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운길산 수종사(2010년 1월 23일) 본문

나들이

운길산 수종사(2010년 1월 23일)

매루 2011. 1. 22. 23:23

 

414



2010년 치러질 6,2지방선거에서의 승리를 기원하며 올랐읍니다

 

 

 

 

 

 

 

 

 

운길산 정상으로 가는길에 만나는 수종사 

사진 좌측 중앙 운길산 잔설속에 수종사 들어오는 길 이 비쳐집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합수머리(두물머리,양수리)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운길산 중턱에는

암자규모의 조그마한 절 수종사가 있읍니다

비록 규모는 작을지라도 많은 문화재가 발굴된점으로 보아선 한때는 무척  주요사찰 이었던것 같습니다

그리고 빼어난 경관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묵객 또는 선비들이 즐겨찾기도 하고요

 

저 와 수종사와의  인연은 꽤 오래전인 군사독재의 암울했 시절에 민주산악회를 따라다닐 때 부터 였읍니다

운길산은 구름雲 길할 吉의 雲吉山 이지만 풍수지리학상 이곳에 길한 기운이 많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운길산을 吉한 運이 서려있는 산으로 여겨 신년초에 이산에 오르며 소원과 행운을 기원하곤  하지요

군사독재의 암울한 시기에도  희망의끈을 놓지 않았던 이땅의 민주세력들도

신년초에 이땅의 민주화를 기원하며 이산에  올랐었읍니다

훗날  모든 국민들이 마음대로 자신의 생각을  비롯하여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시절이 되자

인터넷에서 우연히 마주치게된 저보다  5~6년 연배되시는 여성분의 수종사와 관련된 글 이 있엇읍니다

소개 합니다

 

 

                        -중략-

기억력이 너무 없어서 과거가 없다고 할 만큼 지난 일이 생각나지 않는 나는
권교수님의 <수종사>를 읽으면서 기독학생회에서 수종사엘 갔단 말인가?
금시초문처럼 깜깜하기만 한데 그간 권교수님이 두물머리 이야기를 비롯해
옛이야기를 풀어낸 것을 떠올리면 내 기억엔 없어도 틀림없을 것 같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으면서 수종사에 대한
그보다 더 오래 전 기억이 남아 있는데
그건 내 인생에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학교 6학년 때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얼마 후, 우리 집에 갑자기 군인들이
군화를 신은 채 들이닥쳐 온 집안을 뒤지고 온갖 무례한 일을 저지르고 떠났다.
장면 정부 인사들을 무조건 부정축재자로 몰아 잡아넣으려는 것이었다.

평생 정치환경이 열악하기만 했던 대한민국에서
오직 야당밖에는 적을 두신 일이 없었던 우리 아버지는 그로부터 30여 년 후
정계에서 은퇴하시고 나서 돌아가실 때까지 자동차야 한대 어떻게 살 수 있겠지만
기사를 둘 여력이 없어 자가용 없이 버스와 지하철만 타셨는데
하물며 그 옛날 무슨 축재와 관계가 있었으랴. 군화발의 침입자들도
아무 성과가 없자 우리 어머니에게 미안하다고 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국제신사이며 선량하기만 하셨던, 그래서 어쩌면 정치인이 아니었던
장면 총리의 제2공화국이 들어선 지 불과 8개월 만에 박정희는 장면 정권이
무능하고 부패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총칼로 정권을 빼앗았는데,
총칼을 휘두르며 온갖 만행을 저질렀던 박정희, 전두환인들
단 8개월 만에 정권을 빼앗길 만큼 부패할 재주가 있었을까?
또 자동차도 어느 만큼 달려야 속도가 나는 법, 유무능을 논할 시기였을까?

아무튼 그 당시 총리 공보책임비서관이었던 우리 아버지는 그날 이후
중앙정보부 조사 등 온갖 고초를 겪으며 대문 앞을 지키는 정보부 수사관들을 피해
뒷집을 통해 담을 넘어 집에 들어오시기도 하셨다. 어느 날 나는
담장 위에 올라가 아버지께 사다리를 건네드렸는데 그 순간 총소리가 났다.
어리고 무지 겁이 많은 내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런데 그건 어처구니없게도 서슬 퍼런 군인들이 심심해서 쏜 총소리였다고 한다.

그 사건 이후 아버지는 수종사로 피신해 3개월을 계셨다.
우리 어머니는 수사관들의 눈을 피해 아버지께 옷가지며 음식을 가져가시곤 했는데
그런 상황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그 어린 나이에
“나는 동생들을 책임져야 할 가장이다” 하는 결연한 각오를 하곤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시고 나서 결국 다시 정보부에 끌려가셨고
2주일이 되도록 생사를 몰랐다. 결국 소재를 확인하니 마포형무소.
절차도 밟지 않고 구속영장도 없이, 이번엔 반혁명사건이라는 죄명이었다.
그때 중앙정보부에서 발가벗긴 채 정신을 잃도록 매를 맞은 고통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수술을 받고 마취에서 깨어나시고 어머니에게 하신 첫마디가
"여기가 중앙정보부요?" 였다고 한다.

지난번에 <박정희에 대한 평가>로 게시판이 뜨거웠을 때 어떤 분이
박통시절에 감옥 갔다 오지 않았으면 입 다물라고 한 것을 기억한다.
내가 감옥에 갔다 온 것은 아니지만 간접경험은 했으니 한마디 해도 되겠지.

어디 그 경험뿐이랴. 군사정권에서 오로지 야당 정치인으로 살아온 우리 가족이
겪은 수난을 밖에서 보는 사람들이 어떻게 다 짐작할 수 있을까. 우리 어머니는
그 한을 360페이지 책 한 권에 담으시고도 아직 다 풀지 못하셨는데.

