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즉

신영복 교수님 생전의 애창곡 : 시인의 마을

매루 2016. 1. 16. 17:37

 

 

 

 

 

신영복(74) 성공회대 석좌교수 

감옥에서 20년을 보내면서 가진 생각과 소회를 담은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으로 유명한 신영복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가

15일 밤 별세했다. 향년 75세.

신 교수는 시대의 고통을 사색과 진리로 승화시킨 시대의 지성인이었다.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20년 옥살이를 한 신 교수가

1988년 출소 후 옥중서간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보여준 반듯한 모습은

같은 동시대 아픔을 겪은 이들의 위안이자 심적인 지지대가 됐다.

27세부터 47세까지, 옥 안에서 살아야 했던 새파란 젊은 시절을 그저 흘려보내는 대신 끝없는 자기 성찰로 채워나간 고인은

‘87년 체제’와 함께 사회로 나와 정권교체와 외환위기 등으로 이어진 숨가쁜 30년을 지켜봤다.

 

 

 

2015년 만해문예대상 신영복 공적서
김창남/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2015년 7월 만해문예대상을 수상한 신영복 교수에 대해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김창남 교수가 당시 쓴 공적서입니다.

신영복 교수는 오랫동안 인간과 생명, 평화와 공존의 참의미를 전달해 온 교육자이자 저술가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강의를 들으며 삶의 좌표를 가다듬었고 많은 독자들이 그의 책을 읽으며 깊은 성찰의 메시지를 전달받았다.

 그는 또한 아름답고 깊은 울림을 가진 글씨와 그림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부박한 일상 속에서 생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반추하는 감동을 느끼게 해 준 서화작가이기도 하다.

 

신영복 교수는 1941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해 1959년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학생서클의 구심점이자 지도자로 활동했던 그는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1968년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고

20년 20일 동안 영어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1988년 가석방된 신영복 교수는 주변 친구들의 배려 속에 19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교수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1998년 사면복권 되면서 정식으로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가 되었고

2006년 정년퇴임한 후 현재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신영복 교수의 삶은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감옥에 가기 전 영민하고 다재다능한 소년에서 시대의 모순을 천착하는 사회과학자로 성장해 온 시기가 첫 번째라면,

 20년이 넘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면서 감옥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을 만나 교류하며

 책과 논리가 아닌 인간과 관계를 통해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형성하고 낮은 곳에 함께 하는 삶의 자세를 세운 시기가 두 번째이다

 (그는 이 두 번째 시기를 참다운 대학시절이었다고 말한다.)

세 번째의 시기는 감옥에서 나와 대학에 몸을 두면서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인 글과 글씨, 강연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각성의 계기를 주고 사랑과 실천의 의미를 전달해 준 시기라 할 수 있다.

그의 글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감옥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통해서다,

 한 달에 한번 허용된 편지에서 그는 감옥에서의 신산한 삶을 오히려 따뜻한 위로와 성찰의 메시지로 담아 가족들에게 전했고

이 편지글 가운데 일부가 <평화신문>에 소개되면서 그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8년 그가 감옥에서 나온 후 편지글들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바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이 책은 그가 감옥에서 부딪히고 어울린 저 밑바닥 세상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 단아하면서 고도로 절제된 산문으로 표현되어

 수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지금도 꾸준히 새로운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신영복이 현실과 민중을 만나며 창백한 지식인의 관념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식과 삶을 재구성하며 낮지만 깊은 지혜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얻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바로 그런 과정이 주는 감동적 울림 때문이다.

 

신영복 교수는 두 번에 걸쳐 국내와 국외 기행기를 신문에 연재한 바 있는데

 그 결과로 나온 책이 국내 여행기인 <나무야 나무야>(1996)와 해외 여행기인 <더불어 숲>(1998)이다.

 이 두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깊은 역사의식과 창의적 상상력으로

역사 속의 인물과 장소를 ‘지금 현재’의 역사성 속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그 의미를 포획하는 놀라운 지적 통찰의 기록이다.

