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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꽃 이야기

해당화

매루 2017. 5. 24. 13:45

 

 

 

농삿일에 눈코뜰새 없이 바쁜 나날들 입니다

새벽 4시반부터 저녁 7시반 무렵까지 하루종일 밭에서 지내는 고된 일상 이지만

1년 전체를 놓고볼때 농부는 잠시 거들뿐이고

1년 대부분의 시간동안 해. 비. 바람등 자연이 해주는것이  농사 이라고 늘 여기며 기꺼이 고된 봄날을 보내고 있읍니다

그러던중 어제 인천에서 이웃으로 지내던 아주머니 4분이 영흥도에 나들이를 오셨읍니다

 아녀자들만 모여있는곳에 함께 있기가 쑥스럽기도하고

유교사상에 의한 윤리에 아직까지 비교적 투철한 저이기에  유교덕목중의 하나인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에 입각하여

오랫만에 집과 밭을 벗어나 영흥섬 구경을 하였읍니다 

 

 

 

 영흥섬에 있는 종합운동장 주변에 해당화가 피어 있었읍니다

요즈음 영흥섬에는 이 해당화와 아카시아꽃 향기로 온통 황홀한 기분 입니다

 

 

해당화는  한반도의 바닷가의 모래땅이나 산기슭에 자라는 장미과(薔薇科 Rosaceae)에 속하는 낙엽 활엽관목식물로

 5~8월경 줄기끝에 1개 또는 2~3개의 붉은색(간혹 흰색도 있음)의 향기가 진한 꽃이 핍니다

꽃에 방향성 정유(예를 들면 페닐에틸알코올·벤질알코올·제라니올·벤조산)가 많아 향수의 원료가 되기도 합니다

저희들 젊은시절에 바닷가여행을 다니다보면 한반도의 바닷가는 공통적으로 바다~모래밭~해당화밭~솔밭~육지로 이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각종개발로 바다 ~모래밭~도로~건축물로 모양이 변하였읍니다

이곳 영흥섬에서도 원래는  바닷가에  살고 있었을 해당화들이 영흥섬이 섬이라는 상징물로 바닷가가 아닌 도로 주변이나

공공기관의 울타리에 옮겨 심어져 있읍니다 

 

 

 

 

 

 

저희집의 경우에는 제가 중학교에 입학을 한해(1967년)에 TV를 들여 놓았는데

TV가 놓이기 전까지 저희 부모님들 께서는 밤이면 라디오 연속극을 즐겨 들으셨었지요

 

제가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른 1966년 겨울께에 저희 부모님들께서 즐겨 들으셨던 라디오 연속극들 중에 <섬마을 선생님>이 있었읍니다

연속극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연속극의 주제곡인 <섬마을 선생님>노래의 인기는 지금도 기억이 또렷 합니다

항간에는 사범대학교의 교가라 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모으기도 했었으니까요

 

 

모처럼의 한가함을 누리던중에 만난 해당화꽃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과 추억들을 떠올려 보았읍니다

 

 

 

 

 

 

 

 

 

 

 

 

 

 

 

 

 2012년 5월 21일 영흥도

 

 

 

 

 

 

 

 

 

 

 

 

2011년 6월 1일 영흥도

 

 

 

 

 

 

 국산 흑백 TV  1호제품  금성 흑백 TV VD-191 (1966년) 

   

 

     한국에 최초로 TV수상기가 등장한 것은 1954년 7월 30일, 미국 RCA사 한국 대리점에서 20인치 화면의 폐쇄회로 TV수상기를 일반 시민에게 공개하면서였다고 한다. 국영 TV가 개국하기 전이었으니, 당시에는 TV수상기를 보는 것 자체가 진귀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1958년 TV의 보급 대수는 7,000여 대 정도로, 이는 주로 미군 PX에서 밀매 또는 유출된 물건들이었다. 1961년 국영 KBS-TV가 개국하면서 공보부에서 1차로 TV수상기 2만 대를 도입해 월부로 보급하면서 TV의 수요가 늘어나고 일반인들의 관심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금성사에서 국산 최초의 흑백 TV를 생산한 것은 이러한 맥락 속에 있었다.
 
