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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1/8)

매루 2013. 1. 10. 14:06

 

 

 

 

 

 

1895년 주한 일본 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직접 나서서 일본인들과 그 영향 아래 있는 조선군을 이끌고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왕후를 시해하는 이른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20일 새벽 비밀리에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른바 아관파천이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후 다시는 경복궁이나 창덕궁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빈 궁궐들은 속절없이 황폐해져갔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간 지 1년 만에 환궁하였다. 한데 그때 환궁한 궁궐은 경운궁(慶運宮, 지금은 덕수궁이라 불리는 궁궐)이었다. 경운궁은 광해군 이후 빈 궁궐터로 남아 있었다. 그 터에 1880년대에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의 공사관과 이화학교, 배재학교, 정동교회 등이 들어서 그 일대는 마치 서양 세력의 근거지처럼 변해버렸다. 고종은 그렇게 외국 공사관들이 들어서고 남은 옛 궁궐터에 다시 건물들을 짓고 그리로 거처를 옮긴 것이었다. 고종은 경운궁으로 옮겨와서 연호를 새로 광무로 제정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나름대로 국권을 지키려 애를 썼다. 하지만 일제의 강압에 밀리고 밀리다 결국은 1907년 강제로 퇴위당하였다. 일제는 쫓겨난 황제 고종에게 ‘덕수(德壽)’ 라는 궁호를 붙여 그대로 경운궁에 머물게 하고, 순종을 황제로 앉혀 창덕궁으로 옮겨가게 하였다.

 

 

 조선의 5대 궁궐 중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덕수궁...  이곳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임진왜란때 왜구들의 방화로 궁궐이 소실되자 선조가 이곳을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행궁(行宮)이 되었읍니다.

광해군은 이곳에서 임금의 자리에 오르면서  이 궁의 이름을 경운궁(慶運宮)으로  바꾸었고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환궁을 한후 빈 궁궐이 되었다가 

광해군의 계모(선조의 2번째 부인)인 인목대비가 이곳에 유폐되면서 서궁(西宮)으로 불렸으며

인조반정후  인조는 이곳 별당에서 왕위에 올랐읍니다 

구한말 일본낭인들의 명성황후시해사건(을미사변)후 신변의 위험을 느낀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러시아 영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 俄館播遷)을 했다가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궁궐건물의 건립이 이루어졌읍니다.

그해에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시는 선원전(璿源殿), 침전인 함령전(咸寧殿), 보문각(寶文閣) 등이 지어졌으며

9월 17일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하고 소공동의 원구단(圜丘壇)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덕수궁은 비로서 조선의 정궁(正宮)이 되었읍니다.

1904년 대규모 화재로 많은 건물이 불타버렸으나 즉조당(卽祚堂)·석어당(昔御堂)·함령전 등이 중건되었으며

 1905년 중화전을 다시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되었으며, 이때 大安門도 수리하여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바꾸었읍니다.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이 터지자 일제는 고종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1907년 순종이 이곳의 즉조당에서 왕위에 오른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이곳이 고종의 거처가 될때

일제는 고종에게 정치에 참견이나 간섭을 하지말고 이곳에서 조용히 천수(天壽)나 누리라는 뜻으로 

궁궐의 이름이 덕수궁(德壽宮)으로 바꿉니다 

고종은 1919년 함령전에서 승하하고 1921년 중화전에 봉안했던 고종의 영정은 창덕궁 선원전으로 옮겨집니다·

덕수궁은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 건축이 함께 남아 있는 조선왕조의 궁궐로

본래 일반사가의 집을 궁궐로 꾸몄기 때문에 규모도 가장 작고 전체배치가 정연하지 못한데다가

서양식으로 세워진 석조전의 남쪽에 일본인들이 미술관을 세우고 그 앞에 서양식 연못을 만들면서

궁궐의 본래 모습이 상당히 손상되어 많이 안타까운 근대한국의 원(原)공간 입니다 

 

 

 

덕수궁의 원래 정문은  중화전 정면에 있었던 인화문 이었으나 1904년 대화재로 소실이 되었고

동문(東門 :현재의 시청쪽) 이있던  대안문(大安門)을 현재의 대한문으로 이름을 고쳐 지금의 정문으로 사용하고 있읍니다 

덕수궁은 원래 별궁 이었기 때문에 다른 궁궐과 달리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大漢文)은 단층건물 입니다

 

 

 

매일 3번씩 치러지는 덕수궁 대한문의 수문장 교대식

 

 

 

 

 

대한문과 금천 사이에서 수문장 교대식을 준비중인  장수들

 

 

 

 

