월13일 이른바 '진보당사건'이 터졌다.

자진 출두한 죽산을 포함한 윤길중, 김기철, 김달호 등 진보당 핵심 간부들이 모조리 구속됐고

정부는 재판이 열리기 전인 2월25일 진보당의 등록마저 취소시켰다.

권력에 의한 일방적인 강변, 진보당의 각종 간첩 투쟁 연계와 평화통일론의 국시 위배가 그 근거였다.

당시 사법당국은 간첩 양이섭(양명산)을 내세운다.

죽산이 양이섭과 접선하면서 공작금을 받았으며 북한의 지령에 따라 간첩행위를 했다는 누명을 씌웠다.

죽산은 1958년 7월2일 1심 재판에서 징역 5년을 언도받았다.

평화통일이나 간첩혐의는 모두 무죄였다.

당시 재판장은 고 유병진 판사(1914~1966)다.

유 판사는

"'조 씨 등이 북의 지령을 받고 이에 호응했다거나 간첩과 밀회했다'는 공소사실이 인정되지 않는다"

간첩혐의 부분은 무죄로 판단하고 국가보안법 위반 및 불법무기 소지 혐의만 유죄로 인정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이 판결 때문에 이승만 정권의 미움을 사 그해 말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해 법복을 벗어야 했다.

1심 재판부의 배석 판사였던 이병용(85) 변호사도 올 1월 죽산 무죄 판결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유 부장판사와 우배석인 나, 좌배석 배기호 판사 등 3명은 죽산의 간첩혐의가 무죄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

"우리는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하면 고법에 올라가서 진실이 밝혀져 무죄가 날 줄 알았는데

고법과 대법원에서는 오히려 사형을 선고했다"고 회고했다.

1심 판결이 나오면서 단순한 '사건'으로 그칠 것이라는 희망섞인 전망도 있었지만

이승만·자유당정권은 정권의 운명을 걸고 죽산 제거에 나서면서 희망은 절망이 된다.

1심 판결 3일 후인 7월 5일 '반공청년단'이라고 자칭하는 200~300명의 청년들이

"친공판사 유병진을 타도하자", "간첩 조봉암을 처단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법원에 난입하는 재판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그들은 10일 후 또 다시 친공판사를 규탄한다고 대한문 앞에 모였다가 무장경찰에 의해 해산됐다.

2007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 결과

죽산 자진출두 다음날인 1월14일 국무회의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 죽산과 진보당 관련 사항이 논의된 것으로 밝혀졌다.

역사기록에 남는 국무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죽산 제거를 논의했고 판결을 내린 판사에 대한 질타도 있었다.

당시 죽산의 변호인였던 김춘봉은 진실화해위원회 면담에서 반공청년단이 경찰기동대 소속이었다고 밝혔다.

사실상 경찰공무원 신분인 반공청년단 난동으로 재판부가 피신하는 사법사태를 맞는다.

배후조정자를 색출하라는 김병로 대법원장과 야당의 요구에 대해 검찰은 일부 구속을 제외하고는 관대한 처분으로,

자유당은 국회에서 법원난동사건진상조사단 구성안을 거부했다.

사법부는 법원데모사건으로 확실히 위축됐다.

때 마침 정계는 야당탄압의 도구로 등장할 국가보안법 개정 파동으로 정국이 극도로 긴장과 불안에 휘말려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열린 9월 2심 판결은 확연히 달라졌다.

김용진 판사가 담당한 2심판결에서는 검찰의 공소사실이 인정되면서

검찰의 구형대로 조봉암과 양이섭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그러나 검찰이 주장한 죽산의 간첩죄 적용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우선 1·2심의 처리과정에서 죽산은 양이섭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을 시인했지만

그 돈이 북한에서 온 것이라는 점은 몰랐고 북한과 내통했다는 검찰의 공소는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HID(대북공작기구)에서 양이섭에 대한 감시·감독 책임자 등 관련 증인들도 이에 힘을 실어줬고

양이섭도 2심부터 1심에서의 자백을 번복했다.

