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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옛이름 소성

매루 2016. 7. 22. 09:21

 

 

 

 

언젠가 저희집(하수오농장)에 머물던 손님들 사이에 소성막걸리 이야기가 회자 되었던일이 있었읍니다

다른 회사의 막걸리 맛과 비교를 하면서 소성 이라는 이름에 대하여 궁금해 하고 있을때

인천 토박이임에 긍지를 가지고 사는 제가 내고장 명품막걸리 이름의 어원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던게 부끄러웠읍니다

저와 초등학교 동창사이인 순전이의  조카(언니의 아들)가 소성막걸리 회사의 운영자 이기에

순전이에게 전화를 이용하여 소성 이라는 이름에 대하여 문의를 했더니

<소성은 인천의 옛날 이름>이라는 답장이 왔읍니다

 

 

 

 

 

 

인천양조장(동구 창영동 7)

 

1920년 10월 최승우가 막걸리 양조제조 면허를 취득하여 송월동에서 양조장을 시작하였습니다.

1926년 군소 막걸리 공장을 합병하여  창영동 7번지에 인천양조주식회사 설립하였습니다.

 최승우는 사업수완이 탁월하고, 효모 숙성기술이 다른 막걸리 공장보다 독특하여 인천을 대표하는 소성막걸리로 발전시켰습니다.

 

‘소성주’를 제조, 판매하는 인천탁주는 지난 74년 인천지역의 11개 양조장이 합병한 회사(1990년대 중순 부평구 청천동으로 이전)로 

무려 70년이 넘는 막걸리 제조역사를 자랑합니다.

 

 

 

 

 

 

 

보름여전에 인천(용현동)에 볼일이 생겨서

오이도역에서 수인선 열차를 타고 인하대역(옛 수인선 용현역)에서 내렸읍니다

사진 오른쪽 건물이 대형 쇼핑센터이고  왼쪽이 용현역 출입 지하계단 입구 입니다

사진 가운데가 옛 유공앞 삼거리로 오른쪽길이 인하대학교 정문과 학익동,문학쪽으로 가는 길 입니다 

 

 

 

 

 

윗 사진을 당겨 보았읍니다

이정표에 인하대,학익동,문학쪽으로 가는길을 소성로라고 표기해 놓았읍니다

 

 

 

 

 

인천 토박이들에게는 아련하고 그리운 사진 입니다

사진속에 동양화학 공장이 보이지않으니 늦어도 1960년대 초반의 사진 이리라 생각 됩니다

사진 왼쪽 위에 옛송도유원지앞 아암도와 능허대 백사장이 보입니다

사진 오른쪽 아랫부분이 옛 유공앞 삼거리이고

사닌 아랫부분에 곧게 뻗어있는 도로가 학익동,문학으로 가는길인데

길 중간에 인하공과대학교(지금의 인하대학교)정문도  보입니다

이길이 지금의 소성로 입니다

 

 

유공 삼거리쪽에서 학익동쪽을 바라보고 찍은 소성로 입니다

1954년 인하공과대학(지금의 인하대) 개교식 안내 아치 입니다

아치의 아랫부분 글씨들을 자세히 보면  흥한방적 주식회사라는 한자와

줄임말로 <흥방> 이라는 한글 글자가 보이는데

아마 이 아치는 <흥방> 회사에서 기부를 한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흥방(학익동 옛 사창가 앞에 있었던 방직공장으로 훗날의 동일 레나운)은

대표적인 친일 기업인 이었던 옛 화신그룹의 박흥식씨가 세운 공장 이었는데 

대학 개교식을 알리는 아치에 쓰여있는  <이 대통령각하 만세>라는 글씨를 보면서

친일파 답게 이승만대통령에 대한 아부가 엿보입니다

 

 

 

 

 

 

 

​1966년 2월 7일 경향신문 기사입니다.

 

인천시의 개업의사인 이종화씨는 또 한생활의 여가를 즐기는 아마추어 사진예술가이다

그는 특히 인천의 향토사를 부각 시키는 사적유물과 사라져가는 옛풍경을 찍어두는 일에 열중했다

취미학문을 곁들이는 그의 카메라활동은

먼옛날부터 인천의 진산인 문학산(일면 : 학산, 남산   속칭 : 배꼽산)을 중심으로 약 10년의 시간을 쌓았다고.

오늘날 그는 인천사의 연구가로 클로즈업 되었고

그가 조사수집한 기록과 필름에 수록한 향토사자료에는 다시 얻을수없는 귀중한것들이 포함 되어있다

 

최근 인천시립박물관 에서는 문학산 이라는 향토사자료의 말쑥한 도판책자를 발간 했는데

이속에는 이미 찾아볼길 없게된 문학산 일대의 고적및 전설으 바위의 사진들과 함께

인천에 남은 여러 유적,유물들이 약 40점. 사진 중심으로 엮어지고 있다

그들 사진 제공자가  앞의 이종화씨이다

 

윤갑로 인천시장은 책자의 서문에 이런말을 하고있다

<문학산은 이미 서기 이전(BC18) 향토 인천의 지명을 우리 역사에 기록했다

이처럼 유서깊은 유적을 비록 국방상 불가피 하였다지마는

2000년의 이끼가 낀 갖가지 유물과 산성, 그리고 봉화대 까지를 잃었다는 것은 참으로 서운하기 그지없다>

 

수년전 문학산은 군사기지가 되면서 옛모습을 잃어 버렸다

지난날의 기록과 사진도 소실과 변질의 운영...

그래서 <문학산> 책자를 발간하게 되었다는 얘기

 

 

 

 

 

문학산 고성

문학산 고성의 축조 연대는 미상하다.

그러나 신라시대에 이 고장 지명을 소성 이라고 개칭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산성은 그 이전에 이미 축조된 것으로 추측된다.

고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이루어졌는데

1952년에 답사한 바, 외성은 약 200미터의 석축이며, 내성은 약 100미터의 토성으로 되었으되

이미 붕괴되어 그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인천부사 김민선이 산성을 굳게 지켰다고 한다

 

사진, 글 출처

네이버 블로그 <인천의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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