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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부평 제10 포로수용소

매루 2018. 5. 6. 11:01




한국전쟁중 반공포로 석방 당시(1953년 6월 18일 0시) 총 1,486명의 포로가 수용되어 있던 인천의 부평수용소는

 최대 14만 명을 수용한 거제도수용소나 3,000~10,000명 정도를 수용한 여타 수용소에 비해 작은규모의 포로수용소 였는데

반공포로 석방당시 8개 수용소에서 탈출하다 숨진 61명의 포로 중 47명이 부평수용소에서 발생하였읍니다


1953년 6월 18일 0시에 치러진 반공포로석방당시 포로수용소별 반공포로 석방 현황 

출처 : 국방군사연구소에서 발간한 <한국전쟁의 포로>




부평에 있었던 포로수용소

1951년 여름을 넘기며 6·25전쟁이 소강상태로 들어가자 포로관리도 서서히 체계가 잡히기 시작하였다.

최전선에서 잡힌 포로는 전방에 설치된 포로수집소를 거쳐 후방 각지의 수용소로 보내져 관리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자료를 보면 키스테이션이라 할 수 있는 거제도 제1수용소를 비롯하여

부산 거제리, 부산 가야리, 영천, 대구, 광주, 논산, 마산, 부평 등 총 9개의 수용소가 운영되었다


당시 생포된 공산군 포로들이 어떤 기준에 의해 수용소가 나뉘어졌는지는 남아있는 자료가 빈약하여 확실히 알 수 없다.

어쨌든 도시 규모의 거제도수용소 말고도 중소규모의 수용소가 전국 각지에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부평에 있던 제10수용소는 지리적으로 가장 전방에 설치된 수용소였다.

부평수용소가 정확히 언제 설치가 되었는지는 자료에 나와 있지 않지만 1951년 중순 이후인 것으로 추정된다.

전황을 분석하여 보았을 때 적어도 중공군의 제6차 공세가 실패하며 전선이 현재의 휴전선 일대를 중심으로 고착화 된 이후에나

그곳에 수용소설치가 가능하였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LIFE지 기자인 라우저(Michael Rougier)가 1953년 5월 경 촬영한 부평수용소의 사진을 보면

 시설 대부분이 새 것이고 공사가 계속되는 점 그리고 마지막 번호인 제10수용소로 지정된 점을 고려할 때

 1952년 이후에 설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반공포로 석방이 있기 직전에 촬영된 부평 제10 포로수용소. 현재의 부영공원 자리


사실 인천은 공산군 포로 수용과 관련하여 인연이 많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후 월미도에 수용소가 처음 만들어졌는데 바로 전사에 종종 등장하는 인천수용소다.

 하지만 이는 부평의 제10수용소와 전혀 관련이 없는 임시 시설로 1·4후퇴 이후 기능이 사라졌다.

이와 별개로 인천에는 선편을 통해 부평수용소가 아닌 후방으로 이송할 포로들을 임시로 수용하던 시설이 인천항 부근에 있었다



1950년 인천상륙작전 직후 월미도 위락 시설에 임시로 설치된 포로수용소.

이는 이후 설치된 부평의 제10 수용소와 관련이 없다./사진=국립중앙도서관




부평 제10포로수용소가 위치한곳은 현재 산곡동의 대단위아파트단지와 반환예정의 비군부대부지 사이에있는 부영공원자리로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현대식 군사시설이었다



휴전 직후 촬영된 부평 미군기지의 모습. 구내에 비행장까지 있던 엄청난 규모로

1973년 까지 애스캄(ASCOM)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다.

이후 해체되고 많은 부분이 반환되었지만 제빵공장을 비롯한 일부 시설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사진=미 육군



중일전쟁을 치르던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한 배후 기지로 이용하고자 1930년대 말 부평에 육군조병창을 설치하였다.

 이는 일제가 본토 이외에 유일하게 설치한 무기 제조 공장이었을 만큼 상당한 전략시설이었다.  

