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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성탄절괴 박혜령

매루 2017. 12. 23. 00:11

 

 

 

 

성탄절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도 전반적인 경기침체 때문인지 거리에서 성탄축하음악(christmas carol)이 들리질 않습니다

백화점이나 거리의 상점들에서는 성탄절 축하음악들의 저작권 문제 때문에 함부로 틀지를 못한다고도 합니다

 

더벅머리 청년시절 이었던 1970년대 초반의 성탄절을 떠올려 보다가

당시 5살 이었다는 박혜령 어린이의 캐롤과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어 발디딜틈없이 몰려나온 동인천역 일대의 크리스마스 이브라 불리우는 성탄전야가

60을 훌쩍 넘긴 저의 눈과 마음에 선해 집니다 

 

 

 

 

 

 

 

 

 

70년 12월 6일호 <썬데이서울> 기사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검은고양이 네로』부른 박혜령(朴慧鈴)어린이

 


「이탈리아」의 「칸조네」한국판 『검은 고양이 네로』가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며 「베스트·셀러」로 등장.

 홍현걸(洪鉉杰) 역사·편곡에 5살짜리 박혜령양이 부른 이 노래가 의외의 좋은 반응을 불러 일으키자

몇몇 「레코드」사에서는 뒤쫓아 『검은 고양이-』제작에 열을 올리고 있는가 하면

 이를 복사한 도용판까지 등장하고 있는 판국이다.

맨처음 「디스크」를 낸 지구(地球)는 판을 찍기가 무섭게 팔려 『동백아가씨』이후의 경기라고 즐거운 비명을 올리고 있다.

정확한 숫자는 밝히지 않고 있으나 발매 2주만에 1만장 정도는 팔렸을 거라는 추측.

『유아(幼兒)를 상품화시켰다』는 비난(?)이 없지도 않으나

『아이들도 좋아하고 어른들은 귀엽게 받아들여 화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

이 노래의 역사(譯詞) 편곡 그리고 박양을 「픽·업」한 작곡가 홍현걸씨의 말이다.

지구「레코드」사쪽은 『검은 고양이 네로』복사판이란 것을 내세울 뚜렷한 증거물은 입수하지 못했으나

「크리스머스·카드」형식으로 「레코드」에 복사된 『검은 고양이 네로』의

「소니·시트」 가 대학가 주변에서 날개돋친 듯 팔리고 있다는 것.

『검은 고양이 네로』는 서울뿐만이 아니고 차차 지방 도시에 까지도 파급되면서 「붐」을 일으키고 있다.

그래서 최근 계속 「슬럼프」상태였던 지구「레코드」를 돈방석위에 올려놓게 되었다고.

 

[선데이서울 70년 12월 6일호 제3권 50호 통권 제 114호]


 

 

 

 

 

 
 

(성탄절)하루 전, 이 때쯤이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드디어 내일은 12월24일, 성탄전야(聖誕前夜). 목 빠지게 기다리던 '통금(通禁)'이 풀리는 날이었다.

일 년 만에 맞게 되는 이 금쪽같은 시간을 어디서 어떻게 누구랑 함께 지낼 것인가.

종교를 떠나 어른이고 얘고 가릴 것 없이 모두들 설렘 반 기대 반이었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밤 12시가 넘으면 절대로 다니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지면 하던 일을 멈추고 서둘러 헤어져야만 한다.

국민 모두가 신데렐라처럼 신발 한 짝 흘리고 집으로 내달려야 했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 다음날인 1945년 9월9일부터 1982년 1월4일 까지

36년 4개월가량 우리 국민은 통금체제에서 살아왔다.

일 년 내내 통금이 실시된 것은 아니었다.

성탄절 전야와 한해의 마지막 날(31일)에는 한시적으로 통금을 해제했다.

이런 날 집에 있으면 안 되는 것처럼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곤 배회했다. 젊은 청춘들은 부나비처럼 화려한 불빛을 쫓아 동인천과 신포동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자정을 넘어 거리를 쏘다니는 게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추운 날씨에 딱히 갈 곳도 없었다.

대목을 노린 다방은 2부제로 운영했다.

자정까지 한번 그리고 커피를 마시든 말든 상관없이 자정 이후에 다시 찻값을 받았다.

여관이나 여인숙은 웃돈을 주고 예약을 해야 했다.

그나마 방이 없어 아기 예수처럼 '마굿간'을 찾아 헤매야 할 판이었다.

당시 '크리스마스 베이비'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창고를 개조한 신흥동의 고고장들은 불야성을 이뤘다. 

 정원의 두 배 이상 입장시켜 몸을 흔들기는커녕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

 시내 곳곳에서 '시한부 해방'에 대한 일탈이 벌어졌다.

파출소마다 폭행, 소란, 무전취식 등 경범죄자들로 꽉 찼다.

그 밤은 너무 짧았지만 이야기는 결코 짧지 않았다. 

당시 정권은 그 밤에 뭘 하려고 국민의 밤을 빼앗았을까. 왜 잠들게 했을까.

지나고 보니 그들의 밤은 결코 거룩하지도 고요하지도 않았다.

밤을 어떻게 지내느냐에 따라 국가든 개인이든 흥망이 엇갈린다.

올해의 남은 밤을 잘 보내야겠다.

"메리 크리스마스!"  

굿모닝인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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