상식대로라면 1심에서 양이섭의 자백으로 징역 5년의 유죄판결이 내려진 만큼

2심에서는 양이섭이 그 자백을 번복했으면 검찰측에서 이에 대한 반증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간첩죄는 백지화 돼야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오히려 양이섭의 번복 진술에 대한 진실성 여부는 물론

죽산에게 유리한 진술들을 무시하고 사형을 언도했다.

이런 1심과 2심의 판결 차이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한 법을 가지고 판이한 재판을 하게 되면 국민은 어느 것이 옳은가를 판단하기 힘들다.

재판의 권위를 세워줄 것을 사법부에 요망한다"라는 함축적인 발언을 했다.

이 대통령의 관심이 크다는 것이었고 신문에 보도된 이 발언은 대단한 압력을 사법부에 가한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었다.

1958년 12월24일 정당의 입을 막고 언론의 자유에 재갈을 물릴 속셈으로 내놓은 신 국가보안법이

국회의사당에 무술경관 200명을 불러들여 야당의원들을 지하실에 감금한 상태에서 통과됐다.

그리고 1959년 2월27일 진보당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졌다.

대법원은 애초 기소했던 평화통일정책에 대해 '언론자유의 한계를 이탈했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정작 죽산의 간첩죄 여부에 대해서는 양이섭의 1심 자백과

돈을 받은 사실 그리고 감방 안에서 양이섭에게 전하려 했다는 죽산의 쪽지가 중요 증거가 되면서 사형을 확정했다.

이어 진보당을 불법단체로 판시했다.

죽산의 맏딸 조호정(84) 여사는

"재판 과정에서 '평화통일' 문제는 꼬리를 감추고

육군첩보부대 소속 대북첩자이자 북을 왕래하는 대북상인 양이섭을 등장시켰다"라며

"양이섭씨는 상하이 시절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아버지를 많이 도와주신 분이다.

약수동에 살 때 아버지 심부름으로 만날 때면

'네가 상하이에서 태어난 호정이구나, 상하이에서 너를 본 기억이 있어'라고 말하곤 했다"고 밝혔다.

변호인단은 정치적 구명의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재심을 청구했다.

조 여사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썼다.

"박사님! 저희 아버님은 백번 고쳐 죽어도 절대로 간첩이 될 수 없습니다.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던 내 조국인데 무엇이 부족해서 누구를 위해서 간첩 노릇을 하셨겠습니까.

아버님은 무슨 운명이 그다지 기구하시기에

일제 때는 항일투사로 구사일생을 하고,

6·25 때는 '반역자 조봉암을 없애라' 공산당 벽보가 제1착으로 서울 거리를 휩쓸다시피 했고,

오늘은 자신이 심혈을 기울이시던 대한민국 이 땅에서 사형수의 신세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박사님! 저희 아버님의 항일 역사를 보나, 해방 후 악질 지주와 싸우며 농지개혁을 단행한 공을 보나

죽음을 불사한 반공 이념을 보아서도 절대로 간첩이 될 수 없고, 간첩죄를 씌워서 죽일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탄원서는 이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못한다.

재심청구는 7월30일 사형을 선고했던 김갑수에 의해 기각됐고

가족들의 눈물겨운 구명탄원도 무위에 그친 채

법무장관 홍진기와 이승만 대통령의 확인을 거쳐 7월31일 신속히 사형이 집행됐다.

유일한 증인이자 간천 연결고리였던 양이섭은 이보다 이틀 앞서 이미 처형됐다.

그의 진술을 뒤집을 기회조차 막아 버린 뒤였다.

사형 집행 후 1년도 못 돼 1960년 4월26일, 4월 혁명으로 이승만·자유당 정권이 무너졌지만

그 자유로운 정국에서도 '진보당'은 재건되지 못했다.

