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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즉

에레나가 된 순이

매루 2020. 2. 26. 01:21

 

 

 

 

 

 

 
   
  • 안다성

 

 

 
  • 드라마 (유나의 거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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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부평이야기 - ‘양공주’에 대한 해명
 
2018.05.29.

직업의 성격상 부평에서 오랫동안 거주하신 분들을 만나 부평에 옛 이야기를 듣는 일들이 많다

. 몇 해 전 부평3동에서 아주머니 한 분을 만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주머니 고향은 부산이었는데 결혼을 하면서 부평에 올라왔다고 했다.

결혼 전 고향 친구에게 ‘부평 신촌’에 사는 남자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하자 친구는 ‘알만한 동네’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당시 아주머니는 친구가 말한 ‘알만한 동네’가 무슨 뜻인지 몰랐다고 한다.

 결혼 후 시댁에 인사를 드리러 왔더니 골목마다 노란 머리로 염색한 여자들이 미군과 아무렇지 않게 팔짱을 끼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그제야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고 한다.



밤이 더 활기찼던 '부평 신촌'

부평3동을 사람들은 ‘신촌’이라고 부른다.

언제부터 불러지기 시작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이름에서 유추해 본다면 ‘새롭게 생긴 마을’이라는 뜻일 것이다.

아주머니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신촌’은 기지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촌’을 ‘양공주 동네’ 혹은 ‘양색시 동네’라고 부르기도 했다.

미군부대 정문과 마주하고 있었던 탓에 자연스럽게 기지촌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신촌’은 여러모로 여타 마을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영어간판을 올린 클럽들이 즐비하였고 밤새 팝음악이 문밖으로 흘러나왔다.

야간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지만 ‘신촌’은 오히려 밤에 더 활기를 띠었다.

마을에 있는 미용실에는 아침마다 머리손질을 하려는 여성들이 길게 줄을 섰고,

동네 청년들과 미군들의 살벌한 주먹다짐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남녀가 유별했던 시절이었음에도 미군의 팔짱을 끼고 다니는 ‘양공주’의 모습과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이 골목을 뛰어다니며 노는 모습은 이곳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아마도 이런 모습으로 인해 아주머니의 친구는 신촌을 ‘알만한 동네’라 했을 것이다.
 


▲ 부평 '신촌'의 골목 
영어로 된 클럽 간판이 눈에 띤다. (사진제공 팀노리스)




‘양공주’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전쟁은 모두에게 아픔을 남기지만 특히 여자와 아이들에게는 더욱 가혹하였다.

전쟁으로 인해 부모와 남편을 잃은 여자들은 하루아침에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당시 여성들은 한국사회의 뿌리박힌 남아선호사상에 의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러한 여성들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쟁 직후 극심한 사회혼란으로 남성들도 구직이 어려웠던 판에 여성들은 오죽했을까?

결국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어리’ 밖에 없었던 여성들은 스스로 ‘양공주’가 될 수밖에 없었다.
 




※ 기지촌 여성의 실태조사(1966년 아시아여성연구소)

 


전쟁 후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여성의 ‘순결’은 여전히 지켜야 할 최고의 가치였으며,

이를 지키지 못한 여성들에 대해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비난과 멸시가 따랐다.

그리고 그녀들을 바라보는 못마땅한(?) 시선은 5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듯 하다.
 

 
 

애스컴 부대로 들어가는 여성들 (부평역사박물관 소장)

 




산업전사, 안보전사

‘알만한 동네’라는 비아냥을 듣는 ‘신촌’이었지만 그 당시 ‘신촌’은 우리나라에서 달러를 많이 벌어들이는 곳 중 하나였다.

평택과 부산, 동두천, 왜관 등 당시 기지촌이 있었던 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국경제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던 시절 기지촌 경제의 위력은 대단했다.

중앙 대학교 이나영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64년 한국의 외화수입이 1억 달러에 불과하던 시절,

 미군 전용 홀에서 벌어들인 돈이 970만 달러에 이른다. 외화수입 총액의 10%에 가까운 금액이다.

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해 정부는 기지촌을 육성하기 시작했고 ‘양공주’들은 첨단에 내세워졌다.

1964년 정부는 기지촌 클럽 주인들의 모임인 한국관광시설협회의 설립을 허가하였다.

 당시 클럽은 미군과 ‘양공주’의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주 무대였다.

정부는 클럽에 면세주류를 제공하고 시설자금을 보조하는 등 파격적인 혜택을 줬을 뿐 아니라

 업주들에게 해외 기지촌을 견학시켜주기도 했다.

‘양공주’들에게는 어떠했는가? 원자재 없이 외화를 벌어들이는 산업전사이자 미군을 붙들어두는 안보전사라며 그대들이야말로 참된 애국자라고 추켜세우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들의 현실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정기적으로 성병 검진을 받아야 했는데 이는 그녀들의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군에게 깨끗하고 안전한 성을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행여 성병에 걸리면 일명 ‘몽키하우스’에 격리 수용되어 고통스런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반면 성병에 걸린 미군들은 외출금지 등의 어떠한 제제도 없었다.


 


▲ ‘양공주’는 일주일에 두 번 성병검진을 받아야 했다. 
검진을 통해 이상이 없으면 확인도장을 찍어주는데
이것은 일종의 ‘영업허가증’이나 마찬가지였다
.


‘양공주’는 미군의 폭력과 학대로 고통 받기도 했다.