궁궐의 안쪽과 외부의 공간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는 금천(禁川)과 금천교

덕수궁의 금천은 땅속에 묻혀있다가 1986년에 발굴하여 정비한 것이라 합니다

 

 

금천교에서 바라본 중화전 가는길

금천교를 건너 중화문(中和門)에 이르는길이 덕수궁의 중심 행차로 였읍니다

 

 

 

 

中和殿의 정문인 中和門

 

 

 덕수궁의 중심 건물로 임금님이 하례(賀禮)를 받거나 국가 행사(왕위 즉위식,외국사신 접견등)를 거행하던 중화전(中和殿)

 

 

중화전(中和殿) 내부의 어좌(御座)

중화전의 어좌는 닷집(집속의 집) 형태 입니다 

 

 

 

원래는 중층(重層)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소실후  당시의 궁핍한 나라재정 때문에 단층으로 축소 건립 하였답니다

그나마 중화전의 넓직한 마당,조정(朝廷)을  형성했던 행각들은

1919년 고종이 이곳 덕수궁의 함녕전(咸寧殿)에서 승하후 대부분 헐립니다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 뒤(즉조당 일원)에는 편전에 해당하는 즉조당,준명당,석어당 건물들이 있읍니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임시궁궐로 사용했던 건물

임진왜란이 끝난후1623년 대부분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즉조당과 석어당만 보전하여 훗날 이곳은

경운궁의(덕수궁의 원래이름) 모태가 됩니다

 

즉조당은 임진왜란 이후 임금이 집무를 보던 공간 으로서

광해군과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에 올랐읍니다

 

 

즉조당(우측)과 준명당 두건물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읍니다

 

 

 

 

 

즉조당과 회랑으로 연결되어있는 준명당은 

고종이 신하와 사신을 접견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하기 위하여 즉조당과 회랑으로 연결하여 새로지은 건물로서

고종이 애지중지했던 덕혜옹주의 유치원으로 사용 되었다고 합니다

 

 

 

 

1912년 5월 28일 오후 7시 30분, 아기의 울음소리가 덕수궁이 떠내려 갈 듯 울렸다.
환갑이 넘은 고종이 그토록 사랑하던 귀인양씨가 예쁜 딸을 낳은것이다.
고종황제가 환갑이 넘어서 본 딸이라, 특별히 예뻐하는 자식이 었다고 한다

 

한 일화로, 고종황제는 늦은밤에 딸이 너무 보고 싶어서 젖을 먹이던 상궁의 방에
들어가자, 놀란 상궁은 고종에게 예의를 갖추고 얼른 일어 나려 했으나 고종황제는 옹주가 깰 것을 염려하며
'괜찮다, 어서 옹주에게 계속 젖을 먹이도록 해라. 난 옹주가 그대로 자는 모습을 보고싶구나.'  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 옛날, 유모가 임금앞에서 들어 누워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었다. 하지만 옹주에 대한 사랑이 '임금'이 아닌 한 '아버지'로서의 고종황제를 만들게 한 것이다.

고종황제의 옹주에 대한 사랑은 이에 그치지 않아, 옹주가 6살 되던해, 고종은 덕수궁에 유치원을 설치했고 옹주는 양반자제들과 같이 공부를 하였고, 마음껏 뛰어 놀았다.

 

1916년 4월 1일, 복녕당 아기씨(福寧堂 兒只氏) 교육을 위해 덕수궁에 유치원(幼稚園) 설치를 명하고, 아울러 경구정자(京口貞子, 쿄구치 사다꼬)와 장옥식(張玉植) 둘을 보모(保母)로 촉탁(囑託)하다.1916년 5월 8일, 태왕전하(太王殿下, 즉 고종) 준명당(浚明堂)에 임하시어 유치원 학도(幼稚園 學徒)를 소견(召見)하시고 필묵(筆墨)을 하사하시다.

순종실록 부록 : 순종황제실록 부록 권지7

 

▲ 유치원 시절의 덕혜옹주 (하단 오른쪽 두번째)

 옹주는 남을 배려 하던 마음이 깊었다고 전해 지는데, 한 급우가 놀다가 치마에 얼룩이 묻어 울상을 짓자, 옹주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덕수궁 안으로 들어 가서 자신이 입던 치마와 바꿔입었다고 한다. '걱정마, 내가 입던 치마와 네가 입던 치마를 바꿔 입으면, 아무도 얼룩이 묻은 것을 모를 거야. 그럼 넌 집에서 어머니께 혼나지 않아도 될꺼야.'
이렇게 마음 따듯하게 자라나던 덕혜옹주였다.
그러나, 옹주의 행복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머니는 유방암으로 서거하시고, 아버지 고종황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붕어를 맞이 하며  덕혜옹주는 하루 하루를 외롭게 지낸다.
그러던 중, 덕혜옹주는 일본관리들에 의해 강제로 일본에 있는 학교에 유학을 가게된다