'사회대중당'이라는 간판으로 진보당의 잔존 세력이 주축이 돼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결성했지만

이념적 집결체가 되기 전에 해체된 '진보당'은 강력한 지도부를 창출해낼 수가 없었다.

7·29총선거에서 '사회대중당'이 받은 국민의 지지표는 5%도 못 됐다.

게다가 7·29총선 이후 채 1년도 못 돼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그 간부들조차 투옥돼 3~10년의 옥고를 치르면서 다시는 재생의 힘을 얻지 못한 채 종막을 맞는다.

 

 다시 살아난 죽산-반세기 만에 무죄 판결 … 독립유공자 서훈 숙제로

 

1959년 7월31일 사형에 앞서 죽산 조봉암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이 박사는 소수가 잘 살기 위한 정치를 했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 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그렇게 죽산은 이틀 후 인 8월2일 오후

묘비하나 세우지 못한 채 환갑을 불과 몇 달 남기고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돼 파란 많은 생을 접었다.

그렇지만 남겨진 사람들은 죽산을 잊지 않았다.

국내 언론이 침묵할 때 영국과 미국, 일본 등의 신문, 잡지들은 이승만 정부가 죽산을 사법살인했다고 맹비난했다.

일본에서는 거류민단을 중심으로

재판중 구명운동을 펴다 처형된 지 13일 후인 8월12일에는 도쿄에서 재일교포와 일본 명사 300여명이 추도식을 갖고

고인의 영혼을 위로하고 정부의 만행을 규탄했다.

처형 9개월 뒤인 1960년 4월에는 국민의 힘으로 권력을 뒤엎은 4월혁명이 일어나

죽산과 진보당 간부들이 수감됐던 서대문형무소에 자유당정권 유력자들이 수감됐다.

4월혁명의 공간에서 혁신세력은 다시 움트기 시작했고 죽산에 대한 신원과 명예회복 운동이 일어났다.

 

그렇지만 4월의 봄은 오래가지 않았다.

1년 뒤 5·16군사쿠데타로 혁신세력들은 다시 움츠려 들었고 죽산의 신원과 명예회복도 긴 망각의 터널 속에 갇히게 된다.

1987년 6월 민중항쟁은 군부세력이 쥐고 있던 권력을 다시 국민의 손으로 돌려 놓는 일대 사건이었다.

독재정권에 의해 자행된 국가폭력의 베일이 하나둘씩 벗겨지면서 죽산에 대한 논의도 시작됐다.

1988년 '죽산조봉암선생추모회'가 결성되고 이듬해 처형 30주년이 되는 7월 명예회복 운동이 본격화됐다.

드디어 1991년 10월25일 '죽산조봉암선생 사면·복권에 관한 청원서'가 국회에 제출됐다.

청원서에는 당시 여당이었던 민자당의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을 비롯해

박태준·김종필 최고위원, 제1 야당인 민주당의 김대중·이기택 공동대표 등 모두 86명의 국회의원이 서명했다.

청원서에 서명하지 못한 많은 의원들이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를 기반으로 추모회는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로 확대·개편하고

11월15일 청원의 법적처리를 위한 사면·복권법 개정조항을 국회 법사위에 이를 제출했다. 윤길중 의원 등이 제출한 사면·복권법 개정조항은 특별사면의 범위를 죽은 사망한 자, 즉 사자(死者)로 확대하는 것이었다.

여야합의로 서명된 죽산 청원서와 사자에 대한 특별사면을 명시한 사면·복권법 개정조항은

그러나 연말 여야 격돌로 제156회 국회가 변칙마감되면서 결국 빛을 보지 못하게 된다.

현재 사면·복권법에도 사자에 대한 특별사면은 명시하지 않아 개정이 추진중이다.