 1969년 5월 13일 ‘신촌’에서 미군의 학대에 못 이겨 한 여성이 자살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실을 안 동료 여성들과 ‘신촌’의 마을사람들은 자살한 여성의 상여를 메고 미군부대 정문으로 몰려 가

학대를 한 미군을 내놓으라며 시위를 하였다.

미헌병 50명과 한국 경찰 30명이 출동할 만큼 대규모의 시위였다. (동아일보, 1969.05.14.)

‘신촌’에서 미군에 의해 희생된 ‘양공주’의 이야기는 신문기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산업전사’ ‘안보전사’로 추켜세워졌던 ‘양공주’들은 현실에서는 전혀 대우받지 못한 처참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 부평에 있었던 병원 (부평역사박물관 소장) 

 

V.D는 venereal disease의 약자로 성병을 뜻한다.




그녀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미국은 닉슨독트린에 따라 1971년 3월 7사단과 3개 공군 전투부대 등 주한미군 6만 2천명 중 2만 여명의 철군을 단행했다.

 이에 따라 부평 애스컴 부대의 규모는 대폭 축소되었고 이제 더 이상 ‘신촌’은 ‘양공주 동네’가 아니었다.
그 많은 ‘양공주’는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그녀들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2015년 평택의 한 복지단체 도움으로 부평에서 ‘양공주’ 생활을 했던 (이제는 할머니가 된) 여성을 만났다.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부평에서 미군이 철수 한 뒤 ‘양공주’들은 또 다른 기지촌을 찾아 떠났다고 한다.

특히 평택으로 많이 내려왔는데 할머니도 그 때 이곳으로 왔다.

할머니는 미군과의 사이에서 아들 한 명을 낳았다.

아이 아빠는 미국으로 돌아가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이후 혼자 아이를 키우며 생활하였는데 그리 행복한 시간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경제적인 부분도 어려웠지만 아이 역시 남들과 다른 피부색으로 ‘튀기’라 놀림 받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중학생이 된 아들이 어느 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을 멀리 입양 보내 달라고 부탁을 했다.

 할머니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지만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도 그것이 나을 것 같은 생각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이는 그렇게 미국으로 갔고 몇 해 전 딱 한 번 할머니를 만나러 왔을 뿐 이후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아주 가끔 밤 12시가 넘어 걸려오는 전화가 있는데

 “여보세요”라는 말을 하면 아무 말 없이 끊어버리는 것을 할머니는 아들일 것으로 믿고 있었다.

몇 해 전 아들이 한국에 왔을 때 할머니의 전화번호를 건네주며

나중에 이 번호로 전화를 걸었을 때 받지 않으면 엄마가 이 세상에 없는 걸로 알고 있으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다정해야 할 모자지간인데 이렇듯 슬픈 방법으로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양공주’를 하며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였건만 지금은 남처럼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동생들이 왜 자신을 모른 척하는지 이유를 들은 건 아니지만

누나가 이런 일을 한 것이 가족들한테 부끄러워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족도 없는 할머니는 그나마 이렇게 임대아파트라도 하나 건질 수 있었던 것이 미군 덕분이라 했다.

 학교도 다니지 못했던 자신이 무슨 수로 돈을 벌어 집 하나를 장만하겠냐며...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양공주’가 될 수 없는 여성들은 생활고와 함께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돈을 벌어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건만 가족들과 함께하는 ‘양공주’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산업전사라며 혹은 안보전사라며 추켜세웠던 정부는 어떤가?

가장 밑바닥에서 이 사회를 떠받치고 있었던 그녀들은 가족들에게도 정부에게도 외면 받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대한민국이 ‘양공주’에게 기대어 산 것은 아닐까?

이 글을 쓰면서 ‘양공주’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못내 불편했다. 아마도 기지촌 여성들을 직접 만나는 과정에서 절박했던 그들의 상황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2015년에 부평 ‘신촌’을 주제로 한 기획전시를 담당하였는데 이런 불편한 마음은 그 때도 있었다. 그래서 ‘양공주’라는 대신 ‘미군위안부’라는 단어를 선택하였다. 정부문서에도 기지촌 여성을 ‘위안부 여성’이라 지칭하였고, 과거의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보편적으로 그녀들을 위안부 여성이라 칭하고 있음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미군과 ‘양공주’ (부평역사박물관 소장) 

 

‘양공주’에게 성공은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건너가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가난과 냉혹한 현실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전시 개막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로 전화가 왔다. ‘미군위안부’라는 단어가 영 거북하다는 민원인의 전화였다. 민원인의 말에 따르면 ‘양공주’들은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한 것인데 ‘일본군 위안부’와 같은 선에서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녀들을 향해 단단히 닫혀버린 사회의 문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전술하였듯이 한국정부는 국가의 경제와 안보를 위해 기지촌 운영에 적극 가담하였다.

그녀들을 통해 많은 금액의 달러를 벌었고 미군 주둔에 따른 안보도 보장받았다.

 ‘양공주’를 통해 직접 돈을 번 것은 아니더라도 당시 대한민국은 그 돈으로 건물을 짓고 도로를 건설하고 비교적 안전한 시간을 보냈으니

 대한민국이라는 사회 전체가 ‘양공주’에게 기대어 산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녀들을 ‘양공주’라 부르며 조롱할 자격이 있는가?


글· 사진 김정아 부평역사박물관 총괄팀장

 

 

 

 

가족들을 부양해야 했던 양공주자살사건과 미군의 행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