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정수 장학회 (下 ) 본문
전두환은 언론통폐합을 통해 7개 재벌이 나눠가진 MBC 주식을 강제 인수해 KBS에 몰아주고30%는 장학회에 남겨주었다
전두환 쪽에선 박근혜 배려였고박근혜 쪽에선 경영권 박탈이었다
‘장학회 주식도 방문진이 흡수’ 김영삼 정부 방침 나오자마자 박근혜가 1995년 이사장에 취임
10년 뒤 강탈 의혹을 조사하자 최필립에게 자리를 물려줬다
10월21일 박근혜 후보는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한 입장 발표를 통해 많은 사람을 경악하게 했다.
여러 해 동안 자신의 아킬레스건으로 불려온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한 대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멋대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왜곡하고 있는 사실을 거침없이 드러낸 것이다.
정수장학회가 펴낸 <정수장학회 30년지>라는 장학회의 공식 역사 135쪽에
부일장학회-5·16장학회-정수장학회로 이어지는 법통의 계승을 분명히 인정해놓고 딴소리를 하니 참으로 갑갑할 뿐이다.
정수장학회 문제에서 가장 큰 문제는 50년 전의 강탈 자체보다도 그것을 강탈이 아니라고 우기는 박근혜 후보의 인식이다.
정수장학회 문제가 과거의 문제가 아닌 현재의 문제인 이유이다.
전두환, 장물바구니를 다시 털다
박정희가 집권 초기 부산일보, 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에 이어 경향신문을 빼앗은 것처럼
전두환도 집권 초기에 언론인 강제해직과 언론통폐합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전두환은 7개 재벌이 분산 소유한 것으로 되어 있던 문화방송 주식 70%를 강제로 인수해 한국방송공사에 줘버렸다.
(이 70%가 나중에 김영삼 정부 들어 방송문화진흥회 몫으로 바뀐다)
이로써 1991년 에스비에스(SBS) 서울방송이라는 새로운 민영방송이 등장할 때까지
한국의 방송은 한국방송공사와 문화방송의 양대 방송사가 독과점하게 되었다.
<한국방송 70년사>는 “케이비에스(KBS)가 70%의 주식을 현물출자하는 형식으로 인수하여
케이비에스가 엠비시(MBC)의 대주주가 됨으로써 엠비시도 공영방송사로서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서술했다.
박정희가 죽은 뒤 박정희의 유가족과 박정희의 정치적 아들 전두환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전두환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박정희의 유가족을 최대한 배려했다고 할는지도 모른다.
박근혜 자신이 2007년 대선 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전혀 꺼리지 않고 인정했듯이
전두환 쪽에서 박근혜를 청와대 비서실로 불러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쓰시다 남은 돈이다. 법적 문제가 없다. 생계비로 쓰시라”고 하면서 6억원(현 시세로 200억원)을 주어 박근혜는 “감사하게 받고 나왔다”고 한다.
12살 때부터 ‘공주’로 살아온 박근혜는 이 정도의 배려를 고맙게 생각했다기보다는 당연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전두환의 입장에서는 방송 공영화를 한다면서 무슨 근거로 5·16장학회가 문화방송의 주식을 계속 보유하게 하느냐는
언론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유가족 몫으로 문화방송 주식의 30%를 5·16장학회에 남겨주었다.
말썽 많은 영남대학교와 육영재단은 손도 대지 않고 고스란히 유가족에게 넘겨주었다.
이것은 전두환 입장에서는 법적으로 5·16장학회의 것이 아닌 주식을 케이비에스에 준 것이고,
박근혜 입장에서는 명의신탁해 놓은 것이나 다름없는 주식을 빼앗긴 것이다.
삼성 등 재벌그룹에서 총수 일가의 지분율은 3~4%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때 총수 일가가 보유한 주식 자체는 손대지 않으면서 경영권을 박탈한다면 총수 일가는 그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1980년 전두환이 문화방송 주식 70%를 떼어가 케이비에스에 준 것은
5·16장학회 입장에서 볼 때는 꼼짝없이 강도를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두환은 지방지의 경우 1도1사의 원칙에 따라 통폐합을 강력히 추진했다.