 국산 흑백 TV 1호인 VD-191이 생산된 것은 1966년 8월. ‘진공관식 19인치 1호 제품’이라는 뜻의 ‘VD-191’은 진공관 12개와 다이오드 5개를 채택하고 4개의 다리가 달린 가정용 제품이었다. 이 제품이 생산되기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금성사는 1963년부터 TV 생산계획을 입안하고 생산기술과 시설을 도입하며 TV 생산을 준비해왔으나 1963년 외환위기가 시작되고 전력 사정이 나빠지면서 부품의 수입이 허가되지 않았다.
 금성사는 1965년 TV과를 신설하고 일본 히타치제작소와 기술도입 계약을 체결하는 등 생산준비를 계속 진행하는 한편 정부로부터 TV 생산을 위한 허가를 얻어냈다. 정부 공보활동의 확장 강화, 국영 TV방송국의 운영 합리화, 국민 경제 발전 및 수출 촉진에 따른 외화 획득, 국민 계몽 및 문화 향상 촉진, 국내 전자공업 발전, TV 부정 유출 방지와 국고 세입 확보 등 6가지 이유를 제시, 사실상 ‘정부와의 동업’을 조건으로 정부에 TV 국산화의 필요성을 설득한 것이다.
 
 이때 정부는 금성사의 TV 생산에 국산화율이 50% 이상이어야 한다, TV용 부품 수입은 라디오 등 다른 전자제품을 수출해서 버는 외화만큼만 허용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외화 사정을 감안해 수출입 링크제를 채택한 것이었다. <금성사 35년사>에 의하면, 당시 금성사는 그 무렵 80% 이상 국산화율을 달성한 라디오 생산 기술을 최대한 활용해, 텔레비전 국산화율은 처음부터 50% 수준을 달성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당시 TV의 시가는 19인치의 경우 일제가 10만 원, 미제가 13만 원 정도였으며, 국산화될 경우의 19인치 가격은 8만 7,683원으로 산출되었다. 이 중에는 제세공과금이 4만 2,000원으로 전체의 50%에 육박해, 특판세와 물품세가 TV가격 상승의 주요인이 되었다. 금성사에서는 특판세가 비정상 수입품의 가격 체계에 입각한 것으로, 이를 TV 생산을 위한 부품에 적용하는 것은 모순이며 물품세는 국산화 이전의 외국 완제품 사용 억제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을 들어, 세금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정부를 설득했다. 결국 상공부는 1966년 7월 9일, 1차 생산된 500대의 판매 가격을 대당 6만 3,510원(19인치)으로 할 것을 승인했다. 이 가격은 총원가 4만 4,427원에 적정 이윤 10%, 물품세 30%가 가산된 것이었다.
 
 80kg짜리 쌀 한 가마가 당시 2,500원이었던 걸 감안하면 쌀을 25가마 넘게 살 수 있는 고가였음에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1966년 8월 28일자 신문(조선일보)에는 “은행창구를 통한 TV수상기 구입신청 경쟁률이 평균 20대 1”이었으며, 특히 “10개월 월부 판매”의 경우는 “50대 1의 격심한 경쟁”을 보였다고 쓰여 있다. 금성사가 계획한 1차 공급량은 약 1천 대였음에 반해 이 제품이 출시되자 열흘간 구입 신청된 물량만도 서울시내 1만 4천 8백 건, 전국적으로 2만여 건에 달해, 금성사 1차 공급 계획량의 20배에 달했다. TV무소유 우선공급제도에 의해 사람들은 TV가 없음을 증명해야 했고, 그마저도 공개 추첨으로 판매되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히타치사와의 기술제휴로 만들어진 VD-191은 기술뿐만 아니라 외형까지 그대로 들여온 것으로, 입식 모델에 토대를 둔 일본 모델을 그대로 생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텔레비전을 구입하는 가정은 대부분 중상류층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입식 생활에 적합한 텔레비전 디자인이 이들에게는 잘 맞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문화주택의 응접실에서 소파나 의자에 앉아 텔레비전을 시청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텔레비전의 외형은 1967년 동남전기공업이 일본의 이야카와 제휴하여 샤프 TV를 생산하고 한국 마벨은 미국의 RCA사와 제휴하여 RCA TV를 생산하는 등 TV 생산과 보급이 늘어나게 되면서, 좌식 생활에 맞춰 - 아랫목에 앉은 시청자의 눈높이를 고려한 - 변형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출처: 네이버 한국의 생활 디자인
[출처] 한국 최초 수상기, 금성 TV VD-191|작성자 찬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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