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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먼저다

그해 겨울 (국민방위군)

매루 2020. 12. 22. 10:02

 

 

국민방위군 사건

 

1949년 12월 19일이승만 대통령은 민족청년단 등 각종의 청년 정치단체를 해산시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전국의 각 청년단체들을 일괄 통합하여 대한청년단을 조직하였다.

이승만 자신이 직접 총재직을 맡았고 장택상·지청천·전진한·유진산·신성모·노태준 등이 최고위원으로 추대되었다.

대한청년단은 전국적으로 200만 단원을 확보하는 규모로 확대되었으나,

조직 계파갈등이나 지분싸움으로 인해 점차 내부분열이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1950년 1월 최고위원간에 내부분열이 심각해지자 최고위원회제를 단장제로 변경하였다.

초대 단장에 신성모 국방부장관이, 제2대 단장으로 안호상, 제3대 단장으로 김윤근이 각각 임명되었다.

6·25전쟁 시기 아군은 1·4후퇴의 위기를 넘기면서 37도선에서 간신히 전선의 안정을 기하였으나,

중공군의 연속적인 공세에 전장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이 우리의 자유 독립을 위한 최후 결전 단계임을 선언하고

국민총력전으로 이를 극복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대통령의 성명으로 소집영장을 기다리던 청년들 사이에는 자진입대를 요청하는 인원이 증가하였고,

이들 중에는 “나는 화랑도 정신을 갖고 있다. 전쟁의 승리는 우리에게 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신명을 바칠 것이다”라는 혈서를 쓰고 지원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 미국정부가 새로운 부대를 창설하는 것보다

기존부대를 보충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안이라고 강조함으로써 그 계획은 어렵게 되었다.

한국정부는 중공군과 맞서 싸우려면 많은 병력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하고 독자적으로 국민방위군을 설치하게 되었다.

국민방위군은 1950년 12월 21일 공포 실시된 ‘국민방위군 설치법’에 의하여

만 17세 이상 40세 미만의 제2국민병이었다.

병력 응모를 시작하자 순식간에 17세부터 40세까지의 장정들이 순식간에 50만 명을 넘어섰으며,

정부는 이들을 경남북도 일원에 51개의 교육대를 설치하고 수용하였다.

간부는 대체로 대한청년단 간부들로 구성되었다.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국민방위군 사령관에

대한청년단 단장인 김윤근을 단번에 준장으로 임관시켜 임명하고 참모진을 구성하였다.

최소한의 기간요원만이 현역으로 임명되었고,

나머지 지휘관은 모두가 주로 청년단 출신에서 급조된 방위군 장교로 충당되었다.

정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남쪽으로 철수하게 되자

국민방위군 100만여 명도을 남쪽으로 후송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는 전쟁 초기 남한 대부분의 지역을 북한이 점령함에 따라

점령지의 많은 청년들이 북한군 의용군으로 재편되었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조치였다.

이무렵 국민방위군 예산이 1951년 1월 30일 국회에서 통과되었는데,

방위군 총인원을 50만 명으로 추산하여 3개월분 총 209억 원을 책정하였지만

1인당 배당액은 식량도 조달하기 어려운 액수였다.

더구나 예산이 배당되는 과정에서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일부 예산을 횡령 또는 전용함으로써

심각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1·4후퇴 시기 전국 각지에서 창설 작업을 하고 있던 국민방위군은 지역별로 대구, 부산 등지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령부의 고급 간부들이 보급품을 부정으로 착복함으로써 급기야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영하의 기온에서 장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수많은 장정들이 식량과 피복을 지급받지 못해

곧바로 병력 1천여 명의 아사 및 동사자가 발생하였고

수 만 명이 영양실조에 걸려 이후 사망에 이르렀던 것이다(사망자 수는 9만여 명 이상으로 추산됨).

부당한 처우를 견디지 못한 국민방위군들은 집단탈출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사실이 국민들에게 알려지자 문제가 되기 시작하였다.

결과이승만 정부는 여론을 의식하여 현장조사를 실시하였지만

처음부터 방위군 간부 몇 명만을 기소하여 무마하려 했다.

특히 신성모 장관이 사건을 축소 또는 은폐하는데 적극적이었다.

