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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가족 이야기

구월동 양계단지 시절

매루 2017. 1. 8. 12:04

 

 

 

 

 

 

 

 

 

양계단지 저희집 보로꾸라고 부르던 시멘트 블롴담장에서 막내동생(당시 구월초등학교 재학)과...

교련수업이 있는 날은 교련복을 입고 등하교를 하였읍니다

 

 

 

 

제가 군대에 입대(1976년)하기전인 1975년 가을로 추정되는 구월동 양계단지 시절의 저희가족 사진 입니다

아랫 사진과 정반대 방향에서 찍은 사진 입니다

사진에는 보이질 않지만 오른쪽에 저와 목사동생이 함께 쓰던 방이 있었고

그방 앞에는 화단이 있었는데

사진 오른쪽 아래에 보면 아버지께서 그화단에 심어 놓으셨던 국화의 붉은색 꽃이 보입니다

 

 

 

 

초창기 구월동 양계단지 에서의 여동생과 막내동생의 사진 입니다

사진 왼쪽에 빛이 반사되는 창문이 보이는 방이 저와 목사동생이 함께 지냈던 방 입니다

 

 

 

 

 

제가 군생활(1976~1979)을 하고 있을때

여동생과 막내동생이 루씨라는 이름의 세퍼트와 함께 찍은 사진 입니다

사진 뒤에 닭을 키우던 닭집(鷄舍)가 보입니다

여동생 뒤에 있는 나무는 앵두나무인데 아버지께서 닭장에서 나오는 닭똥을 앵두나무 주변에 뿌려주어

 봄이면 가지가 꺾일 정도로 굵고 새빨간 앵두열매가 초록색의 앵두 잎파리와 어울리며 다닥다닥 열렸었읍니다

사진에는 안보이지만 앵두나무 오른쪽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저와 목사동생은 여름내내 논에있는 둠벙에 가서 미꾸라지를 잡아다 우물안에 집어놓곤 했었읍니다

이 양계단지는 지금의 상인천 중학교 건너편 고개넘어에 있었고

지금은 인천의 강남이라 불리울 정도로 초고층아파트단지가 되어 있지만

1970년대에 저희가족이 이곳에서 생활을 하던 때에는 옹기를 굽던곳과 참숯공장이 있었을 정도로 인천 끄트머리 농촌 이었읍니다 

 

 

 

 

 

닭짓

 

 

닭의 해에 닭이 많이 아프다.

조류인플루엔자(AI)의 피해를 입은 사육 농가의 마음도 많이 아플 것이다.

필자는 이 마음을 안다.

중학교 시절 선친께서는 약 2년 간 닭을 쳤다.

동구 송림동에서 오랫동안 경영한 연탄공장을 정리한 후 그 건축물을 이용해 닭을 키우셨다.

병아리를 사다가 육계로 키워 파셨다.

양계장이 집과 학교 사이에 있는 바람에 필자도 일을 거들 수밖에 없었다.

 천상 주부였던 어머니도 하루 종일 양계장에서 일을 하셨기 때문에 불평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교 길에 이곳에 들러 주로 사료 주는 일을 했다.

1천 마리 정도의 닭에게 모이 주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사료를 담은 포대는 크기와 무게가 시멘트 포대와 비슷했다.

수십 개의 함석 먹이통에 사료를 들이붓는 일은 힘에 부쳤다. 

가장 하기 싫은 일은 주말 연례 행사였던 닭똥 치우는 작업이었다.

매주 배설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막 사춘기에 접어든 필자는 월요일 등교 길에 몸에서 닭똥 냄새 날까봐 노심초사했던 기억이 있다.

일정한 크기로 자라면 닭을 팔아야 한다.

자전거 짐칸에 닭장을 실고 온 아저씨들이 정기적으로 왔다.

우리집 닭은 인근 현대시장의 닭전에서 팔렸다.

명절 때가 되면 하루 종일 닭을 사로잡아야 했다.

굵은 철사로 만든 갈고리로 단번에 닭발을 채야 한다.

이게 서툴면 수백 마리 닭들의 소요 속에 갇혀야 한다. 

닭은 병치레가 심한 동물이다.

 하루 종일 닭들이 동시에 설사를 하거나 갈고리를 갖고 들어가면 본능적으로 날뛰던 닭들이 미동도 없이 까무룩 잠을 자고 있다.

어제까지 멀쩡했던 닭들이 갑자기 다리와 날개가 뒤틀려 이곳저곳 쓰러져 있기도 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에 남는 피해 장면이 있다.

전염병은 아닌데 아침이면 닭 몇 마리가 죽어 있곤 했다.

쥐가 닭을 잡아먹은 것이다.

쥐가 잠자고 있는 닭의 항문을 간질인다.

닭은 기분이 좋아진다.

 쥐 이빨은 조금씩 닭 몸으로 깊게 들어간다.

내장이 모조리 파 먹혀 결국 닭은 처참하게 죽는다.

이게 바로 '닭 짓'이다.

먹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황홀경에 빠져 자신의 몸을 내어준다.

쾌락과 목숨을 맞바꾼 것이다.

비단 이것이 닭만 하는 짓은 아닐 것이다.

