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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장항 제련소

매루 2020. 2. 2. 22:22

 

 

녹슨 전망산과 장항제련소 굴뚝

 

장항은 1929년 갈대 숲을 메워 만든 도시이다.

당시 장항의 도시기반 시설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한 사람은 일본인 카타끼리(片桐)과 미야자키(宮崎)이다.

 

카타키리는 미래의 일본을 위하여 장항에 자기자본을 과감히 투자하였다.

그는 지금의 장항역 부지인 경남 철도 역전 부지를 기부하였으며 장항 사람들을 규합하여 장항번영회를 조직한 일본 식민지 정책의 앞잡이다.

그는 장항뿐만이 아니라 서천, 익산의 지주로써 황등 농장을 소유한 대지주이며 실업가이었다.

그는 서천수리조합 초대 조합장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며,

서천 길산에 대 농장을 소유하여 많은 소작인을 거느린 일제 강점기에 서천의 대표적인 식민지 지주였다.

 

미야자키는 장항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한 일본인이다.

그는 옛 정의 여중고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딴 미야자키 농장을 경영하여 지금도 어른들은 궁기농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의 아들 역시 대를 이어 장항에서 대지주로 활동하였다.

 

이 두 사람은 갈대밭을 지금의 장항으로 만든 주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결국 그들 스스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였다고 말할 정도로 힘겨운 도시 기반 조성 사업을 하였다.

도지사, 군수, 번영회장을 중심으로 영화롭던 장항을 만들었다.

큰 사업으로는 경남선인 장항선 유치, 장항항 구축, 장항제련소 설립 등이었다.

그 후 장항은 "기적소리가 끊이지 않는 희망의 도시",

"밤새 노랫소리로 흥청 되는 장항" 등으로 당시 언론에는 보도되고 있다.

물론 장항이라는 도시는 충청남북도 물자를 오오사카로 운송하기 위해서 일본인들이 만든 항구도시이다.

그러하기에 장항은 식민지 정책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 조성된 일제강점기 수탈의 도시이다.

장항의 대표적인 명물은 단연 장항선, 장항 군산을 오가는 연락선, 일제강점기에 많은 쌀을 실어가던 장항항 그리고 장항제련소가 있다.

이 중 장항제련소는 장항을 상징하는 명물 중의 명물이다.

장항제련소는 1936년에 조선총독 우카키(宇坦一成)가 참석 할 정도로 조선총독부의 관심 속에 조선제련주식회사로 창설되어

원산, 흥남 제련소와 함께 일본인들의 동제련 주생산시설로 사용되었다.

해방 후인 1947년 상공부 직영업체로 국유화되었고 국영기업체로 운영되다 1962년 한국광업제련공사로 재설립되었으며

1971년 민영화되어 현재는 LS에서 운영하고 있다.

장항 제련소는 설립당시 연산 1천5백 톤의 소규모 제련능력을 갖고 있었으나

해방 후 계속 확장되어 1974년 1만 5천 톤, 1976년 5만 톤 규모로 확장되었으며

신설된 온산제련소(연산15만 톤)와 함께 전량을 국내 전기동 사용업계에 공급해왔다.

1989년 LG금속의 업종전환으로 동생산이 막을 내리게 되어 용광로를 폐쇄하게 되었다.

그 후 새 공법에 의해 전기동을 생산하고 있다.

따라서 장항제련소의 상징인 굴뚝은 그대로 남아 있을 뿐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장항제련소의 용광로 폐쇄요인은 아황산가스로 농작물피해 등 환경공해가 날로 심한데다가

공해보상비 및 공해배출 부과금 등 14억 원을 부담해 오다 폐쇄하였다.

장항 제련소가 번창할 때는 노동자가 1,200명에 이르러 장항의 경제에 활력소가 되었는데

지금은 회사원의 감축으로 옛 영화만이 장항제련소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장항제련소의 발전은 1937년 개항한 장항항이 1964년 국제항 승격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즉 장항제련소의 물동량이 80%를 차지할 만큼 장항의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장항제련소 굴뚝은 해발 210m 로 한때 항해와 항공의 목표물로 쓰이기도 했고

해방 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우리 나라 산업의 상징이었다.

