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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선생과 공주 마곡사

매루 2018. 1. 1. 15:21

 

 

 

 

평소처럼 인터넷을 이용하여 좋아하는 노래들을 검색하여 감상을 하다가

노래 당신은 모르실거야(혜은이)가 실린 동영상속에 나오는 절의 가을풍경에 빠져 들었읍니다

동영상속의 절은 김구선생의 이야기로도 알려져있는 충남 공주에 있는 태화산 마곡사 입니다

 

 

 

 

마곡사는 동학 신도였던 김구선생께서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일본인 장교 쓰치다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나루에서 죽인후 사형수가 되어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 탈옥한 뒤

승려로 위장하고 숨어들었던 곳으로 선생은 마곡사에서 원종이라는 법명으로 승려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광복 직후 마곡사를 찾았을 때의 느낌을 선생은 ‘백범일지’에

 “48년 전에 중이 되어 굴갓 쓰고 염주 걸고 바랑 지고 출입하던 길로 좌우를 살펴보며 천천히 들어가니,

의구한 산천은 나를 반겨 주는 듯하다.”라고 썼다.

하룻밤을 마곡사에서 묵은 선생은 이튿날 아침

 “영원히 잊지 않는다는 기념으로 무궁화 한 그루와 향나무 한 그루를 심고 마곡사를 떠났다.”

(‘백범일지’ 하권에서) 1946년의 일이다.

 

 

 

 

백범 김구 선생과 마곡사의 인연 - 스물 셋 청년 김구, 스님이 되다

금강일보 (2010.09.15  이미선 기자)

                   

 

 

“가장 인상 깊고 신세진 곳이 마곡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은 1945년 해방 후 마곡사와의 인연을 위와 같이 회고하며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백범 김구 선생과 마곡사는 어떤 인연이 있었을까?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에 위치한 마곡사에는 요사채 ‘백범당’을 비롯해 ‘삭발바위’와

해방 이후 하룻밤을 묵었던 `염화실‘, 기념식수인 ’향나무‘, ’백범 명상길‘ 등 백범 김구 선생의 발자취가 가득하다.

 

 

 ◆ 마곡사에서 출가, 해방 이후 재방문, 49재까지....

알려졌다시피 백범 김구(1876~1947)는 1896년 황해도 안악에서 일본군 장교를 살해해 감옥에 갇혔고,

탈옥 후 전국의 산사를 돌다가 마곡사에서 삭발염의하고 부처님의 제자가 됐다.

이때가 1898년, 그의 나이 23세였다.

당시 법명은 원종(圓宗) 이었으며, 하은(荷隱) 스님을 스승으로 모셨다.

출가 전에 이미 하동의 쌍계사, 공주 갑사, 동학사 등에서 은신했던 백범 김구 선생이 마곡사에서 출가를 결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13일 마곡사를 찾아 만나본 남태규 마곡사 종무실장 등 관계자들은 “삭발 자체가 위장 #8231; 변장 이었다는 설도 있고,

이미 동학 접주까지 할 정도로 박식했던 김구 선생이 여러 절을 돌아다니며 불교의 교리에 심취해 삭발을 결심 했다는 얘기까지 다양하다”며

 “각종 고서에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 중의 하나로 꼽히는 마곡사의 기운도 영항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다”며 웃음을 지었다.

백범일지에는 그의 출가에 대해 ‘사제 호덕삼이 머리털을 깎는 칼을 가지고 왔다.

 냇가로 나가 삭발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 위로 뚝 떨어졌다.

이미 결심을 하였지만 머리털과 눈물이 뚝 떨어졌다.’라고 기록돼 있다.

당시의 착잡한 심경과 회한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속세와의 연을 끊은 자리에서 눈물을 보였어도 백범은 엄격하고 철저한 수행과정을 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태규 종무실장은 “불교신문 등에 따르면 김구 선생님은 장작을 패고 물을 깃는 등 착실한 행자 생활은 물론

각종 불경들을 공부하며 수행자로서 위의(威儀)를 갖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마곡사에서 출가한 김구 선생은 아버지의 강력한 권유로 환속해 교육사업과 구국운동 등을 펼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직을 맡아 주석 자리까지 오르며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다.

환속으로 김구 선생과 불교계와의 인연은 끊어진 듯 보이지만

해방 이후 귀국해 ‘가장 인상 깊고 신세진 곳이 마곡사’라고 회고하며 1946년 직접 마곡사를 찾아 각별한 인연을 기념했다.

