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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

昌慶宮을 다녀와서....

매루 2013. 1. 6. 03:40

 

 

 

 

오늘(1/4)은 제가 원자력병원에서 정기검진을 받는날 이었읍니다

아침 6시에 집을 떠나 오전내내 원자력병원에서의 모든 검진일정을 마치고

동대문시장과 혜화동에서 각기 친구들을 만난후 창경궁엘 둘렀읍니다

 

 

 

제가 이곳에 다닌지도 벌써 10년이 지났읍니다

 

 

원자력병원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하고있는 친구 용덕이네 가게에 둘릅니다

지하철 동대문역을 빠져나오자 흥인지문(興仁之門)의 위용이 한눈에 들어 옵니다

 

 

얼핏보면 용덕이와 저는 다툰 모습으로 보입니다

 

 

또다른 친구 성한이를 만나기 위하여 혜화동 로타리에 왔읍니다

 

 

혜화동에서 신문보급소를 운영하고있는 성한이는 추운날씨속 에서도 신문배달 오토바이를 몰고 나왔읍니다

 

 

친구들과 헤어진후 창경궁으로 발길을 돌렸읍니다

 

 

왜놈들은 조선의 궁궐 이었던 이곳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이름도 창경궁에서 창경원으로 격하 시킨후

조선 이라는 나라를 이씨들의 왕가로 펨훼 하여 이왕가 박물관(李氏 王家 博物館)을 세웠읍니다 

 일본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박정희의 죽음후 쿠테타를 일삼는 정치군인과 그 추종세력들은

국민들의 시선과 관심을 정치에서 멀어지게하기 위하여 프로야구를 만드는가하면

1983년부터는 이곳에있던  동물원과 식물원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고 이름도 창경궁으로 되찾았읍니다

 

창경궁 배치도

 

 

창경궁의 정문인 弘化門

조화를 넓힌다는 弘化라는 이름에 걸맞게 조선의 임금들은 이곳 홍화문 밖에 나가서 백성들을 친히 만나곤 했으며

정조임금은 그의 어머니인 혜경궁홍씨의 회갑일날 이곳 홍화문 앞에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금천 (禁川)

조선의 모든 궁궐 마당에는 시냇물이 흐르는데  이물길은 법전이 있는 궁궐의 안쪽과 외부의 공간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며

궁궐 뒤의 산과 짝을 이루어 좋은 운을 불러들이는 吉地가 되라고 궁궐 앞쪽에 일부러 낸 물길 입니다

이를 '금천'(禁川)이라 부릅니다. 창경궁의 금천은 玉川이라 부르고  이 옥천위에 놓인 다리가 '옥천교'(玉川橋)입니다

 

 

 조선의 5대궁중에는 모두 금천이 있는데  그중에서 자연적으로 물이 흐르던 곳은 이곳 창경궁 금천 뿐이었다고 합니다

 창건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옥천교(玉川橋)는 조선의 다른 궁궐의 어느 것보다도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어서

유일하게 이 다리만이 독립적으로 보물(제 386호)로 지정되어 있읍니다.

 

 

 

 

창경궁의 정전인 명전전(明政殿)의 출입문인 명정문(明政門)

 

현존하는 조선 궁궐의 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광해군때 건립) 정전인 명정전

 

 

 명정전에서 바라다 보이는 남산

 

 

명정전의 꽃살문

 

숭문당(崇文堂) 한켠  꺼진 부분에 시멘트를 발라 놓았읍니다

 

숭문당(崇文堂)과 문정전(文政殿)

 

 

창경궁의 편전인 문정전(文政殿)은 왕이 일상 업무를 보던 곳으로 명정전과  회랑(지붕이있는 마루통로)으로 연결되어 있읍니다

이곳 문정전에서  사도세자의 임오화변(壬午禍變)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문정전(文政殿) 뒤에 있는 숭문당(崇文堂)은 임금의 경연이 있었던 곳으로,

왕이 태학생들을 접견하여 주연을 베풀던 곳 이기더하며 학문을 토론 하고 나랏일을 논의하기도 하였답니다

현판은 영조임금께서 직접 쓰셨다고 합니다

 

 

 숭문당 밖

 

 

