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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매루 2022. 1. 31. 09:07

설날  구정  음력설  민속의날  설날 

신정 양력설 왜놈설

 

 

국가기록원이 어제 공개한 설날 관련 기록물을 들춰보니 ‘음력과세방지에 관한 건’이 눈길을 끈다.

1954년 입안된 이 정부 문건에는‘광신적 제반 인습은 무지한 대중생활에 뿌리 깊이 만성화한 암적 존재이므로

이를 급속히 시정해 민족문화 발전에 일대 혁신을 기해야’운운하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전근대적 악습으로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주범으로 묘사된 것은 음력설이다.

이런 인식과 함께 정부는 10여 가지의 강력한 지시를 내렸다.

세배 다니지 말 것, 떡방아ㆍ가축도살ㆍ밀주조 단속, 일반 상가 철시 금지 등이다.

▦ 음력설은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오랜 세월 푸대접을 받았다.

을미개혁으로 1896년 태양력을 수용하면서 전통 명절인 음력설이 사라지고 양력 1월1일이 공식적인 ‘설날’이 됐다.

그러나 개혁이 민중들의 반발에 부닥치면서 그때부터 양력설은 ‘왜놈 설’로 치부됐다.

음력설을 쇠는 것은 마치 독립운동을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일제는 음력설을 말살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떡방아간을 폐쇄하고 흰 옷을 입고 세배 다니는 사람들에게 검은 물이 든 물총을 쏘아 얼룩이 지게 했다.

▦ 해방 이후 이승만, 박정희 정부가 계속 음력설을 인정하지 않은 이유는 이중과세 폐단이었다.

그럼에도 음력설은 꺾이지 않았고 논란은 매년 이어졌다.

1981년에는 정부에서 ‘신정과 구정’이라는 장문의 보고서를 내놨는데 논리가 걸작이다.

구정을 공휴일로 하자는 주장은 고유풍습을 계승하자는 관점에서 나온 것인데

제사와 세배는 구정 날 아침이나 저녁에 하면 되니 굳이 쉬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한다.

민속놀이는 여가를 활용하면 되고, 도시근로자 귀성은 신정연휴나 크리스마스에 가면 될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명절이라 해서 반드시 공휴일이어야 할 이유가 없음이 증명됐다고 멋대로 결론지었다.

▦ 음력설은 1985년 ‘민속의 날’이라는 어정쩡한 이름으로 절반쯤 복권됐고, 89년에야 완전히 명예를 되찾았다.

정부는 음력설을 ‘설’이라 명명하고 사흘간의 휴무를 줬다.

우리가 지금 당연한 듯 쇠고 있는 설에는 스스로를 낮추고 폄하했던 아픈 역사가 스며있다.

이런 의미를 안다면 구정이니 신정이니 하는 용어와 음력설이니 양력설이니 하는 명칭도 사용하지 않는 게 좋다.

설은 음력 1월1일 하나뿐이다.

 

2015.02.17 16:10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k.co.kr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신리(新里)에 사는 고무(고모)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토산(土山)에 사는 고무 고무의 딸 승려(承女) 아들 승(承)동이

큰골에 사는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사춘누이 사춘 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안채)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식사시간)의 두부와 콩나물과 뽂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작은설의 흥겨움을 가장 진듯하고 뜻 깊게 나타낸 詩.

 

여우난골족(여웃골에 사는 친척들)

백석 詩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곰보) 말수와 같이 눈도 껌적거리는(말을 할때마다 눈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벌판)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고모)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파르스름하니) 성이 잘 나는(화를 잘내는) 

살빛이 매감탕(엿을 곤 솥을 씻은물, 진한 갈색물)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예배당이 있는 동네)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려(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접 붙이기)을 잘 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섬돌)을 뽑는 오리치(오리 올가미)를 잘놓는

먼섬에 반디젓(벤댕이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엄매

 

사춘누이 사춘 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안채)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식사시간)의 두부와 콩나물과 뽂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숨바꼭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아랫칸)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공기놀이)하고 쌈방이(주사위) 굴리고 바리깨(밥주발 두껑)돌림(돌리기)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서로 다리를 끼고 마주앉아 노는 놀이)하고

이렇게 화디(등잔을 얹어 놓은 기구)의 사기방등(사기로 만든 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새벽닭)이 몇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 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처마의 안 쪽 지붕이 도리에 얹힌 부분)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 문틈으로

무이징게국(무우를 넣은 징게미새우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유습이 돼버린 전통, 한때는 저항과 혁신이었던 시절도

[정문순 칼럼]

 

 설날이라고 하면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설날’)로 시작하는 노래다.

