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화중이 딸 본문
제가 회원으로 활동을 하고있는 낙섬일사회(용현초등학교 14회 졸업생들의 모임)의 여러 친구들 중에
오화중 이라는 이름의 평범치 않은(?) 친구가 한명 있읍니다
그는 어제(2017년 1월 21일 토요일) 서울에서 그의 딸을 시집을 보냈읍니다
화중이와 저는 용현초등학교 동창생 사이 이지만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지는 이제 10년정도 밖에 되질 않았읍니다
화중이가 저를 처음 만났을때 저는 심각한 말기암 환자였고
서로 차츰 가까워 지면서 저는 그로부터 크나큰 위로와 힘을 얻게 됩니다
장애에도 불구하고 정상인들을 부끄럽게하는 그의 진취적이고 밝고 명랑하며 바른 삶의 모습 때문 이었읍니다
제가 수시로 재발하는 암 수술 또는 항암치료차 원자력병원에 입원해 있을때마다
밤늦은 시간에도 아랑곳않고 퇴근길에 저의 병실을 찾아와 저를 위로해 주었던 그가
몇년전 부터 암환자가 되어 힘겨운 투병을 하고 있기에 많은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던중
어제 그의 외동딸을 시집 보내게 되었읍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화중이에게 가늠키 어려운 커다란 축하의 마음을 전 합니다
동영상속의 소리가 잘 안드리면 아래음악의 볼륨을 줄여 보세요
화중이딸의 결혼예식날 아침에 축복을 하듯이 하늘에선 흰눈이 내렸읍니다
남동구청앞 입니다
화중이와 함께 낙섬일사회의 오씨성 출신의 보석중의 한명인 세우는 저의 인천행차(?)때마다 저의 발이 되어 줍니다
세우의 승용차가 남동구청 앞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읍니다
서울 강남에 모인 낙섬 친구들
맨 뒤좌석의 오른쪽 두번째에 앉아있는 인석이는 경찰출신인데
가득이나 평범치않은 인상의 병규는 하필 인석이 옆 구석자리에 앉아서 친구들을 웃게 만듭니다
화중이는 기회가 있을때마다 그의 총각시절에 황혼빛에 물들은 월미도의 커피숖에서 그녀에게 청혼을 했던 이야기를 합니다
둘은 부부가 되었고 이제 그들의 딸을 시집 보냅니다
낙섬일사회 특유의 떼거리 모이기
예식을 준비하고 기다리고있는 신랑신부의 친구들을 보면서
엊그제 같은데 이미 오래전 이야기가 된 저희들의 그시절들을 떠올려 봅니다
장애를 극복하고 멋진 삶을 살아온 그와 그의 부인께 끝없는 축하의 마음을 전하며
암투병중인 화중이의 건투를 빕니다
기도를 하고있는 화중이 부부의 마음은 어떨까요....
경건 하면서도 축하의 분위기가 어우러진 멋진 결혼식 입니다
결혼식도 끝나고 밥도 맛있게 먹고 후식에 커피까지....
집으로 곧장 못가고 고향 인천의 송도 유원지앞에있는 친구(동환이)의 당구장에서 2차모임을 한답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2차모임의 명분은 이결혼식에 미처 참석을 못한 친구들 때문 이라는데....
너를 만나면 눈물이 나올것 같구나
오화중
오화중 행정실장은 79년도 제자훈련학교, 일반부 출신으로
현재 서울 강남구 일원동에 위치한 밀알학교 행정실 실장으로 재직중이다.
그리고 남송교회 안수집사로 봉직하고 있다.
40년동안 용현초등학교 시절을 잊고 살다가
어제 "화중이 너 배밭에 살던 애 맞지? 하는 신일이 전화를 받고 꿈속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배 밭 !
그 배 밭은 아버지의 작은 꿈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몸이 아프신 아버지는 배 밭의 꿈을 접으시고 초등학교 1학년 때 마을 입구로 이사와 구멍가계를 시작하셨다.
아버지의 예상은 맞아 6학년 때 쯤에는 마을에서 가장 장사가 잘 되는 큰 가계가 되었고
우리 집은 부자가 되었지만 무리하신 아버지는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 !
나의 집은 용현 1동이었고 학교는 용현 2동이어서 쩔뚝거리는 내 걸음으로 1시간 정도 걸어서 다녀야 할 정도로 멀었다.
