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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머리와 인천 냉면

매루 2019. 1. 25. 20:24



중머리 : 국숫집에서 부엌일 하는 머슴

국수 중머리 : 국수집에서 배달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북한말.







[인천개항장 이야기] 개항장에서 탄생한 인천 냉면

인천일보  2017.06.07





인천 답동 사정옥의 냉면 배달부 (사진출처=부평역사박물관)


현재 개항장 일대에 성행하는 요식업을 꼽으라면 단연 면 요리 전문점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인 노동자 쿨리(苦力)의 애환이 담긴 짜장면은 한국 최초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짜장면박물관이 생겨나기까지 했다.
광신제면 직원의 실수로 우연히 탄생한 쫄면 역시 한국 최초로,
 쫄면을 처음으로 팔았던 신포동의 분식집은 전국 규모의 체인점 형태로 사업을 확장했다.  

마찬가지로 신포동에 본점을 둔 모밀집 역시 맛집으로 자리 매김하며 전국에 체인점을 두고 있다.
한편 개항장의 중심과는 약간 거리가 있으나 화평동의 세숫대야 냉면은
입소문과 미디어를 통해서 화평동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면 요리 중에서 개항기에 가장 사랑을 받았던 음식은 다름 아닌 냉면이었다.

언제부터 인천에 냉면집이 생겨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개항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인천으로 노동자들이 유입되면서 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1896년에 개설된 한국 최초의 선물거래소 인천미두취인소(仁川米豆取引所)를 중심으로 미두꾼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요식업소들이 개업하였는데, 당시 이북식 냉면이 인천에 들어와 인천식 냉면으로 변모한 것으로 보인다.

주로 겨울철에 먹었던 이북식 냉면은 인천에서 사철 내내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재탄생했다.

개항 이후 인천 냉면의 중심지는 지금의 동인천역에서 답동사거리에 이르는 우현로와 경인철도 넘어 배다리였다.

인천 냉면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평양관(平壤館)이 용동에 있었고,

경인관(京仁館)이 용동에, 신경관(新京館)이 경동에, 사정옥(寺町屋)이 답동에 있었다.

또한 금곡동에 풍성관(豊城館)과 인천관(仁川館) 등이 있었다.

보통 냉면 이외에 비빔밥, 장국밥 등의 음식도 판매하였으나 단연 냉면이 인기였다.


당시 냉면집에 와서 식사를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나 평양관과 사정옥 등은 배달 주문이 더 많았다고 한다.

 냉면 배달부들은 일명 중머리로 불렸는데,

중머리들이 냉면 대접을 겹쳐놓은 널찍한 목판을 어깨에 이고 한 손으로 자전거를 끌고 배달하는 모습은 실로 진풍경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냉면 배달은 업주 측면에서는 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하였던 모양이다.

<매일신보> 19301017일자 기사에 따르면

"인천 시내에 있는 조선인 경영의 유수한 음식점인 평양관, 인천관, 사정옥 등 일곱 음식점은 (중략)

수일 전부터 돌연히 협의하여 전화를 폐지하였다"는 소식을 전하며 그 이유를 불경기, 전화료, 배달인부 등을 들었다.

불경기로 인하여 배달 손님이 줄어들자 전화료와 배달인부의 급료 등의 지급이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인천 냉면은 인천은 물론 서울까지 명성이 퍼졌다.

서울 한량들이 경인철도를 타고 인천으로 냉면을 먹으러 오기도 했고,

경인철도를 이용하여 서울까지 인천 냉면을 대량 배달하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개항장에서 탄생한 인천 냉면은 내동의 한 식당에서 명맥을 잇고 있을 따름이다.
인천 냉면의 명성과 중머리들이 냉면을 배달하는 모습들은 이제는 옛 기록 속에서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강병철과 삼태기



강병철과 삼태기(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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