발행부수로 보나, 영향력으로 보나 국제신문이 부산일보를 흡수할 것이라고 사람들은 예측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부산일보가 국제신문을 흡수통합했다.
이것은 전두환 정권이 문화방송 개편 과정에서 그동안 관리해온 재산의 절반 이상을 빼앗긴 5·16장학회를 배려해준 결과였다.
언론통폐합과 방송 공영화의 격랑이 휩쓸고 간 지 약 1년이 지난 뒤인 1982년 1월6일, 5·16장학회는 임시이사회를 열어
재단의 명칭을 ‘재단법인 5·16장학회’에서 ‘재단법인 정수장학회’로 변경했다.
전두환 집권 후 박근혜의 이모부인 조태호가 이사장에 복귀하면서 5·16장학회는 박정희 생전의 공적인 성격을 잃어버리고,
박정희 일가와 그 측근들에 의해 사적으로 운영되는 법인으로 전락했다.
5·16장학회가 정수장학회로 이름을 바꾼 뒤 정수장학회 문제는 한동안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민주화가 시작되면서 박정희 정권의 사악한 언론장악을 상징하는 이 문제는 다시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일보는 4·19의 도화선 역할을 한 자랑스러운 기억 대신 5·16장학회로 넘어간 후 ‘숙명적 여당지’로 침묵과 굴종을 강요당했다. 1988년 7월11일 부산일보 노조는 ‘민주언론 쟁취’, ‘공정보도 우리의 소원’, ‘편집국장 내 손으로’ 등의 구호를 내걸고 파업에 돌입했다. 한국 언론 사상 최초의 파업인 부산일보의 파업은 전국적으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부산일보의 파업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서울의 다른 언론사 사주들이었다.
그들은 부산일보 사장 윤임술에게 노조에 굴복하여 편집권 독립이라는 ‘나쁜 선례’를 만들지 말라고 압력을 가했다.
전국 언론노조들과 부산시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부산일보 노조는 공격의 표적을 사장 윤임술에서 정수장학회로 돌렸다.
여러 언론이 정수장학회의 출생 비리 등 존립의 정당성 자체를 문제삼게 되면서,
정수장학회도 사장 윤임술을 해임하고 노조 쪽이 요구해온 편집국장 3인 추천제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업은 6일 만에 노조의 완승으로 끝이 났다.
김영삼의 약속과 오인환의 볼멘소리
부산일보 파업은 정치권으로 비화했다.
민주당 총재 김영삼은 파업 현장을 방문하여 국회 문공위원회에서 공청회를 열어
부산일보의 소유권 이전 경위를 살피고 현 사태의 해결방안을 모색하겠다고 약속했다.
뒤에 국회의장을 지낸 박관용은 국회 문공위에서 부산일보 사태를 단순한 편집권 독립 문제로 보아서는 안 된다면서
1962년 5·16장학회가 김지태 소유의 부산일보를 강제로 빼앗아 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25년 전 박관용이 정수장학회가 부산일보 주식 100%를 보유하게 된 것 자체를
“잘못됐다 솔직하게 뉘우칠 줄 알아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한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불행하게도 국회는 더 이상 정수장학회 문제를 파고들지 못했다.
현재의 언론문제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5·16 직후 박정희의 언론장악 문제가 있다는 것을 다들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국회는 최근의 광주학살과 5공 비리 문제를 파헤치기에도 역부족이었다.
출범 첫해인 1993년 7월 김영삼 정권은 방송위원회 산하에 공영방송발전연구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위원회가 내놓은 ‘공영방송 발전방안’은 문화방송에 대해
“공영성 확보를 위해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의 위상 재정립을 전제로
현재 정수장학회가 소유한 30% 주식지분을 방송문화진흥회가 흡수한다”는 방침을 제시했다.
이 방안은 일부에서 제기되어온 문화방송의 민간상업방송화 또는 민영화에 반대하고 공영성 강화를 제시했다.