우리가 단지 관광 대상으로 혹은 피상적인 역사 상식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던 장소는

그의 글을 통해 어느덧 우리가 발 디디며 살고 있는 현실과 문명에 대한 성찰적 계기로 다가온다.

 

신영복 교수가 쓴 또 하나의 명저는 <강의>(2004)다.

 나의 고전독법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은 그가 오래 동안 강의해 온 동양고전들에 대한 그 나름의 해석이 담겨 있다.

경제학을 전공하던 사회과학자가 오랜 수형 생활 속에서 새롭게 동양 고전을 공부하고 사유하며 이루어낸

장강과도 같은 지혜가 이 책 속에 있다.

유려하고 짧은 단문으로 마치 화두를 던지듯 쓰여진 그의 글들은

그 어떤 화사한 수사나 현학 취미로 장식된 글들보다도 긴 여운을 남기며 끊임없이 사색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의 책들이 많은 독자들에게 되풀이 읽히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이 시대의 참스승으로 생각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신영복 교수의 지혜와 사상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단지 그의 책들을 통해서만이 아니다.

 짧지만 놀랍도록 함축적인 지혜가 담긴 그의 글씨와 그림은 그의 사상을 접할 수 있는 또 하나 중요한 매개체다.

신영복 교수는 어릴 적 한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한문과 서예를 배웠다.

물론 그가 좀 더 깊은 공부를 한 건 감옥에서다.

교도소 서예반 활동을 통해 그는 어떤 직업적 서예가들과도 다른 그만의 독특한 한글 서체를 만들어냈다.

글자 하나하나가 마치 어깨동무를 한 듯 기대고 있는 그의 독특한 글씨는 수많은 시민단체들의 현판과 벽을 장식하고 있다.

‘처음처럼’ ‘더불어 숲’ 등 일견 평범하고 단순해 보이는 문장에 특유의 통찰과 지혜를 담아내는 그의 서화작품들은

많은 시민들에게 평화와 민주, 생명과 공존, 화해와 연민의 메시지를 전하는 잠언들이다.

 

신영복 교수는 탁월한 강연자이기도 하다.

 그의 언어를 통해 삶의 지혜와 위로, 성찰의 계기를 얻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강연을 청한다.

오래 전부터 그는 전국의 수많은 지역과 단체, 학교에서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많은 시민들에게 낮고 고요하지만 치열하고 풍요로운 성찰과 희망의 언어를 전하고 있다.

신영복 교수의 사상은 ‘더불어 숲’이라는 글귀에 상징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힘과 대결, 경쟁과 승리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공존과 평화의 의미를 전하는 그의 언어는

 책을 통해, 강연을 통해 이 시대의 등대가 되어주고 있다.

 

신영복 교수는 주로 삶과 성찰적 글을 통해 우리 사회가 급격한 자본주의화로 잃어버린 공동체성을 회복하도록 일깨워주면서,

 공동체적 삶을 조용히 실천해왔다.

 등록금이 없어 학업에 어려움을 겪는 대학생들을 위해 몇 번의 서화전을 통해 얻은 수익금을 기부했다.

 또 ‘처음처럼’이란 소주 글씨를 써주고 받은 1억원을 대학에 장학금으로 기부하기도 했다.지난 2008년엔 한학과 서예, 금석학 분야의 대가인 청명 임창순 선생을 기리기 위해 청명문화재단이 제정한 임창순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청명문화재단은 “다양한 개인과 계층과 문화가 서로를 살리고 북돋우는 사랑과 화합의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는

 신영복의 따뜻한 분노가 우리 사회에서 더욱 큰 울림과 더욱 넓은 어울림으로 번져 가리라 믿는다”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본지 기자가 촬영한 신구 대통령기록관 현판으로 위쪽이 과거 신영복 교수의 글씨체이고