이 굴뚝은 6․25 전쟁 때는 주요기간 사업체로 공격 목표가 되기도 했고

인천상륙작전시에는 유엔군이 상륙장소를 숨기기 위해 군산 쪽에서 위장함포를 쏘아(양동작전)대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또 9․28수복 후에는 군산 비행장에 주둔한 미군들로부터 활주로가 짧아 비행기가 이륙할 때 걸릴 우려가 있다하여

한때 헐릴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후 1979년에 일제가 건립한 굴뚝을 헐어 버리고 다시 재건축을 하여 지금도 그 옆에 흔적이 남았다.

장항지역의 붉은 벽돌집이 많은 이유는 바로 장항 제련소 덕분이다.

제련과정에서 나오는 광석의 찌꺼기(슬래그)로 벽돌을 만들어 판매하였기에 서천 지역에는 붉은 벽돌집 담 등이 많은 것이다.

특히 1955년 4월 21일 이승만대통령 전쟁 후 피해 복구 현황을 청취하기 위하여 방문한 적이 있으며

1961년 7월 박정희 최고의장이 장항 제련소를 시찰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일제가 장항을 개발한 속셈은 무엇일까?

첫째, 1899년 개항한 군산 항을 통하여 쌀을 유출하려면 시간과 임금소요가 많게 되자 장항을 개발하여 그 수탈 기지로 삼게 된 것이다.

즉 1918년 일본에서 쌀값이 폭등하여 일본 각처에서 쌀 소동이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일본에서는 조선 쌀이 요구되었다.

총독부에서는 1920년 조선인들에게 토지를 개량하게 하는 한편,

경종법(耕種法; 작물의 선택 배치 및 심는 순서를 정해 줌)을 만들어

쌀의 증산을 도모하여 한국 쌀을 일본으로 유출하는데 혈안이 되고 있었다.

충남일대와 경기일대의 미곡을 경남철도(장항선)를 이용하여 장항에 운송하고

이곳에서 도정하여 장항 항을 통하여 일본으로 반출하였던 것이다.

 

둘째, 광업 자원의 수탈 기지였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는 회사령을 철폐하고 회사의 설립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변경하였다.

이것은 성장하여 가는 일본의 자본주의가 제1차 대전의 전쟁 경기를 지나고 난 뒤에

유리한 자본투자의 시장을 조선에서 발견하였기 때문인데

허가제의 까다로운 절차를 없애고 손쉽게 회사를 설립하도록 신고제로 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조선에서 막대한 공업 자원을 생산하고 비약적인 광업 발전을 꾀하였다.

특히 금광(金鑛)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일본이 금(金)생산에 중점을 둔 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다.

그것은 1937년 7월에 중국 대륙침략을 앞두고 전

쟁에 필요로 하는 석유, 제철, 공작 기계 등을 미국 등 여러 나라로부터 수입하는데 금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세워진 공장이 1935년 기공한 장항 제련소이다.

여기에서는 주로 금을 생산하게 되었던 것이다.

1930년대 장항은 서천의 경제적 중심지로 변모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각지에서 삶의 개척을 위하여

새로운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여 신도시가 되었다.

그래서 1920년대 서천 길산 중심의 경제권에서 벗어나 장항은 항만과 제련산업을 통한 산업도시이며

미곡의 집산지로 도정업이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결국 장항은 일제의 수탈 정책에 의해서 조성된 신도시이며 일제시대에 명성을 얻은 도시이다.

최근 장항은 1993년 금강하구둑 완공으로 더욱더 황폐화되어 가고 있다.

장항과 군산을 잇던 도선장 주변의 쇄락은 장항의 변화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이에 장항사람들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발버둥이 한창이다. 크

게는 국가산업단지의 즉시 착공과 장항소도읍가꾸기 사업의 성공,

그리고 항구의 장점의 살린 물량장과 재래시장의 활성화 등은 장항 사람들이 절규하는 모습이다.

이에 더불어 어떻게 하면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도 끊이질 않고 있다.

장항제련소 옆 송림 백사장의 관광화 그리고 바다 체험 프로그램 개발,

아직은 실시되지 않고 있지만 아구찜 축제, 서해안 조기, 칼치, 박대 조림 축제 등이 기대되고 있다.