 

일본의 소학교에서 수업중인 덕혜옹주

 

 

 

 

 

 

 

 

준명당(浚明堂)에서 바라다본 석어당(昔御黨 2층건물)과 중화전(中和殿 오른쪽)

이름(깊을浚 밝을明)처럼 한겨울의 햇살이  준명당(浚明堂) 앞뜰에 가득 합니다

 

 

 

 

석어당(昔御堂)은 임진왜란때 경복궁이 불에타자 선조가 임시로 거처하던 곳 으로서 선조는 이곳에서 승하 합니다 

임진왜란때 선조가 피란처에서 돌아와 승하할때까지 16년간 거처(경복궁은 왜구에 위해 소실) 했던 곳으로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던 곳이며  훗날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위폐당한 광해군이 이곳으로 끌려와 

인목대비앞에 무릎이 꿇리고 문초를 당한곳 입니다  

임금이 무릎을 꿇었다고해서 붙혀진 이름의  석어당(昔御堂)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2층 궁중건물 입니다   

 

 

 

석어당(昔御堂)의 아궁이와 내부구조(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입니다)

 

 

 

 

 

광해군

光海君

재위 1608∼1623.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혼(李琿). 선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공빈 김씨(恭嬪金氏)이다. 비(妃)는 판윤 유자신(柳自新)의 딸이다.

선조는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朴氏)에게서 소생이 없자,

공빈 김씨 소생의 제1왕자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을 세자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사람됨이 인륜을 저버리고 난포하다고 하여 보류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지 평양에서 서둘러 세자에 책봉되었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가는 길에

영변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분조(分朝)를 위한 국사권섭(國事權攝)의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 뒤 7개월 동안 강원·함경도 등지에서 의병 모집 등 분조 활동을 하다가 돌아와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멀리 거둥하여 임시로 머물어 있는 곳)에 합류하였다.

서울이 수복되고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조선의 방위 체계를 위해 군무사(軍務司)가 설치되자

이에 관한 업무를 주관하였다.

또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에서 모병·군량 조달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594년 윤근수(尹根壽)를 파견해 세자 책봉을 명나라에 주청했으나, 장자인 임해군이 있다 하여 거절당하였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왕위에 오르고 이듬 해 제15대 왕으로 책봉되었다.

이에 앞서 1606년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金氏)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탄생하였다.

광해군이 서자이며 둘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영창대군을 후사(後嗣)로 삼을 것을 주장하는 소북(小北)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 사이에 붕쟁이 확대되었다.

1608년 선조가 병이 위독하자 광해군에게 선위(禪位)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소북파의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감추었다가 대북파의 정인홍(鄭仁弘) 등에 의해 음모가 밝혀져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즉위한 후, 임해군을 교동(喬洞)에 유배하고 유영경을 사사(賜死)하였다.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이원익(李元翼)을 등용하고 초당파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려 했으나

대북파의 계략에 빠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한 정인홍이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청금록(靑衿錄: 儒籍)에서 삭제당하자 유생들을 모조리 퇴관(退館)시켰다.

이듬 해에는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으로 100여 인의 소북파를 처단했으며,

1613년 조령에서 잡힌 강도 박응서(朴應犀) 등이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과 역모를 꾀하려 했다는 허위 진술에 따라 김제남을 사사하였다.

또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삼아 강화에 위리안치했다가 이듬 해 살해하였다.

1615년 대북파의 무고로 능창군(綾昌君) 이전(李佺)의 추대 사건에 연루된 신경희(申景禧) 등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1618년 이이첨(李爾瞻) 등의 폐모론에 따라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에 유폐시켰다.

이와 같은 실정은 대북파의 당론에 의한 책동으로 빚어진 일이었다.

전란으로 인한 전화(戰禍)를 복구하는 데 과단성 있는 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1608년 선혜청(宣惠廳)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1611년 양전(量田)을 실시해 경작지를 넓혀 재원(財源)을 확보하였다.

선조 말에 시역한 창덕궁을 그 원년에 준공하고 1619년에 경덕궁(慶德宮: 慶熙宮),

1621년에 인경궁(仁慶宮)을 중건하였다.

이 무렵 만주에서 여진족이 세력을 확장해 1616년 후금(後金)을 건국하였다.

후금의 강성에 대한 대비책으로 대포를 주조하고,

평안감사에 박엽(朴燁), 만포첨사에 정충신(鄭忠臣)을 임명해 국방을 강화하는 한편,

명나라의 원병 요청에 따라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여 명을 주어 명나라와 연합하였다.