아래는 8일 촬영한 국가기록원글자체다./아이아뉴스통신=박귀성 기자  



박근혜 정부 곳곳에서 이념편향적 행정이 드러나면서 성남시 수정구 시흥동 소재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이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쓴 정문 현판이 ‘좌파교수의 글씨체’라고 낙인찍어 교체한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현판이 교체된 과정은 “대한민국 정체성이 훼손된다”라는 한 보수단체의 민원이 제기된 이후 이뤄진 교체라서 향후 논란이 예상된다.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소속 새정치민주연합 임수경 의원이 대통령기록관에서 받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5월 26일 대통령기록관리 전문위원회 제15차 회의에서 대통령기록관 현판 교체를 첫 심의했는데,

이날 회의에는 이재준 당시 대통령기록관장과 강규형 전문위원 등 총 8명이 참석했다.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인 강규형 위원은

현판글씨체에 대해 민원을 제기한 권유미 블루유니온 대표와 함께

자유민주연구원 정책연구위원을 맡고 있고 보수적 성향이 짙은 이 연구원에는

최근 ‘공산주의 감별사’로 국민의 공분을 산 고영주 방송문회진흥회 이사장이 정책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결국 지난해 12월 2일 정문 현판을 교체해 글자체가 ‘국가기록원 글자체'로 바뀌었다.

당초 '신영복 글씨체'로 적힌 현판에 새 현판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교체가 이뤄졌다.

신영복 교수가 쓴 현판은 2008년 행정안전부가 개관할 당시부터 사용돼 왔다.


앞서 보수단체인 블루유니온은 2013년 10월 국민신문고에 글을 올려 대통령기록관 현판 글씨체 교체를 요구하는 민원을 제기했는데,

이때 사유가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된 신윤복 교수의 현판 글씨체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한다”라는 것이다.

이에 대통령기록관은 “신중 검토하겠음”이라고 답변했다.


대통령기록관리전문위원회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이날 회의에서는

“신영복 교수의 글씨로 공공기관의 상징적인 현판을 제작한 것은 문제가 있으므로 세종시로 이전하는 시점에 교체해야 한다”,

 “현판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는데 위원회에서 회피하는 것은 부당하므로 결정내리는 것이 맞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닌, 때를 기다리자는 의견이 제기되어 차기 회의 때 안건을 재상정하기로 결정하고 이날 의결은 연기됐다.


하지만 이같은 주장에 대해 임수경 의원은

 “이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있는 정부를 좌파정권으로 규정하는 정치적 편향성까지 보인 것으로,

대통령기록관리전문위원회 위원의 정치적 중립성, 업무의 독립성,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제6조를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통령기록관측에 따르면,

현판의 운명은 대통령기록관은 2013년 11월 정부조직개편에 따라 안전행정부 명칭이 행정자치부로 변경되면서

별다른 굴곡 없이 자연스럽게 교체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신영복 교수의 글씨체도 운명을 다했다.


대통령기록관은 정부조직개편으로 안전행정부가 행정자치부로 변경됨에 따라 현판을 교체하게 됐고,

국가기록원 산하의 기록관 현판을 모두 통일하자는 취지에서 이루어진 조치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임수경 의원이 대통령기록관에 확인한 결과

2008년 행정자치부가 행정안전부로, 2013년 행정안전부가 안전행정부로 변경되었을 때는 부처의 이름만 바꾸고

신영복 선생의 글씨체는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대통령기록관이 다른 기록관과는 그 특수성에서 의미가 다르고, 설립시 별도로 글씨를 받아 현판을 제작했다는 점에서 볼 때

이를 교체한 것은 좌파라는 낙인찍기와 정치적 편향성에서 비롯된 결정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임수경 의원은 “대통령기록관리전문위원회는 그 이름에서 보듯,

국가의 가장 중요한 기록물이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기록물의 수집, 보존,

관리에 대한 사항을 처리해야하는 엄중한 임무를 가지고 있는 위원회”라며

“산적한 기록물관리 과제들은 뒤로 미룬 채 좌파 운운하며

현판을 바꿔야 한다는 논의에 열을 올리는 위원회의 자질을 묻지 않을 수 없다”고 강하게 질타했다.


