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희 작곡 민해경의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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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이후 남성이 대다수이던 버스 차장을 여성으로 바꾸라는 지시가 내려지자
여성들을 버스 여차장으로 모집을 하고 양성소까지 만들어 운영을 했던 시절의 광고다.
광고와는 사뭇 다른 현실이 펼쳐졌다.
당시 여성버스차장들은 첫를 타고 막차 시간에 퇴근을 하는 데
하루 16시간 이상씩 근무를 하고 한달 1600원의 월급을 받았다,
당시 쌀 한가마니 값의 절반을 받고 일을 했던 것이다,
위함에도 고스란히 노출이 됐는데 문을 닫지 않고 출발하는 버스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곤 했다.
가난한 시골 살림에 입을 덜기 위해상경한 시골 여성들의 선망의 직업 가운데 하나 였다
인터넷에서 유명한 <1964 - 07 - 10 늦은밤 피곤한 차장모습>이란 제목의 사진 입니다
저는 1979년 봄에 3년동안의 군복무(탄약 관리병)를 마치고 그해 늦가을에 부평에 있는 풍산금속 이라는 방위산업체에 입사를 합니다
10/26 박정희 시해사건, 12/12 군사반란등 어수선한 시국 속에서도사회에 다시 발을 딛는 저의 마음은 늘 즐거웠읍니다(언론이 정확한 보도를 안하거나 못했기에 알수도 없었지만)
그런데 지금도 그러하듯 까칠한 제 성격은 부평역과 회사를 운행하는 풍산금속 통근버스를 탈때마다
버스에 오르는 순서와 상관 없이 관리직이나 간부사원들에게 좌석을 양보 해야하는 분위기가 싫었었읍니다나이 60인 지금도 마찬가지 이듯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 는 말에 늘 공감하는 저 였기에길어지는 출퇴근시간의 불편과 교통비의 지출을 감수하며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출퇴근을 하였읍니다
군대생활 3년동안의 경력(탄약관리)은 방위산업체인 풍산금속 입사에 도움이 되었지만픙산금속 부평공장은 동파이프와 세계각국의 동전(주화)제조가 주업종 이었기에저의 풍산금속 공돌이 생활은 그리 오래 가질 못하고 이듬해의 여름휴가때 서울의 다른직장에 취업을 하면서 마치게 되었읍니다
서울로 출퇴근을 시작한지 한달여 지난 어느 가을날 의 출근길,,,,,전철 부평역행 시내버스 안에서 저는 그버스 안내양에게 인사(?)를 받습니다"직장을 바꾸셨나 봐요 ?........." 라며 수줍어 하면서도 또렷하게 제게 말을 건넨 안내양 이었읍니다저희집이 있었던 부평삼능 이라는 곳과 풍산금속이 있는 효성동에서 버스를 타고 내리다가 효성동이 아닌 부평역 앞에서 버스를 타고 내리는 저의 동선을 그 안내양이 알고 있었던 것 이지요
그러한 그녀의 인사를 받고는 저는 무척 당황을 하게되는 와중에그동안 저 여인이 고맙게도 저를 지켜 보아온 동안, 그녀의 존재조차 모르고있던 저자신이 괜시리 미안 하여졌읍니다훗날 저와 그녀가 함께 시간을 낼수 있었던 어느 가을날 지금은 대단위 주거시설이 들어서 번화해 졌지만 당시에는 온통 논과 밭 이었던 삼산동의 까치마을 이라는곳의 그녀의 숙소에 면회를 갔던적이 있었읍니다
남들처럼 공부도하고 싶고 사랑을 느끼고 싶을 꽃다운 스물 즈음의 나이에온갖 열악한 상황속에서 힘든일을 하던 버스 안내양 이었지만반듯한 삶의 자세와 흐트러짐 없는 그녀의 마음가짐이 존경 스러웠읍니다그때 그녀가 타고 탑승객들을 안내하던 버스 출입문 윗벽에 깨알같이 적혀 있었던 민해경의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가사가 눈에 선합니다
1982년부터 서울지역에는 자율버스 제도가 도입되어 안내양 없는 시내버스가 운행되기 시작했고,
1985년에는 전국의 모든 시내버스에서버스 안내양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춥니다.