그는 부사령관 윤익헌을 처벌하는 선에서 사건을 종결시키고자 했다.

또한 그는 군사법정에 자신의 친구인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을 재판장에 임명하여 사건의 축소를 지시했다.

이선근이 재판에서 김윤근에게 무죄, 윤익헌에게 징역 3년 6월을 선고하게 되자,

국민 여론이 다시 들끓어 혼란이 극에 달하였다.

결국 이에 이승만 대통령이 국방부장관 신성모를 면직하지 않을 수 없었고 후임으로 이기붕을 임명했다.

이어 국회 재조사 과정에서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헌, 재무실장 강석한, 조달과장 박창언,

보급과장 박기환 등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방위군 예산 10억 원을 착복하였으며

정치계에 수천만 원의 자금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 결과 이시영 부통령이 사표를 제출하였으며

다시 재개된 재판에서 김윤근, 윤익헌 등 국민방위군의 주요 간부 5명에게 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군사재판은 통상 비공개 하에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국민여론의 관심을 반영하여 국민방위군사건의 재심은 공개재판으로 진행되었다.

그만큼 여론의 관심이 지대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정한 정치자금을 받았던 정계의 인사들에 대한 처벌은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상납된 자금에 대한 수사도 착수되지 못하였다.

의의와 평가국민방위군 사건으로 국회는 1951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설치법 폐지안을 결의함으로써

국민방위군을 해산하였다.

이 사건의 주모자인 김윤근·윤익헌·박기환 등 5명은 중앙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에 처하게 되었으며,

대한청년단은 1953년 9월 10일이승만의 명령으로 해산되었다.

이 사건결과 신성모 국방부장관이 세력을 잃게 되었고

그 후임으로 사건해결을 맡았던 이기붕의 인기가 급상승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후계자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출처 :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6,25 사변둥이의 생일

송리라

2010년 6월 23일

 

태어나자마자 6․25 전쟁이 나는 바람에 젖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해 내 동생들보다 부실하다고,

지금도 내가 아프면 그게 엊그제 일인 양 어머니는 걱정이신데,

어느덧 6․25 전쟁 60주년이 되었다고 한다.

사변동이 나 자신은 60번째 생일이 실감나지 않는데,

요 며칠 TV에서 보니 내가 어느 새 잊혀져가는 전쟁의 역사 속 인물이 되어 있고,

비로소 60이란 숫자의 실체를 알 듯하다.

 

60년 전 그날, 나는 태어난 지 두 달도 안 된 갓난아기였습니다.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우리 어머니는 그때부터 숨어 계신 아버지를 먹여 살리시느라

고개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나를 업고 미아리 고개로 찐고구마 장사를 다니셨다고 하더군요.

엄마는 쭉쭉 뻗은 내 동생들과 달리 내 다리가 곧지 못한 건 그렇게 노상 업고 다녔기 때문이라고 하시던데. 아무튼 그 난리통에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 당신이 정성들여 만드신 내 작은 베개 속에서

좁쌀을 꺼내 죽을 쒀가지고 며칠 동안 연명하기까지 하셨다더군요.

 

나에게는 6•25 때 그렇게 어머니와 고생을 함께 하면서

나를 유난히 예뻐하셨던 작은아버지가 계셨다고 합니다.

물론 나는 그분의 손길조차 기억할 수 없지만요.

말이 작은아버지이지 열여덟 소년이었던 그분은 전장에 나가 결국 무명병사가 되었고,

우리 아버지 가슴에 한을 남기셨습니다.

그 회한이 아버지가 쓰신 글에 담겨 있기에 소개합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으면서….

 

 

 

侃英(간영)의 죽음

1970년

 

모진 추위가 몰아치는 날이면 나는 문득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푸짐한 음식상을 대할 때 가끔 목이 메는 때가 있다.

기한(飢寒)으로 어느 외딴 산비탈에서 쓰러져 죽었을 동생 간영(侃英)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나의 유일한 동복동생 간영이는 6•25사변 때 국민방위군에 끌려 나가서 죽었다.

6•25라는 민족의 대동지환(大同之患)에 혈육을 잃은 사람이 한둘이랴만

나의 동생 간영이는 그 짧은 일생이 다만 고생의 연속이었고,

지금까지 시신도 무덤도 찾지 못한 고혼임을 생각할 때 20년이 된 오늘까지 나의 뼈를 저리게 하는 것이다.