이로 인해 1995년 조인환씨 등 창녕 조씨 문중이 국가보훈처에 죽산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을 때도,

2004년 12월 죽산의 유족이 재차 신청했을 때도

죽산의 포상은 보류된다. 명백히 현행법을 위반한 '사형범'이었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에 의한 국가폭력에 희생된 이들의 신원과 명예회복 움직임은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법적 테두리를 갖추게 된다.

2005년 5월3일 국회에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 기본법'이 제정되면서다.

현행법을 크게 흔들지 않으면서도 국가권력이 은폐된 진실을 밝혀 내 과거와의 화해를 통한 국민통합,

즉 해원상생(解怨相生)을 위한 국가기관으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

12월1일 공식 출범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한시조직이나 독립적인 국가기관으로

항일독립운동과 일제강점기 이후 국력을 신장시킨

해외동포사, 광복 이후 반민주적 또는 반인권적 인권유린과 폭력·학살·의문사 사건 등을 조사하게 된다.

죽산의 맏딸 조호정 여사는 2006년 7월4일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1년2개월여의 조사 끝에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듬해 9월27일

죽산과 그 유가족에게 국가가 사과하고 피해 구제 및 명예 회복을 위한 조치를 권고했다.

화해위는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다 복역한 죽산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라고 국가에 권고했다.

죽산 등 관계자에 대한 수사 및 재판기록 2만4천752매, 재심청구 사건기록 40매, 관련 사건 판결문,

진보당사건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 발언이 담긴 국무회의 비망록,

각종 논문과 언론보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소장 자료 등을 조사한 결과였다.

이듬해인 2008년 8월15일 정부는 제63주년 광복절을 맞아

죽산의 정치적 동지이자 반려자인 김조이 여사의 건국공로를 인정해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이해 8월19일 죽산 유족들은 대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1959년 7월30일 대법원에서 재심이 기각된 지 49년 만이었다.

그렇지만 대법원은 재심개시를 주저했다.

1심에서 죽산의 국가변란죄 등 핵심사안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뒤

국가권력에 영합, 혹은 압력에 굴복해 대법원 자신이 진보당사건 관계자들을 직접 심리한 재판이었던 만큼

재심을 하기가 어려웠던 탓이었을 것이다.

사정이 이렇자 2009년 7월30일 사회원로와 여·야 정치인 145명은

죽산의 명예회복을 청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2010년 10월29일 대법원은 진보당사건 재심 청구를 수용한다.

곧 11월18일 공개 변론을 거쳐 2011년 1월20일 대법원은 52년 만에 열린 재심에서 역사적인 판결을 한다.

국가변란목적단체결성과 간첩 혐의에 대해 대법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재판부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진보당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보완하려 했을 뿐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지 않았다"

"평화통일론도 헌법에 위배되지 않으며 북한을 따랐다는 증거가 없다" 판단했다.

간첩 활동을 벌인 혐의에 대해서는

"압수한 증거들은 직접적인 증거가 되지 못한다.

유일한 증거는 양이섭의 진술밖에 없지만 수사 권한이 없는 육군특무부대가 조사했었다"라며

무죄를 선고한 제1심 판결을 인용했다.

대법원은 별도의 입장을 밝히지 않고 판결문 말미에 "뒤늦게나마 잘못을 바로 잡는다"라고만 적었다.

무죄 판결 직후 3월23일 대법원 3부는 죽산 유족 4명에게

형사보상법상 최대 한도인 1억2천700만원의 형사보상금을 지급하라 결정한다.

재판부는 "구금 기간에 피고인이 받은 손실과 정신적 고통, 신체 손상, 경찰·검찰·법원의 과실유무 등 사정을 참작할 때

보상액을 최대한도로 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565일의 미결구금에 대한 1일 보상액을 17만2천800원, 사형집행에 대한 보상액은 3천만원으로 책정했다.

형사보상법과 시행령은 구금에 대한 1일 보상액을 5천원에서 보상청구 원인이 발생한 연도 최저임금액의 5배까지,

사형에 대해서는 3천만원 이내에서 보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유족들은 대법원 판결을 기초로 6월23일 국가 상대로 137억4천20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한다.