[그 시절 우리는] 버스 차장① 누이를 위하여
- 이상락 소설가
- 2018.05.11 13:15
1970년대 초에 상경하여 처음 서울의 시내버스 차장을 보았다.파란 유니폼을 산뜻하게 차려 입고 ‘오라이, 스톱!’을 외치는 그 모습은 촌놈인 내 눈엔 썩 멋져 보였다.투박하고 우중충한 시골 버스의 남자 차장과는 견줄 바가 아니었다. 역시 서울은 서울이었다.
그러나 사춘기적 나의 가슴을 설레게까지 했던 처음의 그 모습이 버스 차장의 모두는 아니었다.출입문 바로 옆의 전용 좌석마저 승객에게 빼앗기고,‘오라이’와 ‘스톱’ 사이의 그 짧은 시간을 못 참아 문짝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지친 모습을 보았을 때,문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불어터질 것 같은 만원버스의 출입구에 간당간당 매달려 가는 모습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면서…그들은 이미 멋진 천사가 아니라, 모 심고 밭 매고 나뭇단을 머리에 인 고향 마을의 누이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아버렸다.
한문 수업 시간에, 선박의 선장이나 비행기의 기장은 ‘긴 장(長)’자를 쓰지만버스나 전차의 차장은 ‘손바닥 장(掌)’자를 쓴다는 사실을 처음 배웠다.시험에 그 문제가 출제됐을 때 나는 그 두 글자의 쓰임새를 결코 헷갈리지 않았다.왜냐면, 버스 차장이 출입문 위쪽 벽을 손바닥으로 ‘탕!’ 한 번 치면 멈추라는 신호요,‘탕탕!’ 두 번 치면 출발하라는 신호라는 걸 이미 간파해버렸던 것이다.손바닥은 차장의 매우 중요한 노동수단이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노선버스가 등장한 때는 1912년이었다.경상도의 대구에서 경주를 거쳐 포항에 이르는 거리를 부정기 버스로 운행한 것이 그 시초였다.40년대 말에는 군용트럭을 개조한 시내버스 500여 대가 서울 시내에서 운행됐다.버스 운행이 본격적으로 활발해진 것은 50년대 중반부터였다.
그러나 50년대 말까지만 해도 타고 내리는 문이 버스의 앞쪽과 뒤쪽 두 곳에 있었고, 요금을 받는 차장도 남자였다.그러던 것이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여자 차장으로 바뀌기 시작했고,더불어서 버스의 끝부분에 붙어 있던 뒤쪽 출입문은 가운데로 옮겨졌다.그러니까 본격적으로 여자 차장들이 승객의 승하차를 안내한 것은 1960년대부터라고 보면 될 것이다.
내가 버스 차장 경력이 있는 사람을 찾아 옛 시절의 얘기를 듣고자 취재에 나섰던 때가 2001년 초였는데,그러나 마땅한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사실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여성들이 왕년의 버스 차장 경력을 떳떳치 않게 여겨서 감추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한 사람을 만났다. 1970년대 말에 충북 청주에서 시내버스 차장으로 일했던 박봉자씨가 그 사람이다.1961년생이니 내가 만났을 때 그의 나이가 마흔이었다.
“77년도에 중학을 졸업했어요.사촌언니가 서울에서 재봉사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서울에 가서 미싱 기술을 배우려고 했지요.그런데 부모님 생각은 달랐어요. 그때 바로 아래 동생 봉식이가 중3이었고 셋째 봉남이가 중2였기 때문에,장차 그 두 동생 뒷바라지를 내가 해야 했어요.그러니 무슨 기술을 배우고 익히고 할 여유가 없다, 당장 돈벌이를 해야 한다, 그래서 버스 차장으로 들어간 것이지요.”
이 열일곱 살짜리 소녀는, 두 남동생이 대학 졸업할 때까지의 학비를 자신이 책임질 것이니 걱정 말라고 큰소리를 치고는,씩씩하게 집을 떠나 청주시 봉명동에 있던 ‘대한운수’에 취업을 했다.
“기숙사에 들어갔는데, 물론 내가 젤 막내였지요.함께 지내게 된 차장 언니들 사정을 들어보니 다들 형편이 비슷비슷했어요.재밌는 게, 나처럼 남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차장을 하고 있는 언니들이 대부분이었다니까요.”
그 시절의 누이들은 참 마음씨가 고왔다. 아니, 심성이 착해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자형제들의 학비 뒷바라지를 감당해야 했으니, 달리 보면 강요된 미덕의 희생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