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자유공원 망루 본문
홍예문은 일제강점기 때 인천의 남북 간 교통 불편을 해소한다는 명분(실제로는 영역확장과 원활한 물자수탈 목적)으로
일본 공병대가 조선인과 중국인들을 동원하여
암벽을 폭파하는등의 3년의 난공사기간을 거쳐 1908년에 완공한
도로폭 4.5m, 높이는 13m, 통과 길이는 13m의 터널 입니다
조선인들은 문의 윗머리가 무지개처럼 둥글기에 ‘무지개 문’이란 뜻의 ‘홍예문’이라 불렀지만
일본인들은 이문을 산의 혈(穴 : 구멍)을 뚫었다고 하여 ‘혈문(穴門)’이라 불렀읍니다
영문으로는 제물포의 관문으로 소개되어 있읍니다
난공사의 흔적은 조선인들의 거주지가 있는 홍예문의 북쪽입구에 쪼아내다 내버려둔 거대한 암석의 뿌리로 지금도 남아 있는데
축대를 쌓아 깨끗이 정돈을 해놓은 일본인들의 거주지쪽인 홍예문의 남쪽벽과 비교가 됩니다
일본인들의 거주지(중앙동일대)쪽에서 바라다본 홍예문
조선인들의 거주지(전동)쪽에서 바라다본 홍예문
1960년 전후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사진으로 홍예문 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사진 오른쪽에 인천기상대 건물이 보이고 그아랫쪽에는 인천중,제물포고등학교의 교사(校舍)가 보입니다
그리고 사진 왼쪽에 망루(望樓)가 있읍니다
1924년 3월에 세워졌다는 이 망루에는
싸이렌을 울리던 확성기(정오 또는 통행금지가 시작되는 자정을 알리는)가 보이고
꼭데기에는 화재발견을 위한 소방관이 머무는 공간이 있읍니다
제가 초등학생때에 이모님과 함께 자유공원에 몇번 나들이를 갔던적이 있읍니다
그때 이모님 께서는 이망루를 바라보시면서 용남이형(북에 있는 이모님의 아들) 이야기를 하셨었읍니다
황해도 장연이 고향이신 이모님 께서는 인천의 이천전기에 근무를하고 계시던 이모부와 결혼을 하셨는데
일제시대에 명문으로 알려져있던 평양근처 대동강 하류의 진남포상공고를 졸업하신 이모부 역시 황해도 장연이 고향 이셨다고 합니다
결혼후 이천전기의 관사에서 생활을 하시던 이모님 께서는
첫자식 이었던 용남이형(1945년생)을 데리고 관사 근처에 있는 자유공원으로 산책을 다니셨는데
어느날 용남이형의 모습이 보이질 않자 적지않게 당황을 하며 용남이형을 찾던 이모님의 눈에는
이사진속의 망루 중간쯤을 오르고있는 용남이형을 볼수있었읍니다
그리고 그해 늦은봄에 이모님은 용남이형과 친정(황해도 장연)나들이를 가셨다가
친정 어머니와 용남이형의 성화에 못이겨 용남이형을 친정에 두고 인천으로 돌아오셨는데
그로부터 얼마후 일어난 6월의 한국전쟁통에 이모님과 용남이형은 오랜(아직 까지는) 이별이 되고 말았읍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전까지 중앙대학교에 다니시던 저희 어머니 께서는
고향집(황해도 장연)을 떠나 언니(저의 이모님)네 집에서 지내며 통학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모님댁에서 서울행 기차를 타려면 기상대옆을 지나 제물포고등학교 철조망 담장을 끼고
자유공원을 벗어나 옛 축현초등학교앞을 지나 동인천역까지 걸으셨겠지요
사진속의 망루도 어머니의 통학모습을 숱하게 지켜보았을 겁니다
Los Tres Diamantes
이모님, 인애누나 나, 가족 이야기
동영상속의 5만원권 지폐들(30만원)은 이모님께서 밥갔 이라며 저희부부에게 주신 돈 입니다
전쟁 미망인이신 올해 93세의 저희 이모님의 고향은 황해도 장연 이라는곳 입니다
부잣집딸로 태어나셔서 저에게는 외삼촌이신 오빠와 함께 일본에서 유학생활도 하신