1945년 일본 패망 후 미군이 진주하면서 이를 지원 시설로 이용하였고 1949년 미군 철군 후에 국군 병기대대가 접수하여 사용하였다.

전쟁이 발발하고 미군이 참전하며 다시 미군기지가 되었고 이때 포로수용소도 설치되었다.

미 제44공병단이 자리 잡은 북쪽 공터에 수용소가 들어섰는데

당시에 이곳은 동쪽과 남쪽으로 여타 미군 기지들이 몰려있고 북쪽과 서쪽은 드문드문 민가가 있던 허허벌판이었다.

 따라서 기회만 잘 포착한다면 포로들이 안전하게 탈출할 가능성은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반공포로 석방이 있었던 8개 수용소 중에서 수용 인원도 두 번째로 적었던 부평수용소에서

대다수의 사망자가 나오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역사적인 반공포로 석방 당시에 8개 수용소에서 탈출하다 숨져간 61명의 포로 중 47명이 부평수용소에서 발생하였지만

사실 이런 참혹한 결과는 충분히 예견되던 사항이기도 했다.

따라서 여타 수용소와 달리 부평수용소에서의 탈출은 감행하지 말았어야 했다.

비극을 잉태한 가장 큰 이유는 부평수용소의 경비 체계가 여타 수용소와 구조적으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부평 제10포로수용소가 있었던 부평(산곡3동)의 부영공원

많은 곳이 반환되거나 택지로 개발되었지만 아직도 주변에 군 시설이 위치하고 있을 만큼 오래된 군사요충지였다 





20세기 고통를 받았던 인류의 아픔을 기록한 사진들을 모아

영국의 페이돈 출판사가 1999년에 펴낸 화보집인 「센추리(CENTURY)」에 수록된.

작가 미상(1950)의 . 「한국군에 포로가 된 북한군, 아마도 살아났을 가망은 없었을 것이다」 촬영 장소 미상.

북한군으로부터 빼앗은 소련제 장총과 M1소총을 둘러멘 나이 어린 국군의 의기양양한 모습과

손에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리면서 끌려나오는 한국군의 형님뻘쯤 돼 보이는 나이가 든 북한군의 공포에 질린 표정이 대조를 이룬다.

제2차 세계대전 후 美·蘇에 의해 양분된 조국을 무력으로 통일시키려 했던

金日成의 야욕이 저지른 동족상잔의 비극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사진이다.









 

인천 상륙 작전 당시 월미도에서 UN 군에 항복하는 북한 인민군 - 1950년 9월




















한국 6.25 전쟁 당시 지리산 빨치산 간호병으로 활동하다 붙잡혀

전라북도의 포로수용소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김봉숙 - 1952년 11월  

당시 18세였던 이 여성은 전장에서 두 명의 국군 부상병을 정성껏 치료해준 일이 밝혀진 덕분에 정상이 참작돼 풀려났다. 




1950. 8. 18. 가장 나이 어린 북한 소년병 포로, 그의 이름은 김해심,

가운데 통역 이름은 이수경으로 표기돼 있었다. ⓒ NARA







1951. 12. 27. 거제포로수용소 전경,

1950년 11월 27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한국전쟁 중 인민군 15만여 명,

중국군 2만여 명 최대 17만 3천여 명의 포로를 수용했던 곳이다



https://blog.naver.com/ohyh45/221269494451






거제도 포로수용소 소장 도드 피랍


 

1951 7월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이 2년이나 지속된 것은 포로 때문이었다.

유엔군측이 발표한 북한군 포로는 132400여명(중공군 포로 2700명 포함)이었고

북한측이 발표한 유엔군 포로는 1개월 전 평양방송을 통해 주장한

65000여명에 훨씬 못 미치는 11500여명(유엔군 4400여명 포함)이었다.

 

문제가 된 것은 포로송환이었다.

유엔군측이 인도주의적인 점을 강조한 자유송환 즉 원하는 포로만 북한으로 보낸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북한측은 1949년 제네바협정이 규정한대로 자동송환 즉 모든 포로를 북한으로 송환하라는 주장을 폈다.