 숭문당 밖에는 내전의 전각들이 있읍니다

맨앞에 두사람이 앉아있는 정자가 함인정 입니다

함인정은 인조가 인조반정후 인왕산밑에 인경궁에서 헐어다가 옮겨지었다고 하며

임금이 함인정 넓은 마당에서 신하들을 접견하는 장소로 많이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환경전(歡慶殿) 창경궁의 한 내전으로 왕이 늘 거동하던 곳으로 중종이 이곳에서 승하 하였으며

병자호란때 삼전도 굴욕을 당했던 인조는 죽는날 까지 청나라를 증오하며 북벌의 꿈을 키웠지만

삼전도 굴욕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던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발전된 모습과 서양문물을 보면서

현재의 조선이 승산이 없는 청나라와의 싸움보다 그들과 화친을 통하여 그들의 문물을 받아들일 생각을 합니다

오랜세월 청나라의 볼모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소현세자는 돌아온지 두달만에 이곳 환경전에서 온몸에 피를 쏟으며 급사를 합니다

아버지 인조에 의한 독살사건으로 전해지는 비극 입니다 

 

 

 

환경전(歡慶殿) 앞에서 해설사의 안내에 귀기울이고있는 벽안의 처자

벽안의 처자는 조선의 왕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부자지간의 불미스러웠던 역사를 설명 들었을까 궁금 합니다

 

 

    정조,헌종임금이 태어난  경춘전(景春殿) 

정조임금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승하한 곳도 이 곳 이랍니다

 

 

 

경춘전(景春殿) , 환경전(歡慶殿) 사이로 보이는 통명전

 

 

  창경궁에 있는 왕과 왕비의 침전 겸 연회용 건물이었던 통명전(通明殿) 은

명정전 서북쪽 궁궐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읍니다

숙종때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모해하기위해 통명전 뜰에다가 저주하는 물건을 심어 놓았었읍니다

 

 

 

왕비의 생활공간 이었던 양화당(養和堂)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가 삼전도 굴욕을 당한후 돌아와서 이곳에 거처하기도 하였으며

철종(강화도령)의 아내 철인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한 양화당(養和堂) 의 현판은 순조의 글씨라고 합니다

 

 

삼전도 굴욕

 

 삼전도 비에 새겨진 석화

위에 앉아서 위엄을 보이고 있는  청의 황제 홍타시 아래에서 예를 취하고 절을 하고 있는 조선의 인조임금

 

인조는 청나라황제인 홍타시앞에 무릎을 꿇고 한번 절을 할때마다 이마를 땅에 세번 부딪쳐야 했읍니다

이른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적인 항복례를 올렸던것 입니다

인조의 무릎이 까지고 이마에 선혈이 낭자함에도 불구하고 인조가 머리를 땅바닥에 부딪힐때마다

그자리에 배석한 청나라 관리들은 머리 부딪치는 소리가 작으니 더세게 박으라고며 닥달을 했다고 합니다

 

 

 통명전(왼쪽)과 양화당(오른쪽)

 

영춘헌(迎春軒)

 정조는 순조를 낳은 후궁 수빈 박씨를 사랑했으므로 집복헌에 자주 출입하였고

집복현 남쪽 마당에서 동쪽으로 판장문을 나서면 조그만 집 영춘헌 이라는 아주작은 집 한채가 있었는데

                      투박한 무명베 옷을 입고 하루 두끼 식사만 하면서  자나깨나 백성과 나라만을 걱정하며 일생을 보낸

소탈한 성격의 정조임금은 이곳을 독서실 겸 집무실로 자주 이용했다고 합니다.

정조임금은 즉위 24년(서기1800년)에 이곳 영춘헌에서 승하 하십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동궐도

 

 

창경궁 일대에 있었던 후궁들의 처소들중 유일하게 남아잇는 건물인 영춘헌(迎春軒) 과 집복헌(集福軒)

지금은  영춘헌과 맞닿아 있는 집복헌(集福軒)에서  영조는 장헌세자(사도세자)를 낳았고

정조는 자신의 할아버지인 영조임금처럼  후궁(수빈 박씨)의 거처인 이곳 집복헌(集福軒)에서 순조를 낳습니다

 

 

 

 

 

통명전 연못

 

통명전,양화당 뒤에는 계단식 정원이 있고  정조임금은 그위 언덕에  그의 어머니 혜경궁홍씨에게 전각(자경전)을 지어 드립니다

사도세자의 사당이 있었던 함춘원(지금의 서울대병원)이 잘 보이는 곳 입니다

사진에는 남산을 찍었지만 왼쪽(창경궁 맞은편)에는 서울대학교 병원이 훤히 보입니다

 