 

1950년 12월의 어느 날 새벽, 간영이는 소집영장을 받고 집을 나섰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은 후퇴를 거듭하고, 서울 시민들은 다시 피난짐들을 싸기에 분망할 때였다.

정부에서는 장정(壯丁-징병 適齡의 남자)들을 남으로 이송하기 위하여

국민방위군으로 하여금 그들을 인솔케 하여 도보로 남행시켰다.

그때 동생은 만으로 18세도 되지 않은 소년이었지만 그에게도 소집영장이 나왔던 것이다.

그때는 서울 수복과 뒤이은 피난준비 등으로 행정은 마비될 대로 마비된 때라

영장을 받고도 응하지 않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부모가 있고 돌보는 사람이 있는 청년들은 국민방위군 소집을 피하고 가족과 같이 남으로 떠났다.

동생도 그 방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형에게 얹혀 있는 몸이라

피난길에 짐이 되기 싫어서 굳이 방위군 소집에 응하겠다고 나섰던 것이리라.

그리하여 동생은 새벽에 집을 나섰다. 등에는 커다란 이불 보따리를 지고.

“형님, 그럼 가보겠습니다.”하고 대문을 나서는 그에게

지금 돈(1970년) 3천 원쯤을 쥐어주면서 나는 동생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동생과의 마지막이 되었던 것이다.

대구로 피난을 가서 겨울을 넘길 때까지 동생의 소식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51년 봄에 저 악명 높은 국민방위군사건이 터졌다.

6•25사변을 맞아 정부는 청년단체를 기간으로 군사단체에 준하는 국민방위군이라는 것을 만들고

이들에게 장정의 이송, 훈련 등을 맡겼던 것인데,

방위군사령관 김윤근(金潤根)은 장정의 급식을 가로채서 사복을 채우고 이에 따라 수만 장정은 얼어 죽고 굶어 죽게 되었다. 살아서 생명을 부지한 청년들도 반병신이 되리만큼 몸들이 쇠약하였다.

방위군 간부들은 가위, 이 땅의 젊은이들의 피를 빨아먹은 흡혈귀였던 것이다.

이 사건이 국회에서 문제가 되자 비로소 방위군에 끌려갔던 청년들은 귀가조치되었는데

신작로마다 거지 모습을 한 우리의 형제들이 절룩거리면서 행진하는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이 비극의 책임을 지고 김윤근은 총살형에 처해졌다.

나는 방위군 사건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새삼 동생의 안부를 수소문하였다.

그는 어렸을 때 발에 동상을 입은 후 해마다 겨울이면 그것이 도지곤 하였다.

성한 몸이라도 배겨날 수 없는 그 지옥행렬에서 동상까지 입은 동생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돈이라고는 불과 3천 원밖에 없으니 어디서 따스한 국물 한 사발이라도 사 먹을 수 있었으랴.

결국 동생은 비참한 희생자들 속에 끼었을 것이다.

동생은 네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실로 이상스럽게도 처마 끝에 앉았던 서너 마리의 제비들이 방안으로 들어와 짹짹거리며 날아다녔다.

동생은 어머니의 죽음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마당에서 동무들과 장난치며 놀고 있었다.

2년 뒤에 새어머니가 들어오셨는데 새어머니가 별로 모질게 하지는 않았으나 동생은 어쩐지 풀이 죽었다.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곧 서울로 왔으므로 새어머니의 신맛 쓴맛을 별로 모르는 셈이다.

그러나 동생은 가끔 눈치도 보아야 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동생이 열다섯 살 때 돌아가셨다.

그때 나는 서울에 있었으며, 38선이 막혀 아버지의 별세는 물론 아버지의 병환도 알지 못하였다.

후에 들으니 동생은 20리 길을 뛰어다니며 의사를 부르고,
약을 지어 오고 그리고 아버지의 임종을 보고 장례를 지냈다.

그는 아버지를 산에 모신 후에 38선을 넘어서 나를 찾아왔다.

서울에서 나를 만난 동생은 말보다 먼저 울음을 터뜨렸다.

