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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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 시드는 꽃을 어찌 멈춰 세울수 있는가

매루 2015. 2. 14. 08:10

 

 

 

 


 


시드는 꽃을 어떻게 멈춰 세울 수 있는가


도 종 환

 

 

길을 나서려니 갑자기 거리가 휑해진 느낌이 드는 날이 있다.

나뭇잎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없고
가로수 빈가지 사이로 먼산의 풍경들이 다 건너다보이는 그런날.

 

그래, 지난밤의 바람이 얼마나 거셌는지 알겠구나.
나무들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겠는지 알 것 같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아침이 있다.

 

들에는 잔설이 깔리고 개울에는 살얼음이 얼어
이제 가을은 영영 사라지고 말았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아침.

 

눈앞에 시간이 이렇게 가고 있는 걸 바라보면서도
세월을 손으로는 붙잡을 수 없어
그저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는 아침이 있다.    

피할 수 없는 이별이 가까이 다가옴을 정녕 알면서도     
왜 그녀는 그렇게도 선뜻 오고 마는 걸까.

 
D.H. 로렌스가 겨울을 그렇게 노래했듯이
피할 수 없는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속절없이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때가 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이미 늦어버린 인연,
그 다해 가는 인연의 시간을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날이 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어 억장이 무너지는 저녁이 있다.


시드는 꽃을 어떻게 멈춰 세울 수 있는가.
흐르는 강물을 어떻게 붙잡아둘 수 있는가.
지는 저녁 해를 어떻게 거기 붙잡아 매둘 수 있는가.

가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이 주위에는 많다.

가는 새를 날아가던 모습으로 간직하고 싶어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겨우 박제에 지나지 않고,
아름답게 꽃피던 모습으로 멈춰 세운 것이
조화인 것을 우리는 안다.

하늘을 잃어버린 새와 향기가 없는 꽃을 만드는 것.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분명히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사랑한다고 말한 그 사람도 없고 사랑도 없다.

분명히 둘이 서로 뜨겁게 사랑했는데
그 뜨겁던 사랑은 간 데가 없다.

사랑이 어떻게 사라지고 만 것인지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에도
사랑하는 사람은 점점 내 곁에서 멀어져가고
사랑도 빛을 잃어 간다.

시간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은 없으며
낡고 때묻고 시들지 않는 것은 없다.

시간의 강가에 영원히 붙잡아둘 수 있는 나룻배도 없으며.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을 묶어둘 수 있는 어떤 밧줄도 없다.


세월의 달력 한 장을 찢으며 이렇게 또 나이를 먹는구나 하고
자신의 나이를 헤아려 보는 날이 있다.
벌써 내가 이런 나이가 되다니 하고 혼자 중얼거리는 날이 있다.

얼핏 스치는, 감출 수 없는 주름 하나를 바라보며
거울에서 눈을 돌리는 때가 있다.
나도 조금씩 모습이 달라지는 구나 하고 느끼는 날이 있다.

사실 가장 많이 변한 건 바로 나 자신인데
그걸 늦게서야 깨닫는 날이 있다.


살면서 가장 잡을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나 자신었음을
그동안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붙잡아두지 못해 속절없이 바라보고 있어야 했던 것,
흘러가고 변해 가는 것을 그저 망연히 바라보고 있어야 했던 것이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