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2/11 (6)
蘭室에서1515
절친한 친구 사이를 가리켜 ‘관중과 포숙의 사귐’, 즉 ‘관포지교(管鮑之交)’‘’라고 하지요 일생을 살아가면서 ‘관포지교(管鮑之交)’와 같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한 사람만 있어도 그 사람의 삶은 최소한 실패하지는 않은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고등학교 2학년때 어느 중간고사시간..... 시험감독관선생은 학생들이 싫어하는 선생님중에 단연 으뜸 이었던 분 이었읍니다 싫어하는 까닭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선생님의 담당과목이 별로 재미없는 과목이었고 지루함과 졸음을 부르는 선생님의 수업내용과 목소리 거기다가 우리가 가장 그 선생님을 싫어했던 까닭은 그선생님의 학생들에 대한 폭력 이었읍니다 여느 시험날 처럼 그날도 시험지를 분단마다 앞에서 뒤로 돌리는데 시험지가 맨뒷줄의 학생에게 전달 되..
임삐용의 천국(선감원 또는 선감학원)은 일제 시대 말기(1941년)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의해 선감도에 세워진 소년수용소로 1982년까지 약 40년 동안 운영 존재 하였었고(원아대장에 따르면 인원이 4,691명에 달함) 지금은 경기창작센터로 바뀌었으며 인근에는 당 시설의 비극적인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선감역사박물관이 있읍니다 1943년 선감학원 야외교육 장면 IMF시절 이었던 1998년도에 저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하여 배다리에 있는 헌책방을 종종 찾아 갔었읍니다 그때 그곳에서 우연히 읽게 되었던 이라는 책이 있었읍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책 이기도 했지만 저는 한때(초등학교 5학년~중학교 2학년) 인천 용현동 낙섬에 있었던 부랑아 보호시설의 원생들과 함께 지낸적이 있었읍니다 그들은 선검도의 원생들과 똑같..
“무 배추 캐어 들여 김장을 하오리다 앞내에 정히 씻어 염담을 맞게 하고 고추·마늘·생강·파에 젓국지 장아찌라 독곁에 중들이요 바탕이 항아리라 양지에 가가 짓고 볏짚 싸 깊이 묻고 박이·무·알암밤도 얼잖게 간수하고” <농가월령가>중에서 배추를 소금물에 절이고 절은배추를 맑은물에 씻고 무를 채썰고 양념을 버무리고........ 해마다 김장 담구는날이면 그래왔듯이 돼지고기를 삶아 배춧속에 들어갈 양념과 함께 배추의 노란 속잎에 싸먹는속대쌈을 맛보며 또 한해가 지나가는것을 느끼게 됩니다 아내는 해마다 3차례의 김장을 담구는데 올해 첫번째로 지난 주말에 아내의 친정식구들과 함께 친정동생들의 김장을 담구었읍니다 장모님과 처제들 두명의 동서들은 주거니 밭거니 ......
구근식물인 제피란서스 로제아는 중남미가 원산지로 나도샤프란, 구슬수선화, 기생란, 마농꽃 등 여러가지 이름을 가지고있읍니다 1주일여전에 분갈이를 했던 제피란서스 로제아 분갈이를 하다가 제피란서스 로제아 구근 하나를 빼먹었기에 작은 화분에 따로 심어 비닐하우스안에 모셔 두었더니 보란듯이 꽃을 피웠읍니다 2014년 초여름(6월 8일)에 피었던 모습 입니다 2014년 6월 8일 영흥도 하수오농장
한가윗날 저녁식사가 끝니고 밤시간이 되면 방안에서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는데 어마니 께서는 마당에 나무로 만든 침상위에 앉아 고개들어 한가위 보음달을 바라보고 계셨었읍니다 저는 그때 어머니의 두볼에 휘영청 밝은 보름달빛을 반사 시키던 눈물방울들을 볼수 있었읍니다 생전의 어머니께서 북의 혈육들을 그리워하며 쓰셨던 편지 북한에서 김일성집권 후반기와 김정은의 통치시절에는 국적이 미국인인 한국인들이 북한의 연고지에 서신왕래가 가능 했었읍니다 실향민(아버지 황주, 어머니 장연)이신 저희 부모님 께서는 당시 미국에 이민을 가 살고있던 친척을 통하여 북의 가족들 소식을 알고저 하셨었읍니다 백령도 심청각에서 바라본 황해도 장연군 - 2015년 5월 24일 한국전쟁이 나기전까지의 어머니의 고향 주소는 황해도 장연군..
저희 부모님의 고향은 황해도황주(아버지)와 황해도 장연(어머니) 이십니다 어머니 께서는 1949년도에 서울의중앙대학교에 진학을 하시어 당시 인천에 살고 계셨던 언니(저의 이모님)집에서 기거하며 경인선 열차통학을 하시던중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통에 어머니의 고향인 장연이 북한땅이되는 바람에 졸지에 고아신세가 되었고 언니인 저의 이모님댁에서 생활을 하시다가 1954년에 같은 황해도 실향민이신 저희 아버지와 결혼을 하셨읍니다 저희 어머니와 이모님 께서는 남한에 피붙이라고는 서로가 유일 했었기에 이모님 께서는 평생 저희 형제들을 무척 따뜻하게 대해 주셨읍니다 슬하애 1남1녀를 두셨던 이모님 께서는 38도선이 그어지기전에 자유로웠던 친정 나들이를 가셨다가 당시 4살 이셨던 아들을 친정에 두고 오셨는데(어린아들의 외..