백범일지에도 마곡사를 찾았을 당시 상황이 자세히 기록돼 마곡사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백범일지에는 “해방 후 마곡사를 찾았을 때, 마곡사 승려대표가 공주까지 마중 나왔고,

마곡사 동구에는 남녀 승려가 도열하여 지성으로 나를 환영하니,

옛날에 이 절에 있던 한 중이 일국의 주석이 되어서 온다고 생각함이었다”

“48년 전에 머리에 굴갓을 쓰고 목에 염주를 걸고 출입하던 길이 예와 같거니와 대웅전에 걸린 주련도 옛날 그대로였다”면서

 “용담스님께 ‘보각서장’을 배우던 염화실에서 뜻 깊은 하룻밤을 지냈고, 승려들은 나를 위하여 이날 밤에 불공을 드렸다”고 기록돼 있다.

 특히 ”50년 전에 같이 고생하던 승려가 하나도 없어 슬프다”며 기념으로 마곡사 경내에 향나무 한그루를 심었으며

 “마곡사 법당 앞 사리탑을 중수하고 그 앞다리를 백범교(白凡橋)라고 고치겠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지지만

 1949년 6월 서울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저격으로 세상을 뜨면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1949년 8월 백범의 49재도 마곡사에서 치러지며 마지막까지 마곡사와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

 

 ◆ 마곡사에서 되살아나는 백범

김구남태규 종무실장은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에 의해 일부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좌파로 몰리며

 그 업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선양사업이 부실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마곡사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백범 김구 선생님을 기리기 위한 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 마곡사에서는 ‘백범 명상길’, ‘삭발터 탐방길’ ‘백범교 개통’ 등 백범 김구를 조명하는 다양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소나무 숲과 넉넉하게 흐르고 있는 계곡물을 사이로 난 명상길은

백범 김구 선생이 즐겨 휘호한 서산대사의 시

 ‘눈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라(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를 되뇌어 보게 한다.

 

 

1946년 4월 마곡사 방문시 촬영한 기념사진입니다. 옆자리에 앉아 계신 분은 이시영 선생(당시 부통령)

 

 

 

 

 

 

 

 

 

 

 

 

백범 손자 김양 국가보훈처장 마곡사 방문

2009년 10월 10일 (토) 11:20:01  서현욱 기자 mytrea70@yahoo.co.kr

 

 
▲ 김양 국가보훈처장이 조부인 백범 김구선생의 수행처인 마곡사를 참배하고 김구 선생 선양사업 적극 지원을 약속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손자 김양 국가보훈처장이 10월 8일 오후 2시 30분께 조부가 수행했던 마곡사를 방문,

 김구 선생이 생전에 즐겨 쓰신 서산대사 시에 김구선생 낙관을 찍은 액자를 기증했다.

김양 처장이 기증한 액사의 낙관은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것이다.

김양 처장은 마곡사 주지 원혜 스님 등과 함께

김구 선생의 직계인 독립운동가 김신 장군의 아들로 조부모 백범 선생의 은거 기념가옥과 기념식수,

출가 당시 삭발했던 바위를 비롯해 거주 당시 명상하며 걸었던 마곡사-토굴암-백련암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걷고 회상했다.

   
 


원혜 스님은 “김구선생의 수행과 민족혼을 일깨울 수 있는 어린이 청소년 백일장과

김구선생 서거 일에 즈음하여 호국 다례제를 정례화 하는 한편 김구선생 선양사업을 활성화 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김양 처장은 김구선생께서 해방이후 기념식수를 마치시고

당당한 모습으로 오층석탑 앞에서 우리나라 초대 부통령 이시영선생과 지인들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며

 “귀한 사진 보존과 함께 선양사업 활성화에 감사의 인사들 드리는 한편, 적극적으로 도와드리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기증한 액자는 서산대사의 시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로

“눈 덮힌 들판 길 걸어 갈 적에(踏雪野中去) 행여나 아무렇게 걷지말라.(不遂胡亂行)

 오늘 나의 발자국이(今日我行蹟) 훗날 뒷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되리니.(遂作後人程) ”라는

내용을 담았다.

서현욱 기자

 

 

 

 

 

 

 

 

 

 

 

踏雪(답설)- 서산대사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눈 덮힌 들판을 걸어갈 때
不須胡亂行(불수호난행)  어지러이 함부로 가지 말라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가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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