요즘 '닭 짓'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유동현/굿모닝인천 편집장

 

 

 

인천일보의 칼럼난에 실린 유동현(굿모닝 인천 편집장)의 <닭짓>이라는 제목의 글 입니다

많은 이 들애게 박근혜 대통령이 왜 닭이라 불리우는지 이분의 글에 답이 있읍니다

 

 

 

생전에 저의 부친 께서도 약 7년여간(1970~1977)구월동에서 닭을 키우셨었읍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군대생활을 하고 있었을때 까지 입니다

마릿수(저희집은 2,000마리)만 다를뿐  닭키우는집 아들의 생활은 저도 유동현님과 똑같았읍니다

 

닭을 키우려면 닭장을 깨끗이 청소하고 소독을 하는등 철저한 관리가 필요 했는데

결벽증에 가까운  아버지의 닭집(鷄舍)관리 과정에서 일을 도와 드리던 가족들이 무척 힘이 들었었읍니다

키우던 닭을 모두 상인에게 넘기고 병아리를 다시 들이기 위해서는

닭집의 청소와 소독은 물론이고  폐사료(닭들이 먹다 남은 사료)를 처리 해야 했는데

아버지 께서는 이 폐사료를 이용하여 칠면조와 꿩을 기르셨는데

그녀석들이 낳은 알들을 부화를 시켜 마릿수를 늘렸기에

온가족의 일과는 날개달린 짐승들 때문에 무척 분주할수밖에 없었읍니다

 

앞에 거론한 아버지의 결벽증에 가까운 닭 키우기 중에는 사료주기도 있읍니다

그시절 양계단지의 대부분의 집들은  닭에게 사료를 줄때 사료통에 사료를 한가득 부어 놓지만

아버지 께서는 조금조금씩 수차례 닭사료를 주셨기 때문에 저희집 닭들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늘 새로지은 따스한 밥을 얻어먹은 셈 이지요

 

이러한 경험은 요즘음 저희부부의 영흥섬 생활에 적지않은 도움으로 작용을 하여

조류독감 때문에 달과 계란파동이 한창인 요즈음 이지만

달걀 후라이를 좋아하는 제아내를 비롯하여 이웃들은 제가 생산해내는 유정란들을 얻곤 합니다

대놓고 요구는 하질 않지만 이웃들께서 차츰차츰 한알 이라도 더 얻고 싶어하기에

내년봄에는 암닭 몇마리를 더 키워야 할것 같습니다

 

 

 

 

 

 

 

 

 2016년  8월 27일자 제 블로그의 글제목<달걀 이야기> 입니다

 

 

 

 

지난 6월 16일 대부도 백암농장 에서의 포도밭 포도송이 알솎음 작업중 점심식사를 마치고

잠시 백암농장 과수밭을 둘러 보던중 잊혀졌던 광경이 눈에 띕니다

백암농장 주인부부가 운영을 하는 토종닭백숙식당에 쓰일 닭들을 직접 키우는데

늦봄이면 여기저기서 이렇게 병아리를 달고 다니는 암닭들이 보인다고 합니다

 

 

 

 

이날 백암농장 주인부부는 포도 알솎음작업을 도와드린 저희부부에게 

수탉 1마리와 암탉 4마리를 선물을 해 주셨읍니다 

 

백암농장의 닭들이 저희집에 온지 70일이 되었읍니다

수탉은 의젓하게 장닭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을 하고 중닭 이었던 3마리의 암탉들도 알을 낳기 시작을 했읍니다

나머지 한마리의 암탉은 가져올때부터 알을 낳던 약간 나이가 든 닭 이었읍니다

참고로 암탉은 태어난 지 17주부터 알을 낳을 수 있다고 합니다  

 

 

천차만별 (千差萬別) 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어떤 부류나 사물이 상황이나 경우에 따라서 가지각색으로 다르고 차이가 많음 이라고 풀이되어 있읍니다 

사진의 가장 왼쪽에 있는  달걀이 나이가 좀 든 암탉의 알이고

나머지 3개의 달걀은 쌍알(노른자가 두개인)을 비롯하여 크기나 모양이 모두 다릅니다

 

 

 

 

시중에 유통되고있는 달걀보다 분명히 노른자의 크기나 색갈 그리고 통통함이 다릅니다

닭이 태어나서 처음 낳은 작은 달걀에는 오른자가 아주 적고 흐립니다

 

 

 

 

달걀 후라이를 좋아하는 제아내는  지난봄부터 시중에 유통되는 달걀공장의 달걀이 맛이 없다고 말을 했었읍니다

백암농장의 닭들을 데려다가 낛시로 잡은 망둥어를 다져 사료와 섞어주며 키우니 달걀 노른자의 색갈이나 크기가 특별 합니다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라고 또 유정란 이라는것이 달걀공장의 달걀과는 여러모로 비교가 됩니다

 

 

 

                                 

달걀공장의 닭들

 

 

 

 

 

 

 

 



 

구월동 시절에 저는 기타를  처음 만지기 시작을 했었고

그때 유행을 하고 한창 따라 부르던 노래중의 하나가

내고장 출신 여성듀엣인 산이슬의 노래 <이사 가던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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