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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권이와 김장

매루 2022. 11. 28. 18:38

절친한 친구 사이를 가리켜 ‘관중과 포숙의 사귐’, 즉  ‘관포지교(管鮑之交)’‘’라고 하지요

일생을 살아가면서 ‘관포지교(管鮑之交)’와 같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한 사람만 있어도

그 사람의 삶은 최소한 실패하지는 않은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고등학교 2학년때 어느 중간고사시간.....

시험감독관선생은 학생들이 싫어하는 선생님중에 단연 으뜸 이었던 분 이었읍니다

싫어하는 까닭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선생님의 담당과목이 별로 재미없는 과목이었고

지루함과 졸음을 부르는 선생님의 수업내용과 목소리

거기다가 우리가 가장 그 선생님을 싫어했던 까닭은 그선생님의 학생들에 대한 폭력 이었읍니다 

여느 시험날 처럼 그날도 시험지를 분단마다 앞에서 뒤로 돌리는데

시험지가 맨뒷줄의 학생에게 전달 되기도전에 승권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밖으로 나가는것 이었읍니다

시험 감독관 선생 께서는 승권이에게  "야 이 XX야 쉬는 시간에 뭐하고 지금 화장실에 가?..."라며 나무라셨고

이에 승권이는 " 저 시험지 다 풀었는데요"라며 대답을 하였읍니다

승권이는 그자리에서 10여분을 그선생님으로부터 메를 맞았었읍니다

덩치도 크고 얼굴 생김새도 순해 보이지않아(승권이는 스스로의 얼굴을 제2의 조두순 이라고 합니다)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이 승권이 에게는 별로 없었읍니다

우리들이 중학교 2학년생 이었던 1968년도 당시 인천은 지금처럼 직할시가 아닌 경기도 속의 한도시 였고

 당시 육상선수였던 승권이는 중등부 200M 달리기 부문에서 경기도 1인자 였었읍니다

경기를 끝내고 상장과 메달을 받기 위하여 시상대의 맨 윗자리에 오를때

승권이 밑의 2등과 3등을 차지한 선수들은 육상선수용 던닝셔츠와 펜티를 입고 시상대에 오른 반면에

승권이는 불우한 가정환경(계모 슬하에서 성장) 때문에 경기용 유니폼은 꿈도 못꾸고

학교 체육시간에 입는 무거운 바지와 웃도리를 입고 시상대에 올랐던 이야기를 하곤 했읍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승권이의 부모는 물론 이려니와 승권이가 소속된 학교 , 인천시의 관계되는 어른들이 미워 지더군요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20여년이 훨씬 지났던 어느해에

제가 승권이하고 어울리는것을 처음 본 한친구(저하고 승권이 사이만큼 친한친구사이)는

"일후아 넌 임마 나이가 몇인데 아직까지 저런애하고 어울리고 다니냐" 며 저를 나무랐읍니다

가정환경이 불우하여 평범하지않은 생활모습을 보였던 승권이 였기에

다른 친구들의 승권이에 대한 인상과 기억은 좋지를 않았던 것 이지요

하지만 승권이의 진면목(참되고 다정하고 겸손한)을  새로이 알게된 친구들은

제가 승권이를 좋아 하는것 이상으로승권이를 매우 좋아 하게 되지요

 

 

이렇듯 승권이가 저의 평생벗 이라는것이 저는 늘 자랑스럽고

저 스스로 끝과 높이 그리고 깊이를 알수없는  행운아라고 여기며 늘 감사하며 살고있읍니다 

 

 

 

어제(11월 27일)승권이 부부가 대부도에 들어와 김장을 해갔읍니다

 

 

승권이가 제아내의 김치를 먹기 시작한것은 20여년이 훨씬 넘었읍니다 

 

 

승권이부부는 물론 출가한 자녀(남매)들으; 몫까지 저희집에서 담구어 갑니다

 

 

 

 

 

 

 관중은 포숙을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일찍이 곤궁할 적에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하였는데,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몫을 더 많이 가지곤 하였으나 포숙은 나를 욕심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나는 포숙을 위해 일을 꾀하다가 실패하여 더 곤궁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포숙은 나를 우매하다고 하지 않았다.

시운에 따라 이롭고 이롭지 않은 것이 있는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나는 여러 차례 벼슬길에 나갔다가 매번 임금에게 쫓겨났지만 포숙은 나를 무능하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시운을 만나지 못한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나는 여러 차례 싸웠다가 모두 패해서 달아났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나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패하였을 때 동료이던 소홀은 죽고 나는 잡히어 욕된 몸이 되었지만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작은 일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공명을 천하에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은 이는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