형제는 서로 달라진 모습에서 그동안의 고생과 슬픈 사연들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으나 내 한 몸을 지탱하기도 어려운 고학생이었으므로

동생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어떤 관청에 사환으로 취직을 시켰다.

생각하면 나는 인정도 없는 냉혈한이다.

어느 날 돈암동에서 동생과 같이 전차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무심히 서 있다가 문득, 동생이 자기 또래 중학생의 모표를 유심히 쳐다보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비로소 가슴이 철썩 하는 것을 느꼈다.

동생도 어서 중학교에 보내야 할 텐데…. 그러면서도 형편이 여의치 않아 겨울을 그대로 넘기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나는 이른 아침마다 동생을 깨워서 밥을 짓게 하였다.

자취생활은 동생이 온 후에 매우 편리하게 된 셈이다.

동생은 으레 자기가 아침밥을 짓는 것이려니 하고 군소리 없이 밥을 짓는다.

어려서부터 고생을 익혀온 까닭이다.

되놈 같은 나는 동생이 차가운 물로 쌀을 일어서 밥을 해놓으면 무슨 상전이나 되듯이
일어나서 밥을 먹고 학교로 간다.

동생은 재빠르게 설거지를 하고 직장으로 나간다.

이듬해 봄에 나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단국중학교에 동생을 편입시켰다.

동생은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러나 동생의 평생을 통한 보람 있는 생활은 불과 두 달로 끝난 것이다.

6•25사변이 나자 그는 다시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등,

숨어 있는 나를 먹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였다.

그러다가 어린것이 두 번이나 잡혀서 이른바 의용군인가 하는 데 끌려갔으나 다행히 도망쳐 나왔던 것이다.

동생의 소식이 끊어지고 방위군사건이 터진 후에도 나는 동생이 죽은 것으로 단념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어디엔가 살아 있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를 불안스럽게 간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서울에 환도한 54년에 나는 국방부에 탄원하여 동생의 행방을 알려달라고 요청하였다.

얼마 후에 국방부에서는 전사통지서라는 것을 보내왔다.

“귀하의 자제는 1951년 X월 X일 장렬한 전사를 하였삽기에….”

그것은 단순히 서식을 갖춘 데 불과한 것이다.

“장렬한 전사”가 다 무엇이냐. 동생은 얼고 굶주려서 죽었을 것이다.

드디어 나의 불안한 한 줄기의 희망마저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전사통지서를 받았을 때 나의 가슴은 떨리기만 할 뿐, 오히려 한 방울의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국방부에서 지급되는 전사장금(戰死腸金)이라는 것을 받아서

당숙이 목회하고 있는 원효로의 교회에 종을, 그리고 창신동 낙산교회에 강도상 일습을 기증하였다.

무덤도 없는 그를 위하여 작은 것이나마 어떤 물체를 남겨놓고 싶어서였다.

문자 그대로 무명병사인 나의 동생은 어디서 어떻게 죽었을까?

지금도 차가운 북풍이 휘몰아치면 나는 동생을 생각한다.

얼어 터진 발을 질질 끌면서 행렬을 좇아가다가 펄썩 주저앉는 그의 모습이 아프게 연상된다.

나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다.

음식을 먹다가 남기게 되었을 때 나는 속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저 밥 반 그릇과 저기 남은 찌개와 부침개와 김치….

어느 날 방위군에서 저 정도만이라도 동생이 먹을 수 있었다면 그는 죽지 않았겠지.

그래서 친구들과 담소하며 회식을 하다가도 문득 시무룩해지는 나를 느낀다.

어느 날 아침, 밥상을 받고 앉았는데 아내가 무슨 말 끝에 동생이 즐기던 음식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덤덤히 들었으나 그 순간 목이 메고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아내는 공연한 이야기를 하였구나 하는 표정이었고 아이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였다.

도대체 나 같은 자가 무슨 공덕으로 배불리 먹고 더운 방에서 기거한단 말인가?

그것은 오로지 동생 간영의 공덕이다. 그의 희생 위에 나는 지금 살찌고 있는 것이다.

동생을 생각할 때마다 6•25사변에 나라를 위하여 죽어간 많은 형제들을 추모한다.

살아남은 우리들이 오늘날 이렇게 잘 먹고 편히 잠잘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전몰용사들의 공덕인 것이다.

(19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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