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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回想)

매루 2022. 8. 26. 17:07

 

 

계절은 어느덧 처서(處暑)절기에 접어들어

아침저녁으로 피부에 와닿는 선선한 기운이 상쾌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마침 라디오에서 민혜경의 <어느소녀의 사랑 이야기>노래를 들으면서

 제가 군대를 제대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20대 중후반(1980년대 초반)에 만났던

당시 32번 인천시내버스 안내양을 회상(回想: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함)해 봅니다

 

어느소녀의 사랑 이야기

2015년 12월 작성글

 

 

 

 

인터넷에서 유명한 <1964 - 07 - 10 늦은밤 피곤한 차장모습>이란 제목의 사진 입니다

 

 

 

저는 1979년 봄에  3년동안의 군복무(탄약 관리병)를 마치고 

그해 늦가을에 부평에 있는 풍산금속 이라는 방위산업체에 입사를 합니다

 

10/26 박정희 시해사건, 12/12 군사반란등 어수선한 시국 속에서도

사회에 다시 발을  딛는 저의 마음은 늘 즐거웠읍니다(언론이 정확한 보도를 안하거나 못했기에 알수도  없었지만)

 

그런데 지금도 그러하듯 까칠한 제 성격은 부평역과 회사를 운행하는 풍산금속 통근버스를 탈때마다 

버스에 오르는 순서와 상관 없이 관리직이나 간부사원들에게 좌석을 양보 해야하는 분위기가 싫었었읍니다

나이 60인 지금도 마찬가지 이듯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 는 말에 늘 공감하는 저 였기에

길어지는 출퇴근시간의 불편과  교통비의 지출을 감수하며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출퇴근을 하였읍니다

 

 

군대생활 3년동안의 경력(탄약관리)은  방위산업체인 풍산금속 입사에 도움이 되었지만

픙산금속 부평공장은 동파이프와 세계각국의 동전(주화)제조가 주업종 이었기에

저의 풍산금속 공돌이 생활은 그리 오래 가질 못하고 이듬해의  여름휴가때

서울의 다른직장에 취업을 하면서 마치게 되었읍니다

 

 

서울로 출퇴근을 시작한지 한달여 지난 어느 가을날 의 출근길,,,,,

전철 부평역행 시내버스 안에서 저는 그버스 안내양에게 인사(?)를 받습니다

"직장을 바꾸셨나 봐요 ?........." 라며 수줍어 하면서도  또렷하게 제게 말을 건넨 안내양 이었읍니다

저희집이 있었던 부평삼능 이라는 곳과 풍산금속이 있는 효성동에서 버스를 타고 내리다가

효성동이 아닌 부평역 앞에서 버스를 타고 내리는 저의 동선을 그 안내양이 알고 있었던 것 이지요

 

 

그러한 그녀의 인사를 받고는  저는 무척 당황을 하게되는 와중에

그동안 저 여인이 고맙게도 저를  지켜 보아온 동안, 그녀의 존재조차 모르고있던 저자신이 괜시리 미안 하여졌읍니다

훗날 저와 그녀가 함께 시간을 낼수 있었던 어느 가을날

지금은 대단위 주거시설이 들어서 번화해 졌지만 당시에는 온통 논과 밭 이었던 

삼산동의 까치마을 이라는곳의  그녀의 숙소에 면회를 갔던적이 있었읍니다

 

 

남들처럼 공부도하고 싶고  사랑을 느끼고 싶을  꽃다운 스물 즈음의 나이에

온갖 열악한 상황속에서 힘든일을 하던 버스 안내양 이었지만

반듯한 삶의 자세와 흐트러짐 없는 그녀의 마음가짐이 존경 스러웠읍니다

그때 그녀가 타고 탑승객들을 안내하던 버스 출입문 윗벽에

깨알같이 적혀 있었던 민해경의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가사가 눈에 선합니다

 

버스 안내양들의 적금모습

 

1982년부터 서울지역에는 자율버스 제도가 도입되어 안내양 없는 시내버스가 운행되기 시작했고,

1985년에는 전국의 모든 시내버스에서버스 안내양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춥니다.

 

 
 

버스 여차장 알몸수색, 1970.12.12

깻잎머리에 베레모를 실핀으로 고정하고 제복을 입은 버스 안내양이 처음 등장한 것은 61년.

버스가 본격적으로 서민의 발 역할을 하기 시작한 49년 이후

‘조수’란 명칭으로 남자들이 차장 역할을 하다 손님과 자주 다투고 인건비도 비싸다는 이유로

어린 소녀들로 교체됐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버스 안내양의 평균 연령은 18세였다.

61년 1만2560명이던 안내양은 71년 3만3504명, 70년대 중반엔 5만여명까지 이르렀지만

82년 시민자율버스가 도입되면서 급격히 줄었고,

89년 안내원을 두도록 한 자동차운수사업법 33조가 삭제되면서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73년에 발표된 조선작의 소설 <영자의 전성시대>의 주인공은 버스 안내양 출신이다.

식모·봉제공 등을 전전한 끝에 버스 안내양이 된 영자.

하지만 만원버스에서의 교통사고로 한 쪽 팔을 잃고 자살을 기도하고 그마저 실패로 끝나

성매매의 늪으로 전락하는 소설은

당시 시골에서 가난을 면하려 상경했던 소녀노동자들의 잔혹한 삶을 그려 충격을 던졌다.

버스 옆구리를 탕탕 치며 “오라이~”라고 씩씩하게 외치던 안내양은 하루 18시간씩 일하고,

단체 숙소에서 겨우 4~5시간 눈을 붙인 뒤 새벽같이 일어나야 했다.

안내양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부족한 잠이나 승객들을 버스 안으로 밀어넣는 데 소모되는 체력이 아니었다.

교복을 입은 또래 여학생들에게 느끼는 열등감이나

술주정하는 남자 승객의 지분거림도 견뎌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엔 안내양이 직접 버스비를 받았기에 도둑 취급을 받는 일이 다반사였다.

승차감시원의 승객계수와 안내양의 입금액이 차이가 나면 차액을 월급에서 까고,

돈을 숨겼다며 알몸수색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신문엔 수치심에 못이겨 자살한 안내양의 기사가 심심찮게 등장했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을 역임한 원로 언론인 민병욱씨는

한 칼럼에서 70년대 기자 시절의 일화를 들려준다.

“중랑교 넘어 어느 종점의 버스회사 안내양들이

인격모독적인 알몸수색을 더이상 못 참겠다고 고발해서 취재하러 갔을 때였다.

소녀 티를 못벗은 차장이 눈물을 주르륵 흘리더니

‘수치스럽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라며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문제는 그 안타깝고 슬픈 현장에서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는 거다.

‘청량리 지나 중랑교 가요~’라고 외치는 안내양의 말을

당시엔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라고 말하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했는데

하필 청량리 방향을 운행하는 버스 안내양이 말해버리니 나도 모르게 쿡 웃음이 새 나왔다.”

매일 차창에 매달리는 곡예를 하고,

돈을 숨긴다는 의심까지 받으면서 너무 일찍 삶의 고단함을 체험한 버스 안내양들.

그 많은 안내양들이 지금은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순결한 영혼을 존중받아야 할 그들에게 ‘알몸수색’을 했던 어른들은 또 어떤 노후를 보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