몸이 약한 나는 자주 아팠지만 죽을 만큼 아파도 학교는 가야 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결석 없이 6년을 개근할 수 있었다.
학교 가는 길 !
쩔뚝거리는 다리로 학교 가는 길은 남보다 먼저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 혼자 걸어가는 길이었다.
가끔씩 신일이가 우리 집으로 와서 같이 학교가자고 한 것도 같은데
늦잠꾸러기였을(?) 신일이가 일찍 우리 집으로 온 적은 많지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큰 길을 2-3개지나 고개 넘어 철길을 만나면 학교가 보였다.
철길은 친구들의 즐거운 놀이터였다.
운 좋게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만나면 긴 못을 철길위에 놓아 납작한 칼을 만들거나
지나간 기차 길에 귀를 대고 멀어져 가는 기차 소리를 듣는 즐거움도 있었다.
철길을 지나면 그 때서야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가끔씩 친구들이 가방을 들어 주었던 기억이 있는데
신일이도 자주 내 가방을 들어 주었던 것 같다.
“ 너를 만나면 눈물이 나올 것 같구나.”
신일이가 전화를 끝내면서 한 말은 친구들을 더욱 보고 싶게 만들었다.
선표, 세우, 신일이 너네끼리만 영흥도에 가서 술 쳐 먹지 말고 슬 못 먹은 나도 가끔 불러다오.
나, 술은 못 먹어도 회는 잘 먹어!
2009년 12월 11일
신일이와 화중이 (2010년 가을 어진내에서)
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 옹진이시다.
조만식선생님과 같이 김일성에 대항하여 민주당에서
황해도 지구당 위원장을 하시다가 6.25에 강제로
인민군으로 끌려나와 포로가 되자
이승만 대통령 반공포로 석방시 과감히
북녁 고향을 버리고 남쪽나라를 택하시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으로 인천에 터를 잡으셨다.
그래서, 나의 고향은 인천이 되었다.
태어 난 곳은 만석동이고 자란 곳은 용현동이다.
초등학교 시절 누가 나의 고향을 물으면 아버지 고향인
황해도 옹진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6,25 이후 옹진은 인천과 황해도 둘로 갈라졌다.
인천시 옹진군 영흥면 앞바다에 서니
아버지 고향 황해도 옹진이 생각이 났다.
나에게 고향은 어떤 곳일까?
아버지 태어나 자란 고향인가?
내가 태어나 자랐던 곳이 고향인가?
그 시간보다 몇 갑절을 더 길게 살아온 곳이 고향인가?
사실 많은 시간, 인천보다 더 보낸 곳이 서울이기에
서울이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가끔 묻는다.
빌딩 숲, 서울도 고향이 될 수 있느냐고???
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되돌아가는 회귀를 생각한다.
연어에게는 험란한 물결을 거슬려서라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을 것이다.
연어들의 늙은 회귀처럼
아버지께서 돌아갈 고향을 늘 그리워하셨는데
나에게도 돌아갈 고향이 있는 것인가.
그렇다. 내가 돌아가고 싶은 마음의 고향은
마당 한복판에 커다란 느트나무가 자라고
앞에는 낙섬 너머 바다보이고
뒤에는 수봉산과 저 너머 월미도와 자유공원이 있던 곳...
여름이면 저수지로 몰려가서 같이 멱을 감던 친구들이 있고
겨울이면 논바닥에서 썰매를 지치던 친구들이 있는 곳
초등학교 시절 많은 친구들과 추억이 남아 있는 한
언젠가 돌아가고 싶은 고향은 서울보다는
내 고향은 인천으로 간직하고 싶다
오화중
4월과 5월의 <등불> 이라는 노래는 많은이들에게 잘 알려지지않은 노래 이지만
제가 결혼식에 대한 글을 쓸때에 배경음악으로 택하는 노래이며
저의 다섯손가락안에 꼽히는 애청 또는 애창곡중의 하나 입니다
제가 낙섬일사회에서 화중이를 처음 만나고난후
낙섬일사회의 각종모임때 마다 화중이가 이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앞으로 저애(화중이)를 좋아하게 될것같은 마음이 들었고'
그후로 화중이와 저는 동병상련의 마음 이전에 그냥 좋아하는 사이가 되어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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