북으로 송환되기를 원하는 포로가 7만 여명뿐 이라고 유엔군측이 북한에 통보하면서 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거제도에 수용돼 있던 포로들도 친공ㆍ반공포로로 갈려 유혈사태를 빚고 있었다.

 더구나 북한측은 공작원들을 포로로 잠입시켜 수용소 내 친공포로들을 배후 조종하며 반공포로들을 대상으로 협박과 테러를 일삼았다.

 

거제포로수용소 포로들이 분뇨와 오물을 수용소 밖 쓰레기장으로 운반하고 있다. (1952. 3. 20)

거제포로수용소에서 친공 포로들이 정치구호나 그들의 요구조건을 적은 플래카드들 수용소 내에 내걸어두고 있다.

(1952. 3. 20)

철조망이 2, 3중인 거제포로수용소(1953. 4. 13.).

 

이로 인해 크고 작은 폭동이 빈발하던 1952 57, 거제도 제76포로수용소장 도드 준장이

친공포로들에게 납치ㆍ감금되는 포로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발생했다.

수용소 철조망 밖에서 포로들과 면담을 하던 중 치밀한 친공포로들의 계략에 의해 수용소 안으로 끌려간 것이다.

 

1952 5 7, 도드(Dodd) 준장은 제76구역 포로들이 처우에 불만을 품고 포로수용소장 면담을 요청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도드 준장 보좌관은 포로들의 과격한 행동을 우려한 나머지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도록 포로수용소장에게 건의했다.

 하지만 도드 준장은 보좌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약속시간에 제76구역 출입구에서 직접 포로대표들과 면담했다.

그런데 면담 도중 갑자기 포로들이 그를 에워쌓다. 곧 포로들은 순식간에 도드 준장을 납치하여 포로수용소 안으로 끌고 갔다.

 

당시 수용소 소장 도드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이 사태를 긴급 보고받고, 즉각 콜슨 준장을 새 거제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했다.

친공 포로들은 도드 준장 감금에 성공하자 콜슨 신임 포로수용소장에게 도드 석방의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그 요구조건은 포로수용소 내에서 유엔군 기간병들의 포로에 대한

야만적 행위 중지, 포로 자유송환 중지, 포로 강제분리 심사 금지, 포로대표단 인정 등이었다.

 

콜슨 소장이 그들에게 포로 자유송환 문제를 제외한 나머지 요구조건을 다 들어주었다.

그러자 친공 포로들은 도드 준장을 풀어주었다. 도드가 감금된 지 3일만이었다.

 

도드 준장이 석방되자 유엔군사령부는 그의 실책을 추궁했다.

그와 함께 사태 수습을 맡았던 콜슨 준장도 너무 큰 양보를 하였기에 포로수용소장으로 신중치 못한 처사라 하여 그 책임을 물었다.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즉각 콜슨 포로수용소장도 해임하고, 그의 후임에 보트너 준장을 새 거제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했다.

그런 뒤 도드 납치진상조사단의 보고를 받은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곧 도드와 콜슨 두 준장을 대령으로 강등하는 불명예 조치를 내렸다.

 

도드 준장 석방요구 조건으로 의외의 수확을 얻은 포로들은 더욱 기세 등등해졌다.

그들은 수용소 내에 인공기를 게양하고, 김일성과 마오쩌둥 사진을 내거는가 하면, 포로수용소 곳곳에 미군을 모욕하는 플래카드를 걸었다.

 

 

신임 보트너 준장은 이에 분개하여 공수특전단을 포로수용소에 투입하는 강경책을 폈다.

공수특전단은 탱크를 앞세우고 수용소 안으로 들어가 포로들이 게양한 인공기를 모두 내렸다.

그런 뒤 친공 포로를 500명 단위로 강제로 분산 수용하여 그들의 조직을 무력화시켰다.

또한 그들이 거부한 포로송환 심사도 받게 했다.

보트너 신임 포로수용소장의 강경책 이후 포로수용소 내에서 인공기나 중국기가 게양되는 일은 차츰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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