그러나 부차(富車) 싸움에서 패한 뒤 후금에 투항하게 하여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능란한 양면 외교 솜씨를 보였다.

또한, 1609년에는 일본과 일본송사약조(日本送使約條: 己酉約條)를 체결하고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했으며, 1617년 오윤겸(吳允謙) 등을 회답사(回答使)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병화로 소실된 서적의 간행에도 노력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용비어천가』·『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 등을 다시 간행하고,

『국조보감』·『선조실록』을 편찬했으며,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사고(史庫)를 설치하였다.

한편, 허균(許筠)의 「홍길동전」, 허준(許浚)의 『동의보감』 등의 저술도 이 때 나왔다.

외래 문물로는 담배가 1616년에 류큐[琉球]로부터 들어와 크게 보급되었다.

재위 15년간은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였다.

때문에 이에 불만을 품은 서인 김류(金瑬)·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 등이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광해군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에 이배되었다.

세자로 있을 무렵부터 폐위될 때까지 성실하고 과단성 있게 정사를 처리했지만,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대북파의 장막에 의해 판단이 흐려졌다.

또한 인재 기용에도 당파성이 두드러져 반대파의 질시와 보복심을 자극하게 되었다.

뒷날 인조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책략과 명분에 의해 패륜적인 혼군(昏君)으로 규정되었지만,

실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같은 반정에 의해 희생된 연산군과는 성격을 달리해야 한다.

묘호는 광해지군묘(光海之君墓)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광해군에 위해 이곳에 유폐된 인목대비와  인조반정으로 인목대비 앞에 무릎을 꿇었던 광해군도

그리고 봄볕 따스한날  꽃이 흐드러지게핀  자신을 바라보던 어린 덕혜옹주도 석어당의 살구나무는 기억하고 있겠지요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咸寧殿) 뒷뜰에 있는 정자인 정관헌(靜觀軒)은 러시아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로서

고종은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외교사절들과 연회를 즐겼다고 합니다

 

 

 

 

정관헌(靜觀軒)에서 바라다보이는 고종의 침전 이었던 함녕전(咸寧殿) 고종은 1919년 이곳에서 승하 합니다덕홍전(德弘殿)은 명성황후의 혼전(魂殿)이 있던 경효전(景孝殿)이 있던 곳으로고종이 고위관료와 외교사절을 맞이하는 접견실로 사용 하였읍니다

 

 

 

 

 

 고종황제가 고위관료와 외교사절을 맞이하는 접견실로 사용했던 덕홍전(德弘展)

이곳은 명성황후의 혼전(魂殿)이 있던 경효전(景孝殿)이 있던 곳 입니다

오른쪽 건물이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

 

 

 

 

 

 

 함령전 내부

 

 

 

 

 

 함령전과 회랑으로 연결된 행각

 

 

 

 

 

 왕의 침전(寢殿)이었던  함령전(咸寧殿) 뒷모습

 

 

 

 

 

함령전(咸寧殿) 뒷뜰에서 보이는 덕홍전(德弘殿)뒷모습과  석어당(昔御堂 오른쪽 2층 건물)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咸寧殿)을 둘러싸고있는 행각

 

 

 

 

행각(行閣)의 내부

 

 

 

 

덕수궁 미술관

 

 

 

덕수궁 미술관에서 바라본 석조전(石造殿) 정원

 

 

 

덕수궁 미술관에서는 구한말 격동기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정리해놓은 <대한제국 황실의 초상>전이 열리고 있었읍니다

 

 

 

 

 

 

 

함녕전(咸寧殿)의 정문 이었던 광명문이

함녕전과 멀리 떨어져있는 이곳으로  왜  옮겨져 있는지 궁금 합니다

이곳에는 조선 왕실의 원찰(願刹)인 정릉 홍천사에 있었던 종이 옮겨져 있읍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

원래는 창덕궁의 보루각(報漏閣) 에 있었던갓을 광명문 안으로 옮겨져 있읍니다

 

 왼쪽에 있는 신기전기화차(神機箭機火車)는

고려말 최무선의 주화(走火)라는 무기를 세종때 개발하여 만든 신병기로 

  한번에 100여발을 발사할수있는 다연장로켓포로서

제작당시의 설계도가 남아있는 병기들중 세계에서 최고(最古) 라고 합니다

 

 

 

 

 

덕수궁 구석에(비교적) 위치해있는 광명문 뒤에 버려지다싶이 모여있는 석제품들

악랄한 일제에 의해 훼손되고 파괴되어 버려진 편린들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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