 영조임금과 사도세자 그리고 혜경궁홍씨의 <한중록>이 쓰여진 자경전터에서

춘당지로 가는 길에 풍기대(사진에는 안나타있음)와 나란히 해시계 앙부일구가 있읍니다

 

 조선시대 내농포(內農圃 : 임금이 직접 밭을 일구고 농사의 풍·흉을 예측하던 곳)의 조그마한 연못 이었던  춘당지(春塘池)

왜놈들은 춘당지 주변에 벛나무를 심고 동물원을 만든후 이곳에서 뱃놀이를 하게하여

조선 국왕이 직접 벼농사를 지었던 권농장(勸農場)이던 내농포(內農圃)를 뱃놀이를 즐기는 놀이터로 만들어 버렸읍니다

 

 얼음이 얼은 춘당지위에 흰눈이 덮였고 그 위에서 까치들의 햇볕을 쪼이고 있읍니다

 

춘당지옆  창경궁 식물원

1909년 건축 당시에는 170여 평(약 570여㎡)으로 동양 최대 규모의 목조 식물원이었던 대온실

 

흰소나무(白松) 

조선시대에 중국에 사신으로갔던 관리들이 귀국하면서 베이징부근에 자생하던 백송의 솔방울을 가져다가 심었던것인데

왜놈들은 이곳에 벛나무를 심을때 어찌 이 백송은 건드리질 않앗는지 모르겠읍니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법전인 명정전이 있고 

명정전 우측에는 춘당지가 있고 좌측에는 왕실과 직접 관련이 있는 관청인 궐내각사 터 입니다

창경궁의 궐내각사에는 군사업무를 총괄하는 도총부(都總府)가 있었고

그 주변에 왕실의 수레와 말을 관리하기위한 마굿간과 사료창고등의 대규모 복합건물들이 있었던곳인데

왜놈들은 이일대를 모두 헐어버리고 동물원을 만들었읍니다

 

 

 

 

창경궁을 드나들던 신하들의 출입용도로 쓰였던 선인문

이 선인문 부근에서는 조선의 비극적인 일들이 많이 발생을 하였읍니다

왕위를 빼앗긴 연산군이 궁궐밖으로 쫓겨날때 이문을 통해 나갔고

숙종으로부터 사약을 받고 사망한 장희빈의 시신도 이문을 통해 궁궐 밖으로 나갔고

사도세자가 갇힌  뒤주가 이곳 선인문 부근에 8일이나 방치되었고  사도세자는 결국 이곳에서 목숨을 잃습니다 

이 회화나무는 1830년 이전에 그려진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東闕圖)에도 나타나 있읍니다

 

 

창경궁 밖에서 본 선인문

사진 뒤편에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이 보입니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問)의 단청

 

 

조선의 5대궁(五大宮 : 慶福宮,昌德宮,慶熙宮,慶運宮德壽宮,昌慶宮)중에서

법궁인 경복궁과 그 보조궁궐 이었던 창덕궁이 정치공간 이었다면

가장 규모가 작은 창경궁(昌慶宮)은 경복궁,창덕궁에 이어 3번째로 세워진 조선의 궁궐 로서

정치공간인 외전 보다는 왕실의 윗어른들을 모시기위해 지어졌던 내전(內殿)이요

왕실의 생활공간 이었읍니다

이러한 이유로 창경궁은 조선 5대궁궐 중에서 가장 규모가 작았지만

창경궁(昌慶宮)에서는 크고작은 사건들이 무수히 많았던 곳 입니다

권력을 둘러싼 당파싸움에 이용되거나 희생을 당한 조선의 왕들과 그 가족들의 애환을 보면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製家治國平天下)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의 교훈을 새삼 깨달았고

 왕실을 둘러싼 권력싸움의 와중에 짓밟히고 억눌린 99%의 백성들의 모습을 창경궁을 보면서 느꼈읍니다

그리고 지역,세대,이념 으로 국민을 편갈라 집권에 성공하곤하는 지금의 내나라 정치세력들을 봅니다

그리고 과연 국민들이 그들을 따라 편가름에 응할만큼 그들의 양심과 도덕 그리고 행적이 옳바랐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다시 이땅에 세종대왕과 같은 聖君과  악습을 타파하고 백성을 받드려는 의지와 실천을 행했던 정조대왕이

나타나기를 고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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