공보처는 1995년 7월14일 국회 문공위에 ‘선진방송 5개년 계획’을 보고하면서
문화방송의 공영방송으로서의 위상 강화를 위해 엠비시 본사의 주식보유 구조를 개선하겠다고 보고했다.
당시 김영삼의 최측근인 박종웅 의원은 공보처 장관 오인환에게
장관 취임 2년이 넘도록 정수장학회가 보유한 엠비시 주식 문제에 대해 애매모호한 답변만 늘어놓고 있다면서,
차제에 방송관계법을 고칠 때 엠비시 주식 소유 문제도 확실하게 방침을 정하라고 촉구했다.
같은 편인 박종웅에게 닦달을 당한 오인환은 볼멘소리로
“정수장학회를 대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정수장학회의 대표성을 문제삼았다.
물론 정수장학회에는 이사회를 대표하는 이사장이 있고 법률적인 책임과 권한을 갖는 이사진이 있었다.
그런 상황을 뻔히 아는 공보처 장관이 정수장학회를 대표하는 사람이 없다며 ‘정수장학회의 대표성’을 문제삼고 나온 것이다.
당시 정수장학회의 이사장은 서울대 농대 조경학과 교수로 있던 김귀곤이었다.
김귀곤은 당시 50대 초반의 비교적 젊은 나이였는데 1963년 제1회 5·16장학금의 수령자였다.
김영삼 정권이 정수장학회가 보유한 문화방송 주식 30%를 방송문화진흥회에 넘기라고 요구하자
김귀곤은 자신은 그런 중대한 문제를 결정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고 버텼을 것이다.
공보처 장관이 국회에서 정수장학회의 대표성을 문제삼은 것은
재단 기본재산의 처분을 결정할 만한 실질적 권한도 상징적 권리도 갖지 못한 ‘바지사장’ 대신 재단의 ‘실소유자’로 인식되고 있는
박근혜를 콕 집어 불러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임기가 1년가량 남아 있던 김귀곤이 물러나고 박근혜는 1995년 9월2일 정수장학회의 이사장에 취임한다
박근혜는 전두환이 퇴임하고 난 뒤 처음 맞는 박정희의 기일인 1988년 10월26일을 앞두고
자신을 회장으로 하는 ‘박정희대통령 육영수여사 기념사업회 및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박근혜로서는 매우 오랫동안 고대해온 일이지만, 상황은 몹시 꼬여 있었다.
7월의 부산일보 사태로 정수장학회가 사회적 논란의 핵심이 된데다,
8월 초에는 10·26 직후 청와대의 박정희 집무실에서 발견된 6억여원이 박근혜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이 처음 보도되면서,
박정희의 청렴성에 대한 신화가 산산이 깨져버렸다.
박근혜는 박정희가 퇴임 뒤를 대비하여 만들었다는 영남대학교의 이사장에 박정희 사후인 1980년 4월24일 취임했지만,
학내의 반발로 그해 11월8일 이사장직에서 물러나 평이사로 재임해왔다.
민주화의 열기 속에 영남대에서는 재단이사들이 깊숙이 관계된 부정입학 사건이 폭로되었다.
이 사건으로 영남대 재단이사장 조일문과 상임이사 김정욱, 이사 박근혜, 김창환, 손미자 등이 물러났다.
이들 중 김창환은 정수장학회에서 이사장, 손미자는 상임이사, 김정욱은 이사를 지냈다.
부산일보 사태와 영남대 사태로 극도의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탓인지 정수장학회 이사장 조태호는 그해 연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박근혜는 부산일보 파업과 영남대 부정입학 사건으로 대단히 곤란한 상황이었지만
박정희의 9주기 추도식과 박정희, 육영수의 기념사업을 밀어붙였다.
특히 기념사업을 위해서는 신문에 광고를 내고 자신의 이름으로 된 계좌번호를 제시하면서
기념관 건립을 위한 성금을 보내줄 것을 호소하였다.
박근혜-박근영-박지만 재산싸움의 뿌리
박근혜가 아버지의 추도식과 부모의 기념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배후에는 최태민 목사가 있다는 설이 파다했다.
