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즉

이장희의 겨울 이야기와 정광태의 한심이

매루 2017. 12. 22. 09:47




1970년대 초반에 라디오 심야방송중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디스크 쟈키(DJ)라 불리우는 최동욱씨가 진행을 하던  

동아방송의  <영시(0時)의 다이알> 이라는 프로는

최동욱씨에 이어 의과 대학생이던 윤형주씨(1971년)와 이장희씨(1973년)가 진행을 할때 

<밤을 잊은 그대에게>, <별이 빛나는 밤에>,<꿈과 음악 사이에>등 다른 방송국의 심야방송 프로와

그프로의 진행자인 피세영씨,임문일씨, 이종환씨,임국희씨등과 함께

라디오 심야방송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시절로 회상을 합니다


제 개인적 으로는 제가 고등학생 시절 이였던 1970년대 초반(1970~1072)에

즐겨듣던 심야방송은 기독교방송에서 임문일씨가 진행을 했던 <꿈과 음악사이에서>였다가

윤형주씨의 뒤를 이어 동아방송의 이장희씨가 진행을 맡게 되면서부터

<0시의 다이얼>을 즐겨 듣게 되었었읍니다


그 무렵에 <별들의 고향>이라는 영화가 나와 화제가 되었는데

조선일보의 인기연재소설 이었던 <별들의 고향>의 작가인 소설가 최인호씨와

영화감독인 이장호씨 그리고 이 영화의 음악을 맡은 이장희씨는

서울고등학교 선후배동문 사이여서 또다른 화제가 되기도 하였읍니다


이장희씨의 <겨울 이야기>는 소설 <별들의 고향>에 나오는 글로써

그의 친구인 강근식씨(열두시에 만나요 브라보콘의 작곡가)의 기타연주가 돋보이는

 <촛불을 켜세요>를 배경으로 펼쳐진 토크송(talk song)인데

당시 젊은이들은 화학시간의 원소주기율표는 외우지 않거나 못 외워도

이장희씨의  목소리와 말투까지 흉내내며<겨울이야기>를 줄줄 외우곤 했읍니다

이처럼 토크송(talk song)<겨울 이야기>가 유행을 하자

개그맨 정광태씨(훗날 노래 독도는 우리땅을 부른 가수)가 <한심이>라는 제목으로 패러디하여

많은이들을 웃게 하기도 하였읍니다

아래 초록색 글상자가 정광태씨의 한심이 입니다 







이장희 / 겨울이야기 (1971)
별밤씨리즈 Vol.5 (비들기집/무지개)
제조회사 : 유니버샬 71 K-APPLE 51


제 연인의 이름은 경아였습니다.
 나는 언제든 경아가 아이스크림 먹는 것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제가 경아의 화난  표정을 본적이 있을까요?
경아는 언제든 저를 보면 유충처럼 하얗게 웃었습니다.
 언젠가 저는 경아의 웃음을 보며 얼핏
 그애가 치약거품을 물고 있는 듯한 착각을  받았습니다.
부드럽고 상냥한 아이스크림을  핥는 풍요한 그 애의 눈빛을
보고 싶다는 나의 자그마한 소망은 이상하게도  추위를 잘 타는
그애를 볼 때마다 내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우리가 만난 것은 이른 겨울 이었고 우리가 헤어진 것은
 늦은 겨울 이었으니
우리는 발가벗은  두 나목처럼
온통 겨울에 열린 쓸쓸한 파시장을 종일토록 헤매인 두 마리의 길 잃은 
오리새끼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거리는 얼어붙어 쌩쌩이며 찬 회색의 겨울바람을 겨우 내내 불어 재꼈으나
나는 여느 때의 겨울처럼 발이 시려서 잠 못 이루는 밤을 지내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경아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  우리는 모두 봄이건 여름이건 가을이건 겨울이건 언제든
 추워하던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따스한 봄이라는 것은 기차를 타고 가서
저 이름모를 역에 내렸을 때나 맞을 수 있는 요원한 것이었습니다.
 마치 우리는 빙하가 깔린 시베리아의  역사에서 만난
길 잃은 한 쌍의 피난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열아홉살의 뜨거운 체온 뿐 그 외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외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그 겨울을 춥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는 것은
나의 체온엔 경아의 체온이,경아의 체온엔
나의 체온이 합쳐져서 그 주위만큼의 추위를 녹이였기 때문입니다.
경아는 내게 너무 황홀한 여인이었습니다.
경아는 그 긴 겨울의 골목 입구에서부터 끝까지
외투도 없이 내 곁을 동행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봄이 오자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헤어졌습니다.
 그것 뿐입니다.
.


최인호:원작/













정광태의 데뷔앨범




제 여인의 이름은 한심이었습니다.
나는 언젠가 한심이의 주근깨를 보며,



얼핏 그애의
주근깨를 짜보면 평생동안,
참기름 걱정은 전혀 없을 것만 같은
착각을 했던 것입니다
 
꽃보다 귀한 연인이란 노래가
마치 자기 때문에 작곡 되어진 줄 아는 한심이를 보면

저는 오 ! 한심해란 노래를
작곡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든 것입니다
 
그리고 시험 볼 때마다 보여 달라고
꼭꼭 찌르는 그녀의 때가 낀 긴 손톱 때문에
나의 등 언저리는 언제나 너저분해 졌으며
 
그것을 보고도
느긋하게 창피해 할줄 모르는
그녀를 볼 적마다 현대여성의 뻔뻔스러움에
놀란 내 콧수염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리는 얼어 붙어 쌩쌩이며
찬 회색의 겨울 바람은 겨울내내 불어 제쳤으나

나는 여느때의 겨울처럼
발이 시려 잠못 이루는 밤을
지내본 적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믄 나의 발은
이미 심한 동상에 걸려 감각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심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서로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열아홉살의 뜨거운 체온뿐
그 외의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체온계는 없었기에
재 볼 수는 없었으나 집에 갈 때
필요한 뻐스표는 항상
양말 속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또 우리가 그 겨울을
춥지 않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둘이 팔짱을 끼고 걷는 뒷골목 길가에
버려진 연탄불을
매일매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심이는
그 긴 겨울의 골목 입구에서부터
끝까지 외투도 없이 바짝 붙어서

혹시 제가 돈이라도
떨어뜨릴까봐 끝까지 미행해 주었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심이는 거지같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봄이되자 약속이나 한듯 헤어졌든 것입니다
그것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