아울러 임수경 의원은

“공정하고, 엄정해야하는 국가 주요 위원회가 본분을 망각한 채 정치적 편향성과 이념적 잣대에 매몰되어

국민을 편가르기하고 분열시키는 것은 이를 금지한 법률 위반일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 불행한 일”이라며

“대통령기록관리전문위원회가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전문성과 독립성을 갖춘 인사들로 구성되어 올바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5년 10월 9일  아이아뉴스통신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이 “과거 간첩사건 연루자가 썼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체성이 훼손된다”는 한 보수단체의 민원을 이유로 지난해 12월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쓴 정문 현판을 교체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누리꾼들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누리꾼들은 정부의 편협한 사고를 질타하는 한편,

그런 논리대로라면 과거 친일 행적과 남로당 활동 경력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흔적도 지워야 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8일 <한겨레>의‘현판 글자에도 이념 잣대…신영복이 썼다고 교체’기사를 본 한 누리꾼(아이디 ‘솔**’)은 댓글에 “신영복 교수는

1960년대 후반에 억울하게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20년간 옥살이를 한 분이다.

사건 관련 사항은 기록을 찾아봐라.

때로는 거짓이 진실을 덮겠지만 결국은 진실이 승리할 것이라 믿는다.

반드시 그렇게 돼야 한다”고 썼다.

 

신 교수는 1968년 7월 중앙정보부가 주도한 대규모 공안사건인 ‘통일혁명당(통혁당)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20년2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한 뒤 1988년 가석방됐다.

당시 신 교수가 수감 생활을 하며 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정체성이 훼손된다”는 보수단체의 지적을 두고,

 “친일과 남로당 경력이 알려진 박 전 대통령은 왜 문제 삼지 않느냐”는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한 트위터 이용자(아이디 ‘@ib****’)는 “신영복 교수의 글씨 현판을 간첩사건 연루자 글씨라고 뗐다는데,

과거 친일·남로당 출신이 대통령할 때 만든 고속도로, 새마을도 뜯어내고 다시 깔아야겠다”고 꼬집었다.

 

다른 이용자(아이디 ‘@free*******’)는 “박정희는 공산주의 정당인 남조선노동당(남로당)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남로당에 가입해 활동했던 죄로 박정희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군부 내 남로당원의 명단을 실토한 대가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며 신 교수와의 형평성을 제기했다.

 

페이스북 사용자인 김아무개씨는

“전국 곳곳의 다까끼 마사오(박정희 전 대통령이 창씨개명한 이름)의 글씨는 민원이 없어서 그대로일까?”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신 교수가 썼기 때문에 현판을 떼어야 한다면 그의 글씨체가 들어간 소주도 먹지 말아야 하는게 아니냐는 조롱 섞인 반응도 나온다.

 

지난 2006년 두산주류BG(현재 롯데칠성음료로 합병)는 소주 ‘처음처럼’을 내놓으면서,

당시 브랜드전문가로 활동하던 손혜원 새정치민주연합 홍보위원장이 신 교수의 글씨체를 따와 브랜드명으로 사용해왔다. 

 

이에 대해 페이스북 누리꾼 송아무개씨는 “처음처럼 소주는? 종북소주?”라는 반응을 보였으며,

누리꾼 민아무개씨도 “그럼 처음처럼도 마시지 말라”고 지적했다.

 

한 트위터 사용자(아이디 ‘@gdak******)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사회도 그렇다. 보수는 대한민국을 나찌 독일로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2015년  10월  8일

 

김성환 기자hwany@hani.co.kr

 

 

 






 

 

 

컨텐츠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