장항의 관광화와 더불어 2005년 장항제련소 굴뚝을 문화재로 지정하자는 의견과 일제의 잔재로 철거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장항의 상징인 장항제련소 굴뚝을 문화재를 지정되어야 한다는 의견과 식민지 잔재로서 철거해야 마땅하다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공장측은 “사용하지 않는 시설을 문화재로 지정하면 설비 투자 제약과 국내외 투자유치에도 지장을 줄 것”이라며

“현재 경관녹지로 지정 된 상태에서도 굴뚝의 보존은 충분하다”며

문화재지정을 반대하고 있다. 요즈음은 문화재 지정 논의가 잠잠한 상태에 있다.

필자는 한국 근대 산업시설로써 가치뿐만 아니라 장항의 상징물로서 문화재로서 보존가치가 있다고 본다.

장항제련소 굴뚝 철거를 반대한다.

장항제련소 굴뚝은 장항선을 달려온 기차 승객에게는 종착역 장항이라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항의 상징물이며,

만선의 기쁨을 가지고 항구로 돌아오는 선원에게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군산 사람들에게는 북쪽을 바라볼 때마다 한번쯤 가보고 싶은 욕구를 자아내게 하였던 명물이다.

그리고 가까운 서천, 부여, 보령 사람들에게는 어린 시절 소풍을 왔던 추억의 장소이다.

장항제련소 굴뚝에 올라가 보라!

1979년 이전에 세워진 굴뚝 둘레에 빼꼽이 새겨진 이름들은 제련소 노동자의 향수를 토해내고 있는 듯하고,

갑돌이와 갑순이식 이름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소풍 온 학생들의 짓궂은 연애담도 흘러나오는 듯하다.

가만히 굴뚝에 귀를 기대어 보면 옛 노동자들의 말소리가 일본말인지 한국말인지 윙윙거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향수를 느끼게 한다.

마침 굴뚝 아래 얼마 전까지 있었던 분초에서 바라본 굴뚝은 까마득한 군생활의 지루함을 절감하게 하였다.

움푹 들어간 분초에서 바라본 굴뚝의 높이는 남은 군대생활 만큼이나 높기만 하였다.

장항제련소 굴뚝이 위치한 지역은 해발 210m로 예전부터 '전망산'이라 불러 왔다.

하나의 바위산으로 이루어진 전망산은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산이다.

산 정상에는 제련소 용광로의 온도를 높이 끌어올리기 위해서 일제강점기에서 세웠던 90m 굴뚝의 잔해가 10여m가 남아 있으며

약 10여m 떨어져 1979년에 세운 높이 110m 짜리 굴뚝이 있다.

물론 그 앞에는 기념비가 녹이 슨 채 우뚝 서 있다.

장항 제련소 굴뚝에서 바라본 금강은 한눈에 군산과 장항 사이를 오가는 배를 관측할 수 있다.

또 멀리 서해에서 접근해 오는 배의 동태를 파악하는 데 유리한 장소이다.

그리고 장항국가산업단지 예정부지가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너프러져 있다.

그래서 앞의 바다와 강을 관측하기에 좋은 산이며 동시에 후망산의 앞산이라 전망산(前望山)이라는 이름이 전해오고 있다.

그렇다면 장항제련소 굴뚝이 세워지기 전에도 이미 이곳에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어 주변을 조사하여 보았다.

굴뚝이 세워진 주변은 이미 굴뚝 공사로 대부분 훼손되어 그 원형은 살펴볼 수 없지만

그 지형의 형태로 보아 건물을 세우기 위한 축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되었다.

이를 시사하듯 주변에는 유물이 산재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 제련소 굴뚝에서 휘날린 연기의 영향으로 시커먼하게 변색되어 있지만 기와, 토기, 자기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를 살펴 볼 때 백제시대부터 전초기지인 망루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고려시대에는 기와로 지은 보호시설이 있어 이곳에서 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전망산은 망루로써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고 최근까지 분초가 있을 정도로 군사적 요충지로써 기능을 하여 왔다.

장항제련소 굴뚝에 올라가는 길은 장항도선장에서 바다쪽으로 쭉 뻗은 도로를 따라 장암진성 굴다리를 통과한 다음

산업도로 끝까지 가면 전망산이 왼쪽에 있다.

전망산 정상에 우뚝 솟은 굴뚝을 향하여 눈을 돌린 다음 굴뚝에서부터 자기가 서 있는 곳까지 일직선을 그어 그길을 따라 올라가면 된다.