7월15일에는 서울프레스센터에서 죽산조봉암선생명예회복범민족추진위원회가 주최하는

'죽산 조봉암 선생의 사상 및 업적 재조명을 위한 심포지엄'이 열렸다.

서울대 조국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심포지엄에는

죽산의 사상과 업적을 재조명하고 죽산의 무죄판결을 사법적으로 고찰했다.

7월31일 죽산 52주기 추모제는 궂은 비에도 대법원 재심 무죄판결로 어느 때보다 들뜬 분위기에서 열렸다.

유족을 비롯한 죽산을 기리는 이들은 광복절에 죽산의 독립유공자 서훈 추서를 기대했다.

그러나 광복절을 앞두고 죽산의 유족들과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등 죽산 기리는 이들은

고대하던 독립유공자 서훈 추서는 고사하고 독립유공자 선정보류라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접하게 된다.

국가보훈처는 8월9일 '독립유공자 심의위원회 회의 결과 죽산의 독립유공자 서훈 추서를 보류한다'라고 발표한다.

국가보훈처는 공식적으로 보류사유에 대해서는 밝히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유족들과 관계자들은

죽산이 일제말기 국방헌금 150원을 냈다는 당시 신문보도가 주요한 이유가 됐을 것이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인천지역에서는 새얼문화재단이 죽산의 신원과 명예회복에 앞장섰다.

1999년 죽산 탄생 100주년을 맞아

'죽산의 정치적 리더십과 인천'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어 역사적 재평가에 나섰다.

이듬해에는 강화의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와 함께

강화대교 인근의 강화읍 갑곶리 진해공원에 죽산을 기리는 추모비를 세웠다.

새얼문화재단은 올 3월9일 역사적인 새얼아침대화 300회를 맞아

죽산 특집 강연회를 개최해 죽산의 무죄판결과 죽산의 사상과 정신, 그리고 인천의 역할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강연회 직후 새얼문화재단은 죽산 동상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시작

최근까지 6억4천여만원에 이르는 시민성금을 모았다.

1899년 태어나 1959년 사망한 죽산은 파란만장했던 삶만큼이나 신원 및 명예회복에도 반세기에 걸쳐 현재 진행중이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은

"인천이 배출한 한국의 정치지도자인 죽산은 평화통일과 복지사회 건설을 주장한 선각자였다"

"이념적 갈등이 빚어낸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한 차원에서

인천시민이 설립자인 동상 건립을 추진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진보당 사건과 죽산 명예회복 추진 경과