당시로서는 신여성(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신식 교육을 받은 여성) 이셨지요
혼기가 되자 대동강 하구에 있는 명문 진남포상공학교 졸업후 인천의 이천전기에 근무하고있던
같은고향출신의 이모부와의 결혼후 인천에서 생활을 시작하셨고
당시 중앙대학교 학생이셨던 저의 어머니께서는
고향인 황해도의 장연보다는 인천의 언니(저의 이모님)집이 통학에 유리하였기에
인천과 어머니의 인연이 그때 시작이 되셨던 것 이지요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이산가족들을 양산 하였는데
당시 28세로 두아이(저에게는 이종 사촌)의 아버지 이셨던 이모부께서는
2개월의 군사훈련후 육군소위로 참전을 하셨다가 전사 하셨고
이모님 께서는 전쟁전에 친정 나들이를 갔다가 두고온 용남이형(저의 이종사촌형님이자 이모님의 아들)과 생이별을 하셨습니다
한국전쟁은 부잣집 막내딸로 황해도 장연 이라는 벽촌에서
해주행정고녀를 거쳐 서울의 중앙대학교에 진학을 하셨던 저의 어머니를 졸지에 고아로 만드는 불행을 야기 하였습니다
휴전이된후 인천에 둘이 남은 자매 (저의 어머니와 이모님)께서 치르셨을 갖은 고생들을
제가 어찌 헤아릴수 있을까요 ?
신여성 이셨기에 가능했던 영어소통은 이모님이 미군부대에 일자리를 얻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이모님 께서는 당시로서는 수입이 괞챦았던 미군부대의 보수를 1949년생 딸(저의 이종사촌 누나))의 교육에 투자 하셨습니다
![](https://blog.kakaocdn.net/dn/cq2RGe/btqVHXgkHly/3rNbYeGKWxgrn3cubqhjOk/img.jpg)
1957년 준공후 1968년에 인성여중고의 체육관이 된 1960년대의 시민관 모습 입니다
한국전쟁이 끝난후 저희 부모님 께서는 저의 초등학교에 입학전후인 1959년 부터 1961도까지
당시 인천의 대표적인 피난민촌들중의 한곳 이었던 독정이에서 강냉이죽 급식소를 운영 하셨었읍니다
제가 가지고있는 저희가족들의 독정이 급식소 시절의 수많은 기억괴 추억들 중에는
인애누나(이모님의 딸)에 대한 기억과 추억들도 제법 많습니다
인애누나는 중학생때 이곳 시민관에서 열렸던 인천시내 중고생 피아노콩쿨대회에 참가를 했었고
판잣집촌 이었던 독정이에 살던 제가 이모님과 함께 누나의 연주를 응원차 왔던 시민관의 규모와 많은사람들 때문에
지금도 저의 머리와 가슴에는 그때의 기억들이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그때 누나는 피아노독주와 연탄(聯彈 한 대의 피아노로 두 명의 연주자가 하는 연주)에 참가를 했었는데
어린 저의 기억에는 연탄 이라는 말이 신기 하였고
콩쿨대회가 끝나고도 그후 1년여동안
"다음 순서는 박문여지중학교 윤인애양과 XXX양의 피아노 연탄이 있겠읍니다"라며 사회자의 흉내를 내어
이모님, 인애누나 그리고 저희가족들을 웃게 만들곤 했었습니다
오늘 주말을 이용하여 가족들이 영흥섬에 들어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알기엄마(목사동생의 부인)께서 이모님과 인애누나를 모시고 오셨습니다
올해 연세가 93세이신 이모님 께서는 이제는 저희집안의 유일한 제 1새대 어르신 이십니다
제가 동인천중학교에 입학을 했던 1967년도에 박문여고 졸업후 이화여대에 진학을 한후
경인선 통학열차안에서 남학생들 사이에 인기짱 이었던 인애누나 역시 올해 나이 70의 노인이 되어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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