명절이라고 해서 새 옷과 새 신이 생기지 않는 요즘 아이들에게 설날은 초콜릿을 주고받는

정체불명 서양 명절만큼의 흥분도 없는 날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게는 여전히 설이라고 하면 어린 시절 살얼음이 낀 차가운 수정과, 상어고기(돔베기), 모두배기떡(잡과병) 

풍성한 차례 음식들이 눈앞에 선연해짐과 함께 명절 기념 동요와도 같은 이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크리스마스 못지않은 명절이듯이

예전에는 설 전날(까치설이라 불리는 작은설날)도 설날에 버금가는 명절이었다

19세기 중엽에 나온 <동국세시기>에는 섣달 그믐날 저녁에

그해 남은 음식이 해를 넘어가지 않도록 밥과 반찬을 비벼먹는 풍습이 있다고 되어 있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오늘날 비빔밥의 유래를 찾는다.

어쨌든 평소에 안 하던 일을 하는 세시풍속이 있다는 건 조상들이 작은설을 명절로 당당하게 즐겼다는 뜻이다.
 또 굳이 문헌의 증거가 없어도 일상에서 섣달 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쇤다느니 하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작은설의 흥겨움을 가장 진듯하고 뜻 깊게 나타낸 이는 근대 시인 백석이다
  백석이 살았던 20세기 초엽 평안북도 정주 지방 풍속도 설 하루 앞날인 작은설은

설날 못지않은 명절이거나 명절의 시작이나 진배없었으며,

밤이 깊어지고 설날이 다가올수록 온 집안이 붐볐음을 알 수 있다.

섣달 그믐날 저녁은 하루가 저무는 때가 아니라 설날의 실질적인 시작인 셈이었다.
 어른들은 새벽에 일어나 음식을 장만해야 함에도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우고,

아이들은 저녁을 먹고 나서부터 새벽닭이 울 때까지 지치지도 않고 하룻밤 사이에 무려 12가지 놀이를 즐긴다.

아이들에게는 이때가 사실상 명절의 본령이었다.

새벽닭이 울 때도 자리다툼하는 놀이를 하고 나서야 잠에 곯아떨어진 아이들에게,

설날 아침은 부엌에서 시누이와 동서들이 북적거리는 부엌에서 풍기는 맛있는 냄새가 잠을 깨울 때까지

단잠을 곤히 자는 한밤중이다
 

사람들은 도시로 돈 벌러 떠나야 했고 식민 체제는 전통 풍습을 미신이라고 배격했다.

일제는 원단(元旦: 한 해 첫날 아침)’으로 불리던 으뜸 명절인 설을 이중과세라는 이유로 없애고

자신들이 지내던 양력 설과 통폐합해 버렸다.

우리가 아는 대로 설날이 명절 지위마저 빼앗긴 채 구정으로 격하된 수모는 무려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백석이 장성했을 당시에도 이미 전통은 파괴되거나 사라지고 있었다.

시인에게 풍요로운 명절 풍습이나 겨울철 별식을 즐기는 일은 그가 아이였을 때에나 가능했던 일이었다.

시인이 세상 물정을 아는 어른이 된 당시에 그런 시절은 이미 사라져가고 잇었다  
 
유년 시절의 풍성한 식탐을 즐겨 회고하는 백석의 시는 겉으로는 더없이 풍요롭고 포근하지만

 그럴수록 외롭고 쓸쓸한 실상을 감추지 못한다.

백석이 시를 쓸 때 유년기의 전통은 벌써 죽은 과거가 되어 있었다.
 
전통으로 알려진 것들 중에는 타파해야 구습이나 케케묵은 유습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 중에는 힘겹게 지켜온 삶의 소중한 가치를 뒤엎으려는 세상의 도전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읽어내야 하는 것도 있다.

근대화 바람이 몰아치고 제국주의 침탈을 받던 시대에 전통을 기억하고 되살리는 시인의 작업은

그만큼 혁신적인 의미를 띠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세상이 또 달라졌으며 전통을 잇는다는 것에서 혁신은커녕 대단한 의미를 찾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개혁이나 저항의 적극적인 의미를 읽어내기는커녕

여성의 노동력과 감정을 착취하는 원성의 표적으로 전락한 오늘의 명절에서 보듯,

전통이라는 것들은 오히려 세상의 변화를 가로막는 훼방꾼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오래 전에는 그 반대의 의미를 띤 시절도 있었다는 것만큼은 기억할 만하다.
 
 iCOOP소비자활동연합회 시민기자단 블로그에 게재된 글을 손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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