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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세리

매루 2020. 12. 30. 10:29

 

안성천에서 나오는 물줄기와 삽교천에서 나오는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에있는 공세곶

 

 

 

공세리는 육지 깊숙이 들어온 아산만에 위치하고 있어

내포지방의 입구로 해상과 육로로 연결되는 중요한 포구 였으며

예로부터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일대에서 거두어 들인 세곡을 저장하던

공세 창고가 있던 공세곶 창고지(貢稅串倉庫址)로도 유명한 곳이다

조선조 성종9년(1478년)에 이 곳에 세운해운창을 설치 운영해 오다가

중종 18년(1523년)에 80칸의 창고를 짓고 영조 38년(1762년)에 폐창이 될 때까지

근 300년동안 서해를 따라 삼도의 세곡을 한양으로 운반한 역사적인 곳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공세곶의 수세(收稅) 구역으로

아산, 청주, 공주, 천안 등 충청도 17곳의 고을이 기록되어 있다.

공세곶창(조창)에는 1523년(중종 18)에 23칸의 창고 건물이 세워졌다

공세곶창(공진창)은 15세기 후반 이래 아산만 일대의 유일한 조창으로서

조선시대 충청도 서부 권역의 세곡을 수납하여

한성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공진창은 현재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일원이며,

1621년(광해군 13)에는 조창을 둘러싸는 성곽인 공진창성을 축조하였다.

이때 쌓은 성곽의 일부는 지금도 남아 있으며, 1895년에는 옛 조창의 자리에 성당이 건립되었다.

현재도 공진창의 자리에는 공세리성당이 있다.

 

공세리 성당은 한반도 전체 아홉번째로 오래된 성당으로

현재의 성당 건물은 드비즈 신부가 직접 설계하고 지은 1921년의 고딕성당이다

2005년도 한국관광공사에 의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선정

350년이 넘는 국가보호 노거수가 3그루나 있고 예전에는 성당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다

1895년 이곳에 부임한 에밀 드비즈(한국명 成一論)신부님이

프랑스에서 배우고 익혔던 방법으로 원료를 구입해 고약을 만들어 나누어주게된다

그 비법을 당시 신부님을 도와드렸던 이명래(요한)에게 전수하여

이명래고약 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적으로 보급 됨

[이광표의 근대를 걷는다]공세리 성당과 이명래 고약

이광표 오피니언팀장·문화유산학 박사 
2016-07-14

 

1922년 건축된 충남 아산 공세리 성당.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불리는 곳,

‘태극기 휘날리며’ ‘사랑과 야망’ ‘아내가 돌아왔다’ 등 70여 편의 영화와 드라마를 촬영한 곳.

바다에 인접한 충남 내포(內浦) 땅 아산에 가면 공세리 성당이 있다.

내포는 한국 천주교의 요람. 이에 걸맞게 공세리 성당의 역사도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0년 공세리에 공소(신부가 상주하기 전 단계의 소규모 천주교회)가 생겼고

1895년 프랑스인 에밀리오 드비즈(한국명 성일론) 신부가 부임했다.

그는 1897년 한옥 성당을 신축했고 이어 1922년 직접 설계해 지금의 공세리 성당을 지었다.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혼합된 공세리 성당은 우아하면서 단정하다.

그런데 언뜻 보면 근대기에 지어진 다른 성당과 그 모습이 비슷하다.

그럼, 이 성당이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꼽히는 이유는 뭘까.

건물의 외관도 외관이지만, 가장 매력적인 것은 주변 경관과의 조화다.

수령 350여 년의 느티나무를 비롯해 건물 주변엔 고목이 여럿이다.

그 고목과 서양식 건축물의 조화가 압권이다.

성당 마당엔 순교자 32위의 넋을 기리는 공간도 있다.

순교의 흔적이 찾는 이를 숙연하게 한다.

 

이 성당엔 빼놓을 수 없는 일화가 있다.

1900년 전후, 아산 지역엔 종기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모습을 안타까워한 드비즈 신부는 나름대로의 의약 지식을 활용해

종기 퇴치 약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신통하게 종기는 곧 나았고 화제가 되었다.

당시 공세리 성당에서 심부름을 하던 10대 소년 이명래가 있었다.

소년은 드비즈 신부로부터 열심히 고약 조제법과 치료법을 배웠다.

그러다 1906년 종기를 치료하는 고약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이에 힘입어 아산에 ‘명래한의원’을 개업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이명래 고약’은 공세리 성당에서 그렇게 탄생했다.

 




이명래 고약 : 종기 치료제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부근에서 하루 200∼300명의 환자를 보던 시절. 1939년~1940년 촬영

 

파리외방전교회의 드비즈신부가 1895년 아산 공세리에 부임해 공세창을 헐고 성당을 지었다.

중국을 통해 입국했던 신부는 라틴어로 된 약용식물학 책의 지식과 한의학 지식을 응용해

고약을 만드는 비법을 창안해냈고,

공세리성당 신도였던 요한 이명래에게 전수했다.

처음에는 드비즈신부의 한국이름을 따서 성일론고약이라고 하다가

이명래가 이 고약에 민간요법을 더해서 1906년 아산에 이명래 고약집을 개업한다.

 이명래 : (1890년~1952년). 일제 강점기 한의학자. 출신지는 서울 중구이다.

천주교박해를 피해 가족과 함께 충청남도 아산군 공세리로 들어갔다가,

1906년(광무 10) 한방의서의 비방과 프랑스 선교사 드비즈 신부의 도움을 받아 ‘이명래 고약’을 개발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치료활동을 펼쳤다.

1920년에 서울로 돌아와 고약의 효능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고,

대중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1936년 둘째 사위 이광진에게 고약제조법이 전수되었다.

1952년 이명래가 뇌출혈로 세상을 떠난 뒤,

1956년 딸 이용재가 ‘명래제약’을 설립하고 고약을 대량생산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회사의 경영이 악화되면서 시중 약국에서는 2002년부터는 판매되지 않았고,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위치한 ‘명래 한의원’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2001년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명래 고약’은 해방 이후부터 가정상비약의 대명사로 평가받았으며,

최근 GP제약이 이명래의 고약제조법을 인수하여 다시 상품화하였다.

 

[출처] 이명래 [李明來, 1890∼1952]|작성자 현대사스토리텔러

 



2011. 1. 5

이명래 고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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