조태호가 죽은 뒤 박정희 유가족의 갈등은 본격화되었다.
1990년 가을 박근혜와 박근영(박서영) 자매는 육영재단의 관리권을 놓고 골육상쟁을 벌였다.
박근혜는 1982년 10월 8년간 맡아온 육영재단 이사장 자리를 동생 박근영에게 빼앗기다시피 물려주게 되었다.
박근영과 박지만은 1990년 8월14일자로 A4용지 12장 분량인 장문의 탄원 편지를
당시 대통령 노태우와 다수의 유력인사에게 보냈다고 한다.
박근영과 박지만의 이름으로 쓰여진 이 편지는, 본문에서 박근혜를 ‘언니’로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박근영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진정코 저희 언니(박근혜)는 최태민씨에게 철저히 속은 죄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속고 있는 언니가 너무도 불쌍합니다!
대통령의 유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없고 또 함부로 구원을 청할 곳도 없었습니다”라며
최태민이 “유족이 핵심이 된 각종 육영사업, 장학재단, 문화재단 등 추모사업체에 깊숙이 관여해
회계장부를 교묘한 수단으로 조작하여 많은 재산을 착취”했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이어 최태민이 “부모님의 유덕을 기리는 기념사업회를 형식적으로 만들어 놓고
이름만 ‘박정희대통령 육영수여사 기념사업회’이고 실제 내용은 최태민 기념사업회로 전락해 가고 있다”고 탄식했다.
박근혜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최태민은 자기를 도와준 고마운 분이라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정수장학회는 박정희의 ‘정’과 육영수의 ‘수’를 따서 만든 이름이다.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이 서울 중구 정동 사무실 벽에 걸린 박정희 전 대통령 부부의 사진 앞에서 자세를 취했다. |
박근혜 후보는 정수장학회와 자신은 아무 관련이 없으며,
정수장학회는 공익법인이기 때문에 개인의 사유재산 운운함은 근거 없는 비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수장학회, 육영재단, 영남대학교 등이 개인이 손댈 수 없는 재산이라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부모를 가진 친형제 간에 청부살인이니 납치니 하는 험한 꼴을 보이며 20년간 싸우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1995년 정수장학회 이사장에 취임한 박근혜는
2005년 국정원 과거사위원회가 부일장학회 강탈 의혹 사건의 조사에 착수하자 이사장직에서 물러났다.
박근혜의 후임으로 이사장을 맡은 사람은 유신시대에 청와대 비서관으로 ‘영애’ 담당 업무를 맡은 최필립이었다.
국정원 과거사위원회 조사과정에서 최필립을 만났을 때,
그는 박근혜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를 1970년대 중반 자신이 청와대 의전비서관으로 있을 때
박정희가 불러 박근혜가 어린 나이에 중책을 맡아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도와주라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때 박정희는 최태민의 이름을 콕 집어 말하면서
그런 자가 박근혜 옆에 얼씬대지 못하도록 최필립이 박근혜를 잘 도와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요컨대 박정희는 최필립을 최태민으로부터 박근혜를 지키기 위한 안전장치로 박근혜의 곁에 두었던 것이다.
10·26사건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궁정동 현장에 있었던 김계원은 조갑제와 행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판단을 잘못해서 최태민의 마크맨으로 최필립을 추천하게 되었다고 후회했다.
김계원에 따르면 비서실장인 자신에게 최필립을 추천한 것은 의전수석 최광수였는데,
최씨 몇이 몰리게 되면서 최태민과 최필립이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조갑제가 “참 이상한 게 그전의 박 대통령 같으면 최태민을 잡아넣었을 텐데”라고 말하자,
김계원은 “한번은 ‘야단치려고 해도 에미 없는 것이 불쌍해서 눈물 나더라’고 하시던데요”라고 답했다.
70년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란 노래가 유행했지만, 동정은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그 값싼 동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최필립은 정수장학회 이사장 자리에서 버티고 있다
ㅡ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중에서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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