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그 피디·작가들은 다 어디로 갔나 본문

韓半島

그 피디·작가들은 다 어디로 갔나

매루 2012. 11. 7. 07:18

 

 

 

 

 

한국 언론은 외국 언론보다 유독 정정보도에 인색하다. 언론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이를 정직하게 바로잡는 게 되레 신뢰를 쌓는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현실에선 거꾸로 가기 일쑤다. 어떻게든 뭉그적거리고, 정정을 해도 가급적 눈길을 끌지 않는 방법을 찾는다. 정정보도가 한국 언론의 수준을 재는 잣대로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그런데 <문화방송>(MBC)이 상궤에서 벗어나는 일을 하고 나섰다. 시킨 사람도 없는데 대문짝만하게 ‘내가 잘못했소’라고 고백한 것이다. 큰 박수가 터져 나왔어야 마땅하나, 웬걸? 법원이 엠비시에 거꾸로 “사과 내용이 잘못됐으니 정정보도를 하라”고 판결했다. 정정 대상은 지난해 9월5일 ‘뉴스데스크’가 ‘피디수첩’의 광우병 보도에 대해 낸 사과방송이다. 대법원이 무죄를 확정했는데도 회사 쪽이 사과방송을 하자 피디수첩 제작진이 제기한 정정보도 청구소송의 결과다. 언론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황당무계한 상황이다.

법원 판결로 다시 한번 드러난 것은 김재철 엠비시 사장의 민낯이다. 정부에 장단을 맞추느라 진실도, 회사 간판 프로그램의 명예도 내팽개쳤다. 피디수첩이 어떤 존재인가? 방송 15주년을 기념하는 피디수첩 특집 프로그램(2005년 5월31일)의 한 대목이다. “피디수첩은 능력이 모자라 비판하지 못한 적은 많았지만 압력 때문에 피해 간 적은 없었다.”

조금 낯간지러운 ‘자랑’이지만 고개가 끄덕여진다. 피디수첩은 1990년 첫 전파를 탄 이래 줄곧 한국 피디저널리즘의 대표 자리를 지켜왔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변칙 상속 의혹(2000년),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조작(2005년) 등 우리 사회를 뒤흔든 굵직한 이슈들을 터뜨렸다. 언론계에서 심층탐사보도는 기자들이 아니라 피디들의 몫이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다.

하지만 김 사장 아래서 피디수첩은 더이상 피디들의 ‘꽃’이 아니다. ‘무덤’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관련 기획은 미국 현지취재까지 마쳤지만 결국 불방됐다. ‘이명박 대통령 국가조찬기도회 무릎 기도 파문’을 비롯해 ‘4대강 공사현장의 잇따른 사망사고’, ‘한상대 검찰총장 청문회 관련 검증’ 등 18개 주제는 사전검열로 취재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하나같이 정권에 ‘뜨거운 감자’들이다.

피디들의 수난도 눈물겹다. 2011년 3월 최승호 피디 등 5명이 갑자기 퇴출됐고, 5월엔 이우환·한학수 피디가 제작과 무관한 부서로 쫓겨났다. 같은 해 9월에는 ‘광우병’ 편을 제작한 김보슬 피디와 조능희 부장 등 5명이 중징계를 받았다. 올해 들어선 170일에 걸친 노조 파업으로 임경식 피디 등 7명이 대기발령이나 위탁교육, 타 부서 전출 등의 조처를 당했다.

그런데도 끝이 아니다. 노조가 파업을 풀었지만 여태껏 피디수첩은 시청자와 만나지 못하고 있다. 피디수첩과 4~12년 동안 호흡을 맞춰온 작가 6명이 모두 해고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나마 피디수첩에 남아 있던 피디 7명도 전원 방출을 통보받은 상태다. 해고작가 대신 회사가 뽑은 4명의 대체작가와 일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이유에서다.

이 지경이니 피디수첩은 말살된 것이나 다름없다. 회사 쪽은 비판정신이 뿌리뽑힌, 정권과 경영진의 입맛에 충실한 피디수첩을 원할 뿐이다. 엠비시의 생각은 지난해 피디들과 취재 주제를 놓고 다투던 당시 피디수첩 부장이 내뱉은 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피디수첩은 조용해야 한다. 세상이 조용하면 피디수첩은 시끄럽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언론사에 영원히 기록될 ‘명언 중 명언’이다. 나중에 이 부장은 국장으로 영전했는데, 땀흘렸던 그 피디·작가들은 다 어디로 갔나.

정재권 논설위원 jjk@hani.co.kr

 

 

 

 

 

715

 

'韓半島'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성대통령과 각서  (0) 2012.11.30
성공보다 중요한 일 : 만해 한용운  (0) 2012.11.07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발언  (0) 2012.11.04
정수 장학회 (下 )  (0) 2012.10.27
정수 장학회 ( 上 )  (0) 2012.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