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室에서1515

개마고원과 장진호 전투 본문

카테고리 없음

개마고원과 장진호 전투

매루 2022. 12. 24. 09:46

 

그들은 아마도 적진에서 날아오는 총탄보다도 그 칼날같은 매서운 바람이 무서웠을지도 모른다.

 

한반도의 오지(奧地) 중의 오지(奧地)  삼수갑산

오지(깊을奧  땅地)일반적으로 인간이 접근하기 힘든 대륙() 내부()의 깊숙하고 험한 지역을 뜻하며

비슷한 말로는 두메산골, 외딴 곳, 벽지(僻地), 삼수갑산등이있읍니다


한반도의 지붕 개마고원 

함경남도 삼수·갑산·풍산·장진군의 북부에 해발고도가 일반적으로 1,200∼1,300m의 고지대로 

 

 세종의 4군6진 개척으로 여진족을 몰아내고 남부 지방의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남부 지방으로부터의 이주민 중에는 화전민이 많았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도로 연변의 큰 촌락을 벗어나면 곳곳에 화전이 많았다.

이곳은 조선 시대 대표적인 귀양지였을만큼 산간오지로 통한다.

삼수(三水)는 세 강이 합류하는 곳이고, 갑산(甲山)은 ‘산들이 겹겹이 갑옷을 입은 듯’한 지역이다.

이들 지역은 험한 오지인 데다가 추운 지역이어서 예전부터 중죄인(重罪人)을 귀양 보내는 적소(謫所, 귀양지)로 손꼽혔다. 이 지역으로 한 번 귀양을 가면 다시 살아 돌아오기 어려웠다.‘물도 많고 산첩첩’이 곧 ‘삼수갑산’을 이른 말이다.

 

한겨울이면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지역이기도 하다.

이 지역에는 산도 많지만 물도 많다. 압록강의 상류이자 지류인 부전강, 장진강, 허천강 등 강이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대 후반, 개마고원의 수자원에 일찍이 눈독을 들인 사람들이 있었다.

일제는 부전강, 장진강, 허천강의 풍부한 수자원을 이용하여 유역변경식 수력발전소를 개발했고,

여기서 나온 전력으로 흥남공업단지를 조성하였다.

이리하여 세 강은 인공호수로 변했다. 또한 천연 호수로 낭림호, 풍서호, 황수원저수지, 내중저수지 등이 있다.

 

 

 

장진호는 장진강을 막아 그 물로 수력발전을 위해 막은 인공호수(댐)이다.

장진호전투는 바로 이 지역에서 1950년 혹한기에 벌어졌던 전투로

(1950년 11월 26일~12월 13일), 17일 동안 최악의 인명 피해를 기록했다.

장진호전투의 마지막이 흥남철수로 이어졌고,

 

 

 

삼수군(三水郡)

동쪽은 갑산군·혜산군, 서쪽은 평안북도 후창군, 남쪽은 풍산군·장진군, 북쪽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만주의 장백현과 경계하고 있다. 동경 127°16′∼128°16′, 북위 41°02′∼41°27′에 위치하며, 면적 1,795.4㎢, 인구 5만 421명(1944년 현재)이다. 7개 면 199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삼수면 중평장리이다.

 

 

갑산군(甲山郡)

개마고원의 중심부에 있는 지역

내륙군으로서 동쪽은 단천군, 서쪽은 삼수군, 남쪽은 풍산군, 북쪽은 혜산군과 접하고 있다.

‘갑산(甲山)’이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 나라의 산 중 높은 산, 높은 봉우리, 높은 고개가 제일 많은 곳이다.

 5개 면 137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갑산면 북부리이다.

 

 

풍산군豊山郡

개마고원의 중심부에 해당 동쪽은 단천군, 서쪽은 장진군, 서남쪽은 신흥군, 남쪽은 북청군, 북쪽은 삼수군·갑산군에 접해 있다

과거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풍산견(豐山犬)이 유명하다.

 

 

장진군

동쪽은 풍산군, 동북쪽은 삼수군, 서쪽은 평안북도 강계군, 남쪽은 함주군, 평안남도 영원군,

북쪽은 평안북도 후창군과 접하고 있다.

 

 

 

 

가장 혹독한 겨울 장진호 전투

그들은 아마도 적진에서 날아오는 총탄보다도

그 칼날같은 매서운 바람이 무서웠을지도 모른다.

 

장진호는 장진강에 댐이 만들어지면서 생긴 인공호수로 부전호와 함께 우리 나라 제1·제2의 인공호수 이며

장진호전투는 한국전쟁중 중국과 인접한 국경도시인 혜산진까지 올라갔던 미군이

북한 임시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다

오히려 장진호 근처의 산 속 곳곳에 숨어있던 중공군에 포위되어

그들의 구대전술 공격에 전멸 위기를 겪었다가 탈출에 성공한 후퇴 작전.