바위산이기에 미끄럼을 주의해야 한다. 또한 주변지역이 온통 절벽으로 위험하니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

(20070320)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에 있는 종합비철금속제련소.

                               

일제강점기인 1936년 조선제련주식회사로 설립되어 공장조업이 개시된 이래

우리 나라 비철금속제련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여왔다.

초기에는 동제련공장만이 설치, 운영되어왔으나, 광복 이후 1964년에는 연제련공장이 준공되었으며,

1974년과 1976년에 동제련공장이 2차에 걸쳐 증설되었다.

1983년에는 귀금속공장을 온산제련소로 이전하였고 1984년에 주석(朱錫)제련공장을 준공함으로써

동·연·주석의 전문제련소가 되었다.

1988년 6월 동파이프공장을 준공하였으며,

1989년 6월 용광로공정을 폐쇄하고 반제품을 처리하여 전기동(電氣銅)을 생산하는 공정으로 전환하였다.

1989년 11월 스테인레스파이프공장을 준공하였고, 1990년 5월 연제련공정을 폐쇄하여 가공산업공정으로 전환하였다.

모든 설비가 완전자동화되고 있으며, 특히 주석제련공장은 첨단기술의 경제적인 설비와 공정으로 운영되었다.

1989년 6월 주식회사 럭키금속의 장항공장으로 운영되었다가 1995년 엘지(LG)금속 장항공장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후 1999년에 엘지(LG)산전 장항공장으로, 2005년에는 엘에스(LS)산전 장항공장으로 변경되었다가

2010년에 엘에스(LS)메탈 장항공장으로 최종 변경되었다.

2012년 11월 충청남도와 서천군, 엘에스(LS)메탈은 대전 충남도청에서 2014년부터 3년간 2,000억원을 들여

 옛 장항제련소 안 6만 6,000㎡ 터에 동합금 압연소재 부품공장을 신설하는 것을 뼈대로 하는 투자유치협약(MOU)을 맺었다.

 

하늘에서 본 1945년의 장항제련소 일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9일 미국 해군이 항공 촬영한 충남 서천군 장항읍 장항제련소 일대의 모습.

 이 사진은 미국 톨레도대학의 데이비드 네메스 교수가 1980년대 후반 제주대에 기증했으며

최종적으로 지리교육전공 오상학 교수가 공개했다

            

충남 서천군 장항제련소의 옛 모습. 장항제련소는 1936년 가동을 시작했으며 1989년 용광로가 폐쇄될 때까지 가동됐다. 환경부 한국환경공단은 옛 장항제련소 주변에 대한 중금속 토양오염 정화사업의 하나로 토양복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연합
                                 충남 서천군 장항제련소의 옛 모습.                        
    장항제련소는 1936년 가동을 시작했으며 1989년 용광로가 폐쇄될 때까지 가동됐다.

 

 

환경부 산하 한국환경공단은 1일 충남 서천군 옛 장항제련소 인근 송림숲 일대에

국내 최초 '위해성 저감조치 대안공법'을 적용한 토양복원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1936년 첫 가동을 시작한 장항제련소는 용광로가 폐쇄된 1989년까지 제련소 운영과정에서 발생된 오염물질로

 주변 지역의 환경 피해가 지속적으로 문제가 돼 왔다.

사진은 장항제련소 가동 당시 모습. (환경부 제공) 2017.10.1/뉴스1

juani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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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2016-08-11

 

 
 
 장항 나루터에서 몸을 푸는 최관수 감독과 선수들(1970년대 중반).

장항 나루터에서 몸을 푸는 군산상고 야구부 최관수 감독과 선수들(1970년대 중반).
최관수 감독이 재임한 10년 동안(1970ㅡ1979) 군산상고는 '역전의 명수'로 재탄생하면서 전국규모 대회에서 놀라운 성적(우승 6회 준우승 5회)을 기록한다. 그는 군산상고뿐만 아니라 호남야구와 한국프로야구에도 커다란 행운을 안겨주었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역전의 명수들이 1982년 출범한 해태타이거즈 주축을 이뤘고, 전국 각 지역에 많은 팬을 확보했다. 해태는 그 저력을 바탕으로 한국프로야구 최강팀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by ja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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