내 동생 유라가 대학 1학년이던 1972년, 같은 캠퍼스 공대생과 사귀게 되었다.
그 남자 아버지가 당시 준재벌이라는 말을 듣고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즘 권력 있다는 사람, 요즘 돈 있다는 사람 앞에 주눅 들 필요 없다.
우리는 대대로 내려오는 선비집안이다. 그러니 당당해라.”  

우리 아버지가 반상을 따지는 사람이었을까? 물론 아니다. 평소 그런 말씀을 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때 우리 아버지도 국회의원이었으니 비록 힘없는 야당이었지만 남들 눈에는
아버지가 말씀하신 “요즘 권력 있다는 사람”에 속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아버지는 군사정권 이후 거기에 편승해 새로 탄생한
권력자들, 재벌들을 말씀하신 것이고 그런 세상에서 선비정신을 지키고 싶으셨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박정희의 셀 수 없이 많은 잘못 가운데 모든 참된 것, 올바른 가치관을
말살시키는 것을 가장 통탄하셨다. 길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다.
앞서 권교수님의 글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너무 훌륭했기에 박수를 보내며
그것을 빌어 내 의견을 대신하겠다.

나는 아직 내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가져 본 적이 없는 불행한 사람이다.
웬일인지 내가 투표한 사람은 모두 떨어졌으니까. 하다못해 김영삼도 아니다.
오직 당선될 목적으로 김종필과 손잡은 그를 뽑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도 기대를 걸고 투표한 이회창이 떨어져서 섭섭했지만 두 번째 나왔을 땐
다시 표를 줄 수 없었다. 선비정신의 상징이며 대쪽이라던 그가
오직 영남권 표를 의식해 박근혜를 모셔오니 참 할 말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대쪽이라니! 아버지가 “선비정신”을 그리워하신 것이 그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너나없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 우리 사회의 병폐는
바로 군사정권이 남긴 추악한 유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믿거나 말거나, 나는 대학시절 데모에 참가해본 적이 없다. 어릴 적부터
정치판에서 자라면서 식상했고, 분노를 넘어 초월했었다고나 할까.
무엇보다 데모대를 주도하며 정의를 부르짖는 학생회장의 미래를
“정계진출-변질-구태”로 나 혼자 점쳤는데 지금까지 딱 들어맞고 있으니
말해 무엇하리. 그럼에도 박정희를 떠올리면 한 소리 안 할 수가 없으니.

<<<<<<이 세상의 그 어떤 공적도 거기에 인권이 없는 한 인정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억누르고 가두고 때리고 죽이면서 곯던 배를 채워준다고 그 죄가 상쇄될 수 있을까?
내가 알기에 그 시대 상황이 박정희 아닌 다른 사람도 그만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고 본다. 아니 그보다 경제성장이 못했더라도 우리는 그보다 더 소중한 것들을
잃지 않고 지키고 발전시켰을 테니 그 가치는 박정희의 유일한 업적(?)이라는
경제발전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가 남긴
우리 사회의 깊은 상처, 가치관의 변질, 실종된 정의, 이것들은 언제 회복될 수 있을까?
그런데 아직도 박정희의 망령이 살아 움직이고 있으니 이게 우리의 수준일까?
참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수종사 입구 일대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유기농 농산물 생산단지가 있읍니다

4대강사업의 삽질은 이곳까지 파헤쳐 없애려고 합니다

학계 종교계를 비롯한 각계각층에서 사업의 중단과 재고를 요구하고 있지만  요지부동 입니다이

곳에 터전을 잡은후 누구나가 인정하는 좋은 먹거리를 생산하며 땀 흘리는 농민들,,,,,,,,

목민심서의 저자 이며 조선후기 실용지학(實用之學)·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면서

주자 성리학의 공리공담을 배격하고 봉건제도의 각종 폐해를 개혁하려는 진보적인 사회개혁안을 제시했던

 이곳 출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선생은  이사실을 어떻게 생각 하실지,,,,,,,

 

  

 

 수종사 전경

.
양수리, 즉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그곳에는 이전길로 양수대교가 있습니다.
그 우측은 양평으로, 그 좌축길은 새터와 대성리를 지나 춘천가는길입니다.
양수대교 건너기 직전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조금만 가면 수종사 들어가는 표지가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상당히 가파를 산길이 약 10 여분 거리로 있는데
도로조건 괜찮으면 일반 승용차도 무리없이 올라갑니다.
눈 오면 못올라기니 주의 하시길..
수종사의 포인트는 절 압마당에 서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양수리 전경입니다.
그리고 좌측으로 내려가면 수령이 꽤나 오래된 은행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장관입니다.

다산 정약용의 <수종사기>에
"수종사는 신라 때 지은 고사인데 절에는 샘이 있어 돌 틈으로 물이 흘러나와
땅에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낸다. 그래서 수종사라 한다"고 전합니다.
세조가 1458년(세조4)에 지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강원도 오대산에 갔다가 남한강을 따라 환궁하는 도증
용진강 이수두(지금의 양수리)에서 밤을 맞아 야경을 즐기는데
운길산쪽에서 문득 종소리가 들려 그 연유를 알아보게 하니
폐허된 천년 고찰이 있고 암굴에 18나한이 열좌하였으며
바위틈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종소리를 낸다고 아뢰니
세조는 이듬해(1459) 그 곳에 절을 다시 짓고

수종사라 이름하였다고 전합니다

'나들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9여름 십리포 (달빛 창가에서 :도시의 아이들)  (0) 2011.01.24
영흥도 섬업벌  (0) 2011.01.24
광릉수목원 여행  (0) 2011.01.22
창용이 발표회 하던날  (0) 2011.01.22
담양  (0) 2010.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