혜산진

 

 제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더불어 세계 양대 동계전투로 꼽히는 장진호전투는

한국전쟁때 미 해병 1사단및 유엔군 3만여명이 북한의 임시수도였던 강계를 점령하기 위하여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까지 진격했다가

1950년 11월 26일부터 약 보름간 낮이 영하 20'C 밤에는 영하 30'c까지 떨어지는 강추위 속에서

중국군 7만여 명(전투병 6만명이상, 7개사단) 에게 포위 당하여 격전을 치르며  포위망을 뚫고

흥남부두까지 후퇴한 전투 입니다

이전투가 벌어졌던 개마고원은 해발고도가 일반적으로 1,200∼1,300m로 높기 때문에 

대체로 1월 평균기온은 -15℃ 내외이고 최저 -40℃까지 내려가며

해발 1000m 의 장진호는 겨울 낮이 영하 20'C 밤에는 영하 30'c까지 떨어지는 곳 입니다

 너무 추워서 소총,야포는 불발이 잦았고 사정거리도 짧아져 표적보다 위로 겨냥해야 했다으며

위생병은 몰핀 앰플을 얼지 않게 하려고 입속에 넣고 다녔다고 합니다

미군 으로서는 장진호전투가 2500명가량이 희생 되었던 진주만 이후 최대 패전 인 셈 입니다 

 한편 미군은 장진호전투에서 중국군에게  자신들의 희생에 그10배에 해당하는 타격을 입히며 돌파에 성공한

가장 위대한 후퇴작전이라 주장하며 기리고 있읍니다

 

이렇게  미군은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 중공군의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자신들도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을 합니다

흥남 철수는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남쪽으로 탈출을 시키는데 성공을 합니다

장진호 전투 당시 미군과 중공군의 진격로 및 배치 현황 (사진=KBS 다큐인사이트 ‘1950 미중전쟁’)

 

 

장진호전투 일지

 

장진호전투에서 미군을 크게 괴롭힌 중국군의 구대전법

 

한국 전쟁 중에 처음으로 조우한 중공군은 미군으로서는 불가사의한 전투행태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미군이 가는 곳이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방에 존재했다. 

리고 기습해왔다. 

보유한 장비와 인간 능력의 한계를 생각하면 도저히 가능하지 않는 시간과 장소에서 중공군은 기습해왔다. 

미군(한국군을 포함하여)은 대응할 수 있는 전술을 찾아낼 수가 없어 파죽지세로 흥남까지 밀렸고 그곳에서 탈출했다. 

미군 지휘부는 패배의 원인을 호도하기 위해 인해전술을 찾아냈고 언론은 이를 확산시켰다. 

 

미군이 후퇴하면 중공군은 잇달아 추격해오는 정도가 아니라 미군보다 앞쪽에 가있었다. 

미군이 험악한 자연조건이라 군대가 움직일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조건에서 중공군은 나타나고 공격해왔다. 

미군이 보기에 중공군은 바닷물처럼 많았고 파도처럼 밀려왔다. 

효과적인 대응전술을 찾아내지 못한 미군 지휘관들은 엄청난 수의 중공군을 저지할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

 

 구대전법은 뱀이 아가리를 벌려서 먹이를 삼키듯이 적군을 포위하고 섬멸하는 전법을 의미한다. 八자형으로 된 포위망을 적에게 벌린 후에 적이 포위망에 들어오면 닫아버려 섬멸하는 방법.

매복으로 숨어 있다 적이 깊숙히 들어오면 쌈싸먹듯이 달려들어 화력을 집중시키는 전략

게다가 중공군은 밤에만 급습을 했고 나팔불고 꽹가리를 치면서 사방에서 달려들었기 때문에

적은 숫자의 병력이라도 병력수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갑자기 예상하지 못하던 엄청난 병력이 나타나서 사망을 포위하니,

상대 병력이 더 많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전선을 대치한 상태에서 벌어지는 인해전술과 다른 의미

 

12월 3일결국 총퇴각 명령을 내린다.

12월 5일에는 평양을 포기했고 38도선까지 퇴각한다.

 이미 원산이 중국군에게 점령되어 육로를 사용할 수 없었던 10군단과 국군 1군단이 흥남 항을 통해서 부산으로 철수했고 12월 중순 미 1해병사단이 마지막으로 흥남 항을 떠난다.

'

흥남부두 위치

 

 

흥남철수작전

 

흥남은 함흥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비료공장과 장전강·부전강 수력발전소의 전기 때문에 한반도의 대표적인 중화학공업 도시 였읍니다

1950년  12월 15일에서 12월 24일까지  장진호 전투를 하고 있던 미군 제 1해병사단이 장진호 에서 철수하여

흥남 항구에서 집결한 다음, 선박을 통해 남쪽으로 철수 하였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