1958년 구속 → 1991년 사면·복권 청원 → 2011년 동상건립 모금
⊙ 1958년 1월11일 - 서울시 경찰국, 진보당 간부 사전 구속영장 발부
⊙ 1월12일 - 새벽 진보당 간부 6명 연행
⊙ 1월13일 - 조봉암 자진출두(경찰은 검거 발표)
⊙ 1월14일 - 이근직 내무장관 중앙청 국무회에서 진보당 사건 보도.
이승만 대통령 "조봉암 그 사람 벌써 조치됐어야 할 사람"이라고 언급
⊙ 7월 2일 - 서울지법 1심 판결, 조봉암·양이섭(양명산)에게 5년형 언도, 진보당 간부 모두 무죄
이후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조봉암 1심판결은 말도 안된다. 헌법을 고쳐서라도
이런 일이 없도록 시정해야 한다"고 발언
⊙ 7월 5일 - 소위 반공청년단 법원 난입, 용공판사 물러가라고 시위
⊙ 10월25일 - 서울고법, 조봉암·양이섭에 사형, 간부들에게도 실형선고, 법정구속. 2심판결에서 양이섭
특무대 진술 번복했으나 재판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음
⊙ 1959년 2월27일 - 대법원, 조봉암·양이섭 사형 확정 판결. 일부 간부 유죄, 대부분 간부 무죄
⊙ 5월27일 - 변호인단, 재심청구
⊙ 7월29일 - 양이섭 사협 집행
⊙ 7월30일 - 대법원, 오후 5시 재심청구 기각
⊙ 7월31일 - 오전 11시, 서대문형무소에서 조봉암 사형 집행. 치안국장, '조봉암 사형기사 보도하면 민심
을 자극하는 이적행위된다'고 언론사 통보
⊙ 8월 1일 - 서울시경, 오전 7시부터 준(準)비상경계령 발표
⊙ 8월 2일 - 조봉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
⊙ 8월12일 - 일본 도쿄에서 조봉암 추도식
⊙ 1960년 4월 - 4월혁명 이후 혁신세력, 조봉암 신원 및 명예회복 추진
⊙ 1961년 5월 - 5·16군사쿠데타로 조봉암 신원 및 명예회복 운동 무기한 중단
⊙ 1988년 7월 - 6월항쟁 이후 '죽산조봉암선생추모회' 결성
⊙ 1989년 - 조봉암 처형 30주년 맞아 명예회복 운동 본격화
⊙ 1991년 10월25일 - 민자당·민주당 등 국회의원 86명 서명, '죽산조봉암선생 사면·복권에 관한 청원서'
국회 제출
⊙ 11월15일 -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청원의 법적처리를 위한 사면·복권법 개정조항 국회 법사위에
제출
⊙ 연말 여야 충돌로 청원, 법 개정 무산
⊙ 1995년 - 조인환씨 등 창녕 조씨 문중, 국가보훈처에 죽산의 서훈 신청. 신청 반려
⊙ 1999년 - 죽산 탄생 100주년 맞아 새얼문화재단, '죽산의 정치적 리더십과 인천' 심포지엄 개최
⊙ 2000년 - 새얼문화재단, 강화의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강화 진해공원에 죽산추모비 건립
⊙ 2004년 12월 - 죽산 유가족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신청. "광복 이후의 수형사실, 사면 복권 등
법적 해결 후 재심의"를 사유로 포상에서 보류
⊙ 2005년 5월3일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 기본법' 제정
⊙ 12월 1일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출범
⊙ 2006년 7월4일 - 조호정 여사,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
⊙ 2007년 9월27일 - 진실화해위원회, 조봉암과 그 유가족에게 국가사과, 피해 구제 및 명예 회복을
위한 조치, 독립유공자 인정 권고 결정
⊙ 2008년 8월15일 - 국가보훈처, 조봉암의 부인 김조이 여사에게 건국포장 추서
⊙ 8월19일 - 죽산 유족들, 대법원에 진보당사건 재심 청구
⊙ 2009년 7월30일 - 사회 원로 및 여·야 정치인 145명, 죽산 명예회복 청원하는 성명서 발표
⊙ 2010년 10월29일 - 대법원 진보당사건 재심 청구 수용.
⊙ 11월18일 - 대법원 공개 변론
⊙ 2011년 1월20일 - 대법원, 재판관 전원일치로 조봉암 관련 국가변란목적단체결성 및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선고
⊙ 3월9일 - 새얼문화재단, 새얼아침대화 300회 특집 조봉암 강연회 개최, 조봉암 동상 건립을 위한 모금
운동 시작
⊙ 3월23일 - 대법원, 조봉암 유족 4명에게 형사보상법상 최대 한도인 1억2천700만원 형사보상금 지급
결정
⊙ 6월23일 - 조봉암 유족들, 국가 상대 137억4천2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 7월15일 - 죽산조봉암선생명예회복범민족추진위원회, 서울프레스센터에서 '죽산 조봉암 선생의 사상
및 업적 재조명을 위한 심포지엄' 개최
⊙ 7월31일 - 죽산 52기 추모제
⊙ 8월 9일 - 국가보훈처,조봉암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 추서 보류,일제말기 국방헌금